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목마당

나는 코스모스를 좋아한다. 코스모스를 보면 옛 고향을 보는 것 같다. 그래서 망향에 잠기곤 한다. 가을이면 코스모스가 생각나고, 코스모스를 찾아다니기도 한다. 활짝 핀 코스모스 길을 한없이 걷고 싶어진다.

나는 남편과 함께 마천쪽

에서 남한산성을 힘겹게 올라 왔다. 비를 내려 주던 검은 구름은, 흰 구름이 되어 먼 하늘로 외로이 흘러가고, 시원한 그늘을 주던 나뭇잎도 고엽이 되어 가지를 쓸쓸히 떠나고 있다. 모두가 흘러가고 떠나는 슬픈 이별의 계절이다. 흔히들 가을은 결실을 거두는 계절이라고 하지만, 내게는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하는, 이별 노래말이 더 가슴에 와 닿는다. 유수같이 흐른 세월이 참으로 아쉬웠다.

남한산성의 나뭇잎들은 단풍도 들지 않고, 고엽으로 많이 떨어지고 있었다. 아마도 슬픈 역사의 붉은 피가 한이 맺힌 모양이다. 우리는 마천과 반대 방향인 성남으로 산을 내려왔다.

우리는 태평역에서 전철을 타고 귀가하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시골길의 코스모스가 떠올랐다. 가을하면 역시 코스모스다.

코스모스가 보고 싶다. 서울 대공원에 가면 볼 수 있겠지. 우리는 전철을 몇 번 갈아타고 서울 대공원역에서 내렸다.

공원길 벚나무는 단풍이 아름답게 들었고, 벌써 낙엽이 지고 있었다. 벚나무는 꽃만 아름다운 줄 알았는데, 빨갛게 물든 잎도 참 고왔다. 깊어 가는 가을 정취를 가슴에 듬뿍 느끼며, 공원길을 우리는 나란히 걸었다. 코스모스를 발견한 우리는 너무 반가워 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호수옆 길가로 200평 남짓한 길다란 밭에 가득히 활짝 핀 코스모스가 환영하듯 신나게 흔들어 대고 있었다.

꽃잎은 장미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산뜻하니 싱싱한 모습은 청순한 시골처녀 같이 신선하다. 빨강 진분홍 연분홍 하얀 색으로 조화된 색깔은 화사한 여자 한복 같다.

긴 줄기에 하늘거리는 모습은 긴치마를 입고 춤을 추는 여인의 모습이다.

나는 코스모스를 보고 있으면 어린 시절 쌀이 없어 고구마로 끼니를 때우던 어려웠던 고향 정경이 떠올라 슬퍼지기도 한다. 어머니와 친구들의 아련한 모습을 보는 것 같애 정이 가는 꽃이다. 마을로 들어서는 길가에 줄을 지어 피어 서서, 오고 가는 고달픈 사람들을 위로해 주었고 가난한 초가집의 싸리문, 울타리와 여기저기 척박한 언덕위에 아껴주는 이 없이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이때의 애잔한 추억으로 오래 보고 있으면 애틋한 감상에 젖게 하는 꽃이다.

지금은 고향에 가도 내가 간직하고 있는 그 옛날의 정경들은 볼 수 없다. 마을길은 신작로가 되고, 초가집은 완전히 사라졌고, 마을도 많이 변모되어 몰라보게 되었다. 물론 코스모스도 볼 수 없다. 이제는 서울의 코스모스를 보고 옛 고향을 그려보게 되었다. 장소야 어디가 되었던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아름답게 피어나서 무엇이 그리도 좋다고 환한 얼굴로 너울거리는 변함없는 모습이 부럽고 반갑다.

나이가 들면 가을을 탄다더니, 오늘은 내가 그런가 보다. 망향의 코스모스, 슬픈 이별의 계절, 흘러간 세월, 3박자가 어우러져 더욱 감상에 젖게 한다. 쉬지 않고 고개 짓을 하고 있는 코스모스를 나는 하염없이 바라보며, 어려웠지만 다정했던 고향 친구들이 그립다.

그들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보고싶다.

우리는 코스모스에서 발을 옮겨 소리 없이 굴러가는 가랑잎을 밟으며 호숫가 공원길을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해는 찬란한 석양빛을 품어내며 서산에 빠졌다. 불타는 저녁 노을을 우리는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해는 뜰 때도 아름답지만, 질 때도 아름다웠다.

고향 까치만 보아도 반갑다던가, 오늘 나는 코스모스를 만나서 반가웠고 망향에 잠겨 보았다. 확실히 코스모스는 내 마음을 흔드는 망향의 꽃이었다.

공원 광장은 검은 산 그림자로 덮였고, 찬바람이 가슴을 스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