일목마당

"박 선배님 저희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그 사람들과 어울리기 어렵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들과 상종하지 마세요" 대학 2년
후배인 미스터 리가 좀 민망한 표정으로 전에도 여러 번 하던 말을 위로 삼아 다시 말했다. 그렇지만 나는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1950년대에 한 영국신문이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고 한 말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난 며칠 동안 우리 가족이 20여년 동안 살고 있는 이 조용한 미국의 교외 도시 교차로에 난데없이 나타나 서투른 영어와 마구 쓴 한글로 치졸하게 만든 피켓을 들고 서성거리는 한국사람들을 보고 어깨를 으쓱하고 지나가던 미국인들이 늘어나더니 드디어 이들의 모습이 지방방송의 저녁 뉴스로 보도되었다.

나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참으며 한편으로는 이 모든 희극 같은 일이 나 때문에 일어난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미국 TV 보도기자가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그 중에서 영어를 좀한다는 친구가 앞으로 썩 나오더니 "Park Chung Hwa, dictator, bad guy." 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 기자가 다시 "Are you protesting against his government?" 라고 하자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씩씩하게 "Yeah!"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기자는 한국의 사정을 알아들었다는 듯이 "여기 사는 한국계 미국인들이 한국의 독재정권에 항의하는 데모를 벌리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의 인권탄압은 우리 미국인들의 관심사이며 우리 미국인들은 세계 어디에서든지 인권이 유린되는 것을 방관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미국인들이 오래 동안 소중히 지켜온 가치관의 하나입니다." 이렇게 말하며 보도를 끝내는 것이었다.

보도 중에 카메라에 잡힌 피켓에는 한국말로 "박정화는 즉각 사퇴하라!" "부정 부패의 하수인은 물러가라!" "공명선거 다시 하라!" 등등이 보였고 영어 피켓은 누가 써주었는지 Park chung hee's Running Dog! 등이 보였다. 나는 한국에서 50년이나 60년대에 많이 보고 듣던 말들을 오래간만에 이곳에서 다시 보게 되니 약간 코믹하게 느껴져 실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여튼 그 우람하고 좀 거칠게 생긴 친구가 서투른 영어로 박정희를 들먹이며 덮어놓고 "dictator" "bad guy" 라고 지껄인 것은 고사하고 한술 더 떠서 기자의 마지막 질문에 "Yeah!" 라고 힘있게 대답을 한 바람에 며칠 전에 실시한 아주 작은 한인 인구들끼리 모여 실시한 한인회장 선거가 일약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로 반대하는 항의 데모로 둔갑한 촌극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지난 70년대부터 이런 저런 사연들로 이곳에 모여 살게 된 한국인들이 서로 모여 오순도순 돕고 살아보자고 시작한 일이 내가 감투에 환장을 한 사람으로 다른 입후보자의 눈에 비쳤고 더구나 한국에서 여당인 공화당 국회의원으로 활동하시는 부친 때문에 내가 박정희 대통령의 하수인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나는 고지식하게 자기 직장에나 열심히 다니며 자기 아내나 자녀들과 여가를 즐기는 미국의 중산층 생활 방식에 적어 우리 교포들과 별로 관계가 없이 조용히 사는 동료들이나 후배들에게 무엇인가 동포들의 위해 봉사해야 된다고 순진하게 주장하던 것이 부끄러웠고 한 편으로는 미국 같은 평등 사회에 살면서도 영어도 못하고 교육도 변변치 못하게 받아 한국 사람들의 눈에는 별 볼일 없는 직업에 종사하며 고생하는 동포들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일종의 주제넘은 엘리트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자신에 대해서 더욱 면구스럽게 느껴졌다.

그 사람들도 미국 사회에 와서 살면서 자유와 평등의 개념을 체험으로 배웠고 그것을 서투른 영어와 행동방식으로라도 실천해보는 그들의 용기에도 일말의 존경심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주장이 옳든 그르든 다 제쳐놓고 한인회장을 내놓기로 결심하였다. 이러한 내 결정을 안 동료와 후배들이 다 한 마디씩 하는 것이었다.

"거 보세요. 제가 뭐하고 했습니까? 그 사람들 무서운 사람들이에요 한이 많은 사람들이거든요. 그 사람들이 한국에서 반장이라도 한번 해봤더라면 그러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 사람들이 무식한 것 같지만 한국에서 못 된 정치인들이 하는 짓 다 잘 배운 친구들에게요 선배님 자동차 유리창 깨고 부정 선거의 원흉으로 몰고 그런 버릇 다 이민 보따리에 챙겨왔다니까요"

"잘 하셨어요. 앞으로는 그분들을 위해 통역 일이나 해주시든지 하세요. 앞에 나서지는 마세요. 이제는 그 사람들도 좀 기죽지 않고 살아볼 차례예요."

나는 후배들의 이야기를 더 듣기 전에 전화 수화기를 들고 소위 선거관리위원장에서 내 결심을 알리려고 가벼운 마음으로 전화 다이얼을 돌렸다.

영어를 배워야 됩니더

어제 저녁이었다. 몇 주전에 이민 온 미스터 김 형님 가족이 잠자리와 부엌 살림이 겨우 장만되었다면서 갑자기 저녁식사에 초대하였다.

미스터 김 형님 댁에 도착하니 벌써 미스터 김과 그의 형님이 무슨 이야기인지 옥신각신 하고 있엇다.

니 와 그렇게 사람을 놀래키노? 니 헹수가 전화 걸 때마나 얼마나 놀래는지 니 아나?

형님요. 여기서는 전화할 때 헬로캅니다. 여기 미국 아닝교? 니 나를 뭘로 알고 그러카노? 내 여기가 미국인 줄 모리는 줄 아는갑다? 니가 미국 시민권 땄다카는 거 잘 안데이. 카지만도 니는 한국사람인기라. 니가 내 집에 전화 걸어서 할론지 핼론지 해봐야 니는 한국 사람인기라. 내 말은 니 가 우리 집에 전화할 때 옛날처럼 한국말로 "여보이소, 헹수님잉교?" 카라는 기라.

형님요. 그기 잘 안 됩니더. 미국 사람들하고 일 할라믄 영어를 써야한다 아임니꺼? 그렇게 안 하믄 직장에서 서로 전화할 때 "여보이소 거기 누군기요? 소리가 나옵니더. 그러카믄 미국 직장 보스나 동료들이 막 화가 나서 야단치는 기라요. 그래서 어데 부딪쳐도 "아이구" 하머 안되는 깁니더.

그러믄 어디 부딪쳐서 아플 때 닌 뭐라카노?

그 때는 "아우치"라 안 캅니꺼?

아우치 그게 뭐꼬? 무슨 생선 이름 같데이. 니 아플 대 아우치 소리가 잘 나오드나?

웬기오. 자꾸 연습을 해야 됩니더. 그러니께 형님이 헹수님한테 헬로를 잘 연습 좀 시켜주이소. 전화 할 때마다 헹수님께서 아무 말 안하고 전화를 끊는 바람에 형님한테 인서도 자주 못 드리는 거 아입니꺼?

알았데이. 니 사정이 그렇다카믄 우리도 노력할 끼라.

형님 고맙심더. 그라고 형님한테 또 부탁인데 불고기 자시고 아파트 발코니에 서서 이 쑤시지 마이소. 미국 사람들 남 보는데서 이후비는거 되게 싫어한다 아임니꺼.

앗다. 니 웬 잔소리가 그리 많노? 나 자꾸 그러카믄 나 짐 싸들고 한국으로 다시 가뿔란데이.

형님요 제발 그러몬 안 됩니더.

이때 미스터 김 아주머니가 저녁이 다 준비되었다고 식당으로 오라고 했다. 복어 매운탕을 입에 대면서 미스터 김이 "참 얼큰하고 좋심더"하고 하자 그의 형님이 물었다.

니 그말 영어로 뭐라카노?

미스터 김 형님이 니 "말해보래이"하고 재촉을 해도 미스터 김이 우물주물하여 묵묵부답이다.

나는 집으로 오는 길에 이들 형제들의 재미잇는 대화를 생각하며 "니는 미국에서 30년이나 살고서도 어디 부딪쳐 아플 때 얼른 '아우치' 소리가 나오지 않는 이유가 뭐꼬?"하고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