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격랑의 세월과 인샬라 " - 한 인 수 - 차 례 제1부 격랑에 휩쓸린 삶 압록강 / 신의주, 만주의 신경, 서울 / 애 아범의 꿈 / 6.25동란 / 격랑 / 전시사관학교 제2부: 사선을 넘나들며 열여덟 육군소위 / 김일성 고지 / 수류탄 파편 / 전쟁터에서의 군상들 / 나는 장교 를 싫어합니다. / 수도고지 / 자반 병 / 사랑의 싹 / 숙명적 사랑 제3부: 시련의 군대생활 부조리와 모순 / 가난과 향락 / 주전 야독 / 돈 벌러 유학 가다 / Fort Knox에서 / 도약의 발판 / 똥파리 떼 쫒기 / 1년에 한 번식 전학한 아이들 / 짧은 효도 / 돌아앉은 한신 장군 / 지옥의 나락에서 제4부: 사이공 그리고 테헤란에서 비서실장 / 월남전의 에피소드 / 무관의 길 / 주이란 국방무관 / 몰려오는 피난민들 / 군사외교와 세일즈맨 / 한국인 교회와 학교 / 인샬라 제5부: 영광의 별을 달고 마침내 장군으로 / 지휘관 / 무자비한 훈련 / 여단장 나와라 / 교회와 법당 / 권총을 빼앗긴 장군들 / 군을 떠나면서 제6부: 전원생활을 꿈꾸며 제2인생의 설계 / 초원으로 가는 길 / 시골과 시골 사람들 / 땅을 일구며 / 수선(壽仙)목장 / 소 파동으로 실업자가 된 부자(父子) / 소 대신 염소 / 국정감사에서의 입씨름 / 광주와의 인연 제7부: 황혼을 맞이하여 황혼 / Ao Tea Roa / 살고 싶어진 뉴질랜드 / 집시 같은 생활 / 호주의 시드니 에서 책머리에 내 인생도 어언간 70이 되고 보니 이제는 살만큼 살아왔다는 느낌이 들면서 한없는 회한 (悔恨)에 젖어 들게 된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지나온 삶의 흔적들을 겸허하게 다시 되돌아 보는 마음에서 서툰 글로나마 적어나가게 되었다. 특별이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 세대에서 겪은 삶의 경험과 고뇌했 던 일들을 기록으로 남겨 후손들이 조상(祖上)인 나의 삶을 재조명해 보고, 자신들의 인생 길에 등불로 삼아 주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인생자체가 축복으로 생각되었던 꿈 많은 10대 후반의 어린 나이에 나는 6.25전쟁을 만나 홍수에 떠밀리듯 전쟁터로 내몰리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내 인생의 첫 출발을 나의 뜻과는 무관하게 총알받이 소모품 육군소위로 시작하게 되었다. 동족끼리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어야 하는 전쟁터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수없이 넘나드는 극한상황에서 함께 싸우다 쓰러져 숨을 헐 덕이며 죽어가는 내 부하들을 부둥켜안 고 통곡하던 일을 잊을 수가 없다. 그 속에서도 나는 죽지 않고 용케 살아남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때 내가 살아남은 것은 기적이었고, 그래서 하나님의 뜻 '인샬라' 라는 단어는 두고두고 내 전 생애를 통해 큰 의미로 다가서게 되었다. 전쟁 후에도 나는 국가방위를 위하여 국방의 제일선에서 내 젊음의 대부분을 보내게 되었 다. 치열한 전쟁터에서 시작된 나의 군 생활은 고난과 역경을 피하기보다는 부딪치는 길을 택했고, 군인으로서 부끄럼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 내 소임을 다 하고자 안간힘을 써왔다. 그러나 나의 삶의 중심이 군대에 있었기 때문에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부족하다 보니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소임을 다하지 못한 게 늘 미안하고 가슴이 아팠다. 나는 자식들에 게 사랑을 주는 '자상한 아버지나 애틋한 남편이 되지 못했다. 솔직히 나는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을 몰랐었다. 자식들에게 지나치게 엄격하고, 위압적이고 질책만 하는 아버지로 기억되 고 있을 것이다. 이 글을 통하여 집안 이야기와 함께 나의 삶을 낱낱이 보여줌으로서 그 동 안 아버지로서의 미안했던 마음과 못다 한 사랑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아울러 내가 겪은 전쟁의 실상을 통해서 요즘 젊은이들이 전쟁의 참담함을 알게 되고, 그들이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살아갈 수 있게 된다면 나로서는 더 이상의 보람이 없을 것이다. 이 글 속에는 나의 인생에 도움을 주셨던 많은 분들이 등장하는데 다시 한 번 그 분들에 게 감사의 뜻을 표한다. 그러나 안타까운 점은 나의 군 생활 후반에 나에게 맡겨졌던 직책 이 공인으로서 아직 세상에 알리기에는 제약이 따르는 사항이 있어 주저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이 글은 나의 후손들에게 들려주는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로서의 이야기에 불과 하 지만, 같이 늙어 가는 나의 친지들, 군의 후배들과도 추억을 더듬듯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 다. 끝으로 이 글을 쓰면서도 '과연 나는 자신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혹시라도 자신을 전 혀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편협 적이고 주관적인 입장에 매여 써나가는 우를 범하지나 않 는지...' 하는 의문이 줄 곳 나를 괴롭혀온 게 사실이다. 그러나 솔직히 고백하건대 글을 쓰 는 내내 "진솔하게 써야지 진솔하게 써야지"하고 몇 번이나 스스로에게 다짐하면서 이글에 임했다는 사실을 나의 변으로 남기고 싶다. 제1부 격랑에 휩쓸린 삶 1. 압록강 요즘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일이겠지만 나의 어머니는 아이를 열 셋을 낳으셨다. 그러나 내 위로 여덟은 유아기에 다 죽고 아홉 번째인 내가 제대로 자란 첫 자식이 되었다. 내 다음으로 10번째 태어난 아이가 또 죽고 열한 번째와 열두 번째가 살고 열세 번째가 또 죽었으니 결과적으로 열 셋을 낳아 셋만 건진 셈이다. 의료 체계가 발달하지 못해 영아 사망률이 높아서 생명에 대한 보장이 없던 시절이라서 내 어머니뿐만 아니라 옛날 여인들은 아이를 많이 낳을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나를 배속에 갖고 이번 아이는 꼭 살려보겠다는 간절한 소원에서 예수를 믿기 시 작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기 집에서 낳지 않아야 아이가 오래 살수 있다고 하는 미 신을 믿었기 때문에 출산의 진통을 겪으면서도 압록강을 건너서 이모님이 살고 있는 만주의 안동으로 건너가서 나를 낳으셨다. 한 마디로 아홉 번째 태어날 아이를 오래 살도록 하기 위해서는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집 푸라기라도 잡으려는 마음에서 기독교니 미신이니 가릴 것 없이 매달리셨다. 또한 내가 태 어나자 이름의 물가 수(洙)자 돌림을 목숨 수(壽)자로까지 바꾸어, 기린 린(麟) 목숨 수(壽) 로 지어서 오래 살기를 바라는 부모의 절대적인 소원을 나타낸 것이다. 내가 태어난 후에도 아래로 둘이나 잃었기 때문에 살아난 두 동생의 이름도 학수(鶴壽), 성 수(聖壽)로 지었고, 어머니는 내가 잘 자라는 것을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믿으시고 맏아들 인 나를 하나님의 종으로 바치기로 결심을 하셨다. 나는 신의주 제2 교회를 담임하던 한 경직 목사에게 유아세례를 받았다. 오래 전에 한국의 ＴＶ에서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라는 소설을 드라마로 제작한 시리즈를 감명 깊게 본 적이 있다. 미국에서 기록적인 시청률을 올리면서 큰 반향을 일으킨 이 드라 마의 줄거리는 쿤타킨테라는 한 흑인이 어느 날 '나는 누구인가?' 하는 것에 관심을 갖기 시 작해서 자기의 뿌리를 찾아 아프리카에서부터 6대에 걸친 자기 조상들을 찾아 나서는 이야 기였다. 그 작품은 보자 할 것 없는 한 사람의 흑인의 가계를 통하여 비참했던 미국 흑인들 의 역사를 미국의 양심 앞에 고발하는 감동적인 대 서사시였다."뿌리"를 통하여 미국인들은 아프리카의 대초원에서 자유롭게 살던 흑인들이 어떻게 노예로 잡혀 와서 어떠한 삶을 살게 되었는가 하는 그들의 비참했던 역사를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지금부터 쓰고자 하는 평범한 우리 집안의 이야기 속에서도 우리나라 의 역사의 한 부분을 알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1933년 5월 2일생 청주 한씨(淸州 韓氏) 현령공파(縣令公派)의 31대 손으로 태어났다. * 가계도 참조 (부록# 1 및 2) 내가 열 살이 넘었을 무렵 우리나라가 일제의 쇠사슬에서 아직 해방되기 전에 할머니로부 터 전해들은 이야기로는 증조부님께서는 한양(漢陽) 즉, 지금의 서울에서 관직에 계셨다고 한다. 어떤 벼슬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당시 지금의 서울 역 뒤편의 비탈진 만리동 일대가 과수원이었는데 그 대부분이 우리 집안의 땅이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서 상당한 재산이 있 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언제였는지 정확한 연도는 확실치 알 수 없지만 증조부가 우리나라의 가장 북쪽 끝 부분인 평안북도 압록강의 한 가운데에 있는 위화도로 귀양을 가셨다한다. 위화도(威化島)는 이성계가 지금의 제 1 야전군 사령관에 해당하는 서북방면 병마절도사로 서 임명을 받아 명나라를 치라는 왕명을 거역하고 도리어 조정을 뒤엎고자 군대를 이끌고 되돌아왔던 곳으로 한국 역사에서는 의미가 깊은 곳이다. 당시의 사법 제도는 예를 들어 만일 할아버지가 왕실을 배반하는 역적 혐의를 받았다고 하 면 아들과 손자까지 3대를 멸하는 형을 내리는 식으로 온 집안을 묶어서 처벌하는 제도였 다. 그런 탓으로 증조부의 귀양 파장은 그에게 만으로 그치지 않고 동생은 남쪽의 정반대 방향으로 맨 끝인 전라남도 진도(珍島)로 각기 귀양을 갔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정치적인 이유가 아니고서는 그 시대에 수도 한양에서 큰 재산을 가 지고 세도를 부리며 살던 형제가 갈라져서 그것도 삼천리가 떨어진 정반대 모서리 척박한 땅으로 이주를 할 리가 없는 일이고 보면 증조부는 어떤 중요한 정치적인 일에 연관된 것으 로 추측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여간에 자손이 된 입장으로서 조상이 무슨 일로 귀양을 갔는지는 알아야만 하는 일인데 그것을 알 수 없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안타깝게도 증조모님이 집안이 망했으니 족보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시면서 족보를 아 궁이에 집어넣어 불태워 버린 까닭에 족보를 복원하는 일이 불가능해져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도 추적을 해 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런데 이 책을 위한 자료 수집을 위하여 나와 8촌간의 삼종형제인 석심 누님을 방문하여 집안 이야기를 하는 도중 자기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한권삼)가 고조부(한익문)의 묘를 서울 에서 진도로 이장한 것으로 기억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나에게 엄청나 게 놀라운 정보여서 즉시,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금갑리에 살고 있는 8촌 형인 석영을 찾 아갔다. 그곳에는 듣던 대로 고조부이신 한익문의 묘가 있었으나 서울에서가 아니라 충청남 도 당진에서 이장해 왔던 것이었으며 묘비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通政大夫宣?將軍行訓練院 (통정대부선략장군행훈련원) 判官 韓益文 墓 (판관 한익문 묘) 配淑夫人 密陽朴氏 墓 (배숙부인 밀양박씨 묘) 光緖十六年 (광서16년) 서기1890년 나는 석영 형에게 족보를 복원할 단서가 없는가를 물었더니 진도로 귀양 오신 증조부(한경 식)나 종증조부(한정식)에 관한 근거자료는 전연 없고 단지 현 조부(한창환)와 고조부(한익 문)께서 왕으로부터 벼슬을 받은 교지를 지금까지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나는 증조부까지만 알고 있었지 고조부는 물론 현 조부는 알지를 못했다. 더욱이 고조부와 현 조부님의 벼슬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나에게 너무나 큰 기쁨이었고 이것을 자료로 앞으로 족보를 복원할 단 서를 삼을 희망을 갖게 되었다. 나는 이 귀중한 교지 2매를 복사하여 가지고 왔다 敎旨 (교지) 敎旨 (교지) 韓昌煥 爲 (한창환 위) 韓益文爲宣 (한익문위선략) 折衝將軍 (절충장군) 將軍行玧島鎭 (장군행윤도진) 者 (자) 管於蘭浦水軍 (관어란포수군) 傳敎 (전교) 萬戶者 (만호자) 咸豊十一年正月 (함풍11년1월) 光緖五年正月 (광서5년1월) 이 두 장의 교지를 보았을 때 현조부와 고조부님께서는 문관이 아닌 무관 출신으로 벼슬을 하신 것으로 보아서 우리 집안은 원래 무관출신의 가문이었던 것을 알 수가 있었다. 하여간에 증조부 형제의 귀양 때문에 나는 원적지가 현재도 평안북도 의주군 위하면 하단 동 24번지(平安北道 義州郡 威化面 下端洞)로 되어 있는 평안도 출신이 되었고, 증조부의 동 생의 자손인 8촌간인 삼종형제는 전라남도 출신이 되었다. 우리 집안 하나만 보더라도 이러 한 사연을 가진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나라가 좁은 땅에서 지역감정으로 갈라지 고 골이 깊어져 해결책을 찾기 어려운 것을 보면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증조부의 귀양살이로 우리 집안은 평안도 변방에 자리를 잡고 살게 되자 당시 갓 결혼한 나이 어린 새 신랑신부였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부딪혔을 어려움은 상상하기가 어렵지 않 은 일이다. 결국 할아버지(韓普敬)는 압록강의 수풍 땜이 생기기 이전에 백두산의 나무를 서해 바다로 나르는 뗏목 일을 하시다 작은아버지(韓生錄)와 압록강에서 함께 돌아가셨다고 한다. 유감스 럽게도 나는 한양의 기품 있는 양반집안의 자제로 자라나서 험한 압록강의 뗏목 군으로 삶 을 마쳐야 했던 말 그대로 압록강의 험한 물살 같은 격랑의 삶을 사시다 돌아가신 할아버지 와 작은아버지를 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그 분들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돌아가셨고 사진조차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기야 나라가 망해서 2000만 민족이 혹독한 일본제국 주의의 사슬 밑에서 살던 그 시절에 압록강 변에서 풀뿌리 같은 민초의 삶을 사시던 분들의 사진이 남아 있기를 바라는 것은 오 로지 조상들에 대한 나의 그리움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어느 누구도 마찬가지로 할머니에 대한 추억은 아름다운 것이겠지만 나는 삼 형제 중에서 도 유달리 할머니의 사랑 속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내 머리 속에 남아있는 할머니의 인상은 한마디로 하늘에서 내려오신 천사와 같은 분이셨다.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은 할아버지에 비교해서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내가 손자 손녀를 열 명이나 둔 할아버지가 된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생생하게 남아 있다. 할머니는 천성이 어질고 고요하신 성품이어서 말이 별로 없이 언제나 조용하신 가운데 겸손하면서도 늘 입가 에 미소를 머금은 인상이었다. 키는 여자로서 중간 정도에 몸매는 가냘프다 싶을 정도였고 달걀형의 얼굴에 백발이셨다. 할머니는 6.25 사변이 일어나기 반년 전인 1949년 11월 13일 84의 연세로 별세하셨다. 반 세기가 넘은 지금까지도 할머님이 돌아가신 날자가 잊혀지지 않고 기억될 정도로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뇌리에 깊이 새겨져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그런 대로 서울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아버지(韓生金)는 평안도 에서 출생하여 이북사람인 어머니(金尙玉)와 결혼했으니 나의 부모님 대(代)부터는 본격적으 로 이북 사람인 된 셈이다. 아버지는 한마디로 키가 큰 미남이셨고 할머니의 성품을 닮아서 어진 성품을 가져서 주변 에서는 이구동성으로 법이 없어도 사실 수 있는 분이라고들 하셨다. 아버지는 너무 부드러 우셔서 때로는 중심이 없는 것 같아, 정반대로 성격이 강했던 어머니에게 늘 끌려 다니시는 편이셨다. 8.15 해방 후 금광에 손을 대서 크게 실패하고 좌절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한데 그 당시 아버지에게 도움이 될 수 없었던 어린 나는 아버 지가 좀 더 강한 의지를 가지시길 마음속으로 바랄 뿐이었다. 어머니의 겉모습은 한마디로 평안도 사람답게 야무지게 생긴 이북 여성의 전형적인 모습이 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머니는 천성적으로 사물에 대한 통찰력이 뛰어나고 사리판 단이 정확하고 경우가 밝은 냉철한 이지적인 분이었다. 한번 마음을 먹으면 끝장을 보아야 직성이 풀리고 냉정하리만큼 결단성 있게 모든 일을 처리할 줄 아는 부지런한 분이셨다. 내가 희미하게나마 기억해 낼 수 있는 첫 번째 기억은 아마도 4살 때부터인 것 같다. 내가 어렸을 적에 살던 곳의 정확한 지명은 평안북도 의주군 위화면 하단동이다. 이곳은 압록강 복판에 형성된 섬인 위화도(威化島) 안에 통상적으로 "북하동" 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우리 집은 싸리나무로 엮은 울타리가 둘러쳐진 초가집이었는데 집에서 40-50m만 나가면 뗏목들이 즐비하게 떠 있는 강변이어서 복어의 내장인 알이 여기저기 내버려져 있었다. 특별히 복어 알을 기억하고 있는 까닭은 내가 혼자서 강가로 나가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할머니와 어머니는 "너 복어 알 밟기만 해도 죽는 것 알지?" 하고 겁을 주시곤 하셨기 때문 이다. 나는 몰래 혼자서 강가로 놀러 나갔을 때도 복어 알을 밟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복어 알을 피해서 다녔다. 어른들은 할아버지와 숙부가 압록강에서 돌아가셨고 위로 여덟이나 잃고 건진 생명이기 때 문에 자나깨나 내게 무슨 일이 있을까 염려가 되어서 할 수 있는 한 내가 물가로 나가지 못 하도록 했던 것 같다. 그런 까닭에 나는 바다도 아닌 강 한가운데 있는 섬에서 살면서도 한 번도 헤엄을 처 보지 못했고 평생을 헤엄을 치지 못했다. 6. 25전투기간 중에 항상 헤엄을 쳐야할 상황이 오면 어떻게 할까하는 걱정을 떨쳐 버리지 못했는데 다행하게도 그런 상황을 맞지 않았던 것은 정말로 천만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신의주의 왕자제지공장으로 통나무를 실어 나르는 뗏목의 현장감독으로 일하시던 아버지가 신의주 왕자제지공장의 기술 분야로 자리를 옮기시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신의주에 있는 회사의 관사로 이사하게 되었다. 내가 받은 첫 교육은 위화도에서 다섯 살인가 여섯 살 때 서당에 가서 천자문을 배우는 것 이었다. 그러나 신의주로 이사를 온 후에는 신의주 제 2교회 유치원에 다녔는데 유치원보다 는 오히려 유년주일학교에서 눈깔사탕을 주었기 때문에 주일을 무척 기다리곤 하였다. 주일 학교에서 제일 먼저 배운 첫 번째 찬송가가 아마도 "예수 사랑하심은"이라는 찬송가였던 것 같다. 소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아버지는 나에게 나무와 철선을 이용하여 썰매를 만들어 주시면 서 친구들과 함께 압록강에서 썰매를 타도 괜찮다고 하셨다. 결국 얼음이 꽁꽁 얼어서 빠져 죽을 염려를 전혀 하지 않아도 되는 겨울에만 그것도 친구들과 같이 가야만 강으로 갈 수 있었던 셈이었다. 얼음 위에서 노는 재미를 한번 붙이게 되니까 도저히 썰매로는 만족할 수 없어서 그 때부 터 아버지에게 스케이트를 사달라고 졸랐지만 그 당시 스케이트가 너무나 귀한 것이었기 때 문에 아버지는 나막신 밑에 대장간에서 만든 쇠 날을 달고 끈으로 매는 스케이트를 만들어 주셨다. 또 한 가지 신의주 생활의 잊을 수 없는 추억은 겨울철에 손님이 오시면 냉면을 주문하여 손님을 아랫목에 앉게 하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먹던 일이다. 아마도 한 겨울에 온돌로 되어 있는 방바닥은 따듯해도 방안의 위풍이 너무 세서 차가운 냉면을 먹자니 이불을 뒤집어써야 했던 것 같은데 그 후 내 생애 어디서도 그처럼 맛을 내는 냉면을 먹어 본 적이 없다. 2. 신의주, 만주의 신경, 서울 소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왕자제지회사를 그만두어 만주(滿州)의 신경(新京)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신경에 살고 계신 작은 고모부의 왕래가 잦더니 결국 신경으로 이사를 가서 작은고 모와 같은 울타리 내의 집에서 살게 되었다. 우리가 살던 집은 요즘 중국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여러 체의 집이 붙어있는 직사각 형으로 중국식 벽돌 기와집인데 가운데는 학교운동장의 1/4정도 크기의 공동마당이 있고 그 마당에는 땅 속으로 파들어 간 큰 움이 4개나 있었다. 이 움은 지금으로 말하면 천연의 냉 장고인 셈이었는데 냉장고와 다른 점은 속으로 들어가면 겨울에는 훈훈해서 식료품을 저장 해도 얼지 않고 여름에는 시원해서 식료품이 쉽게 상하지 않는 것이다. 이 움에 과일 채소 등 여러 가지 식품들을 풍족하게 저장해 놓고 살았으니 조선에서 궁핍하게 살던 것과는 차 이가 많이 났다. 나는 신경의 영락국민학교(永樂國民學校)에 들어갔는데 학생의 약 절반 이상이 일본 아이들 이고 나머지가 한국 아이들과 5, 6명의 중국 아이가 섞여 있었다. 일본어로 수업을 했는데 중국 아이들은 몇 명 안 되는데도 중국어 과목은 있었지만, 거의 절반이나 되는 한국 아이 들이 쓰는 한국어 과목은 없었다. 오히려 한국말을 쓰지도 못하게 해서 심지어는 운동 경기 를 하다가 한국말로 소리를 질렀다고 벌을 받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는 이름도 한 국 이름을 쓰지 못하고 기요하라 도기어(淸原時夫)라는 일본 이름을 써야 했다. 이 학교에서는 겨울마다 운동장 변두리의 육상 트랙을 괭이와 삽으로 파서 물을 담아 스케 이트를 탈 수 있도록 얼리는 제빙작업을 했다. 지금 같으면 중장비를 동원해야 하는 큰 공 사였는데도 그것을 해 마다 완전히 어린 학생들의 손으로 했지만 덕분에 매일 학교에 올 때 스케이트를 가지고 와서 조회 시간도 선생님과 전교생이 스케이트를 신고 조회를 할 정도로 스케이트를 많이 타게 되었다. 내 소원은 선수들이나 신을 수 있는 독일제 홀르겐이라는 고급 스케이트를 갖는 것이었는 데 아버지는 어디서 구해 오셨는지 생일 선물로 사오셨다. 신경은 벌판이기 때문에 여름에는 무척 덥고 겨울에는 신의주보다 더 춥고 눈도 많이 왔 다. 영하 40도c 까지 내려가서 콧물도 얼고 오줌도 얼어붙을 지경이어서 두터운 외투를 입 고 털모자를 푹 눌러써야만 외출할 수 있었다. 그래도 나는 스케이트를 탈 수 있었기 때문 에 겨울을 더 좋아했다. 아버지는 만주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토목측량을 하셨기 때문에 한번 나가시면 2주 이상 씩 계시다가 돌아오시곤 하셨는데 당시 우리 집이 풍족하게 살았던 것으로 보아 수입이 좋았던 모양이었다. 아버지가 집에 계실 때는 나와 고모의 딸인 이종사촌 누이인 현숙이와 함께 서 커스 공연이나 어린이 놀이공원 실내 스케이트장에 자주 데리고 가곤 하셨다. 아버지는 종종 중국 사람들과 땅 거래를 하셨는데 그때마다 중국 사람들과 만찬을 하는 곳 에 나를 꼭 데려 가시곤 하셨다. 그 때 어른들이 무슨 이야기들을 하셨는지 전혀 기억이 나 지 않지만 그 때 먹었던 요리의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소학교 3학년 때부터는 매년 한 번식 여름방학에 혼자서 기차를 타고 경성(서울)의 작은 집으로 여행을 다녔다. 나의 경성 여행은 당시로서는 다른 아이들이 상상 할 수도 없는 일 이었다. 만주의 신경에서 경성까지는 침대를 겸한 칸이 막힌 특실이 있는 히까리(光)라는 특 급열차로 18시간이 걸리는 여행이었는데 아버지가 신경 역에서 태워주시고 경성에 전보를 치면 경성 역에 5촌이 되시는 숙부나 숙모가 마중 나와 계셨다. 이때 나는 감색 세루 학생복에 목이 약간 긴 말가죽 구두를 신고 다녔는데 내 여행가방에 는 반드시 작은 집에 드릴 선물로 설탕과 아이들에게 나눠주기 위한 소프트 테니스 공과 비 슷한 고무공이 들어 있었다. 나한테서 경성에서는 도저히 구할 수 없는 귀한 고무공을 하나 씩 얻어 가진 경성의 아이들은 매년 나를 몹시 기다리곤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어느 한 해는 그만 내가 장티푸스에 걸려 애석하게도 그처럼 좋아했던 경성 여행을 못하게 되었다. 어느 날 밖에서 뛰어 놀다가 집에 들어와 수도꼭지에 입을 대 고 물을 마신 이후 그만 갑자기 배가 아프고 고열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에 장티푸스 환자가 생기면 당국에 즉시 신고를 해야 하고 신고를 하면 환자를 격리시키는 것은 물론 환 자의 집의 접근 도로까지 새끼줄로 쳐서 차단하고 환자가 사용하던 물품은 불에 태워버리거 나 온 가족이 걸린 경우는 심지어 집까지 태워버리는 무서운 법정 전염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장티푸스에 걸린 것을 비밀로 하면서 의사에게 뇌물을 주어가며 몰래 왕진을 받으면서 회복시켰으니, 온 집안 식구가 얼마나 고생을 했겠는가 하는 것은 짐작이 갈 만한 일이다. 나는 머리칼이 다 빠져 3개월 동안 학교도 못 다닐 정도로 죽다가 살아나 는 고비를 넘겨야 했다. 친정이 서울 인근의 능곡이었던 할머니가 항상 서울을 그리워해서 아버지는 언젠가는 할머 니를 서울에서 사실 수 있도록 서울의 아현동에 집을 사시고 경기도 능곡에는 할머니산소로 사용할 선산과 임야도 사 놓으셨다. 자나깨나 죽기 전에 서울에서 살다가 죽으면 고향에 묻히고 싶다고 하시던 할머니의 간절 한 소원대로 해방되기 바로 전 해인 1944년 여름에 할머니와 나는 경성(서울)으로 먼저 이 사를 했다. 아현동에 있는 우리 집은 안채에 방이 2개와 부엌, 별채에 방 1개와 부엌, 문간 방 그리고 마당과 장독대가 있는 보통 이상의 아담한 한옥이었다. 나는 아현국민학교에 전학하였는데 당시는 2차 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때이어서 심지어는 대포를 만들 쇠가 부족하다고 각 가정에서 놋으로 만든 숟가락 젓가락까지 모두 공출을 해 가서 모든 가정이 나무 숟가락으로 밥을 먹는 때였다. 일본 제국주의가 모든 힘을 전쟁에 쏟아 붙는 때여서 학교에서 공부를 한 기억이 별로 없다. 학교에 가면 매일같이 터 밭 가꾸 기에 동원되어 똥통을 메고 나르는 일과 땅 파는 일에 동원되었다. 1945년 봄 만주에 있던 부모님은 할머니께서 어린 나를 데리고 계신 것이 걱정되어 가산을 모두 정리하여 완전히 경성으로 이주를 하셨다. 이것이 바로 해방되기 직전의 일이었으니 결과적으로는 서울을 항상 그리워하시던 할머니의 소원과 아버님의 효성이 아니었으면 아마 도 우리가족의 운명은 180도 달라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해방이 되자마자 38선으로 갈라져 자유롭게 오고가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만일에 부모님의 귀국이 조금만 늦어졌다면 만 주에 있는 우리 가정도 다른 많은 가정들처럼 이산가족이 되어 상상하기도 어려운 불행한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내가 12살이 되던 해 1945년 8월 15일 정오에 중대 방송이 있다고 하기에 우리 식구들은 라디오 앞으로 몰려 앉았다. 드디어 12시 정각이 되자, 잠시 후 일본 국가가 연주된 후 일 본 천황이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한다는 항복 문을 읽는 소리였다. 나는 정말로 깜짝 놀랐 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6년 동안 소학교에서 모든 것을 일본식으로만 교육을 받고 자라난 나로서는 일본이 망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밖에서 사람들이 "서울 역! 서울 역!"하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 뛰쳐나갔다. 아무 것도 몰랐지만 무엇인가에 신들린 사람처럼 들떠서 우리 집에서 10 리 길이나 되는 서울역을 한 걸음에 달려나갔더니 이미 서울역 광장에는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모여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그 때까지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이상한 깃발을 들고 나와 미친 듯이 흔들고 있 었다. 그 때 나는 처음으로 태극기를 본 것이었는데 사람들이 저 마다 급히 태극기를 그려 가지고 나와서 태극기의 모습이 가지각색이었다. 나는 앞으로는 더 이상 일본인들한테 무시당하지 않고 일본말만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가장 기뻤다. 3. 애 아범의 꿈 1946년 봄 중학교에 입학시험을 쳤다. 카톨릭 교인이셨던 담임선생님이 강력하게 추천하는 바람에 가톨릭 학교인 동성중학교를 지원해서 4대1의 경쟁률을 뚫고 다행히도 합격이 되었 다. 한 반에 45명씩 두 반 90명중의 80%가 카톨릭 신자여서 개신교에 다니는 나로서는 처 음에는 여러 가지로 어색하게 느껴졌었다. 4. 19 이후 제 3공화국의 국무총리를 지냈던 장면 선생님이 교장이었는데 그분은 1주일에 한 번씩 우리들에게 직접 영어를 가르쳤다. 당시 우리들은 미국 콜롬비아 대학을 나오신 장 선생님의 발음을 신기해하면서 "저 것이 본토 발음이구나! 하면서 장 선생님에게 영어를 배 우는 것에 자부심을 가졌었다. 누구나 사춘기에 한번쯤은 세계일주를 꿈꾸어 보는 법이지만 나는 3학년 때부터 꼭 세계일 주를 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그러기 위해서는 외교관이 되어야겠다고 결심을 했다. 그래서 좋아하지도 않는 영어를 열심히 했고 대부분의 남학생들은 제2외국어로 독어를 선택했지만 나는 외교관이 되는 데는 불어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불어를 선택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나를 하나님께 바친 자식으로 생각하고 목사로 만들 것을 항상 굳게 다짐 하고 계셨던 것 때문에 외교관이 되고자 하는 나의 목표에 장애가 될 것이라고 걱정했었다. 어머니는 기회만 있으면 나에게 "너는 반드시 목사가 되어야한다" 고 주입을 시키는 것은 말 할 것도 없고 온 집안 식구들과 친지들 특히 교인들에게 "인수는 앞으로 목사가 될 사람" 이 라고 광고를 하고 다녀서 나에게는 보통 부담이 되는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이 아니라, 다행 중 불행으로 6.25가 터져서 내가 군인이 되는 바람에 어머니의 꿈도 나의 꿈도 모두 풍비박산 나고 말았지만 어머니는 나대신 동생인 학수를 목 사로 만들었다. 나는 중학교 내내 반장을 했는데 내가 반장을 한 것은 공부를 잘해서가 아니라 아마도 키 가 컸기 때문이었던 같다. 사실 내 성적은 중상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조숙한 탓에 동급 생들에 비해 몸집이 커서 중학교 4학년 때 이미 지금의 키인 170cm가 되어 친구들로부터 애아범이라고 불렸다. 먹을 것이 풍부해서 영양상태가 좋은 지금의 청소년들에게 170cm는 큰 키가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대단히 큰 키였다. 당시에는 요즘처럼 학생회라는 조직이 없었고 그 대신 전체 학생을 군대식으로 편성한 학 도호국단이라는 조직이 있었다. 학도호국단의 간부는 학생들이 자치적으로 선출하는 것이 아니고 선생님들의 추천을 받아 학교마다 배치되어 있던 배속장교가 선임하였는데 나는 줄 곧 반장을 했지만 학도호국단의 간부인 중대장, 소대장은 고사하고 분대장으로도 임명받아 본 적이 없었다. 아마 당시의 내게는 군인의 소질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학도호국단 대대장을 하 던 1년 선배인 신 우식은 결국 종합 2기생으로 임관되어 나 보다 1년 전에 장군으로 진급을 하여 그 후 5년까지 우리학교에서 장군으로 진급한 사람은 신 우식 선배와 나 2명뿐이었다. 내가 중학교 3 학년일 때 내 인생의 첫 번째 시련이 닥쳐왔다. 아버지가 외가 쪽의 사돈 벌 되는 사람의 소개로 충청북도 음성에 있는 무극(無極) 금광에 손을 대셨다가 온 재산을 날려버리게 된 것이다. 우리는 부득이 아현동의 집까지 팔고 남산 밑 도동에 목재로 된 조 그만 일본식 가옥으로 이사를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끼니는 매일 수제비로 이어나가는 형 편이 되어 버리고 아버지는 몸져누워 좌절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시게 되어 집안을 꾸려 나가기 위해서는 부득이 어머니가 나설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어머니는 서울서 물감(염색염료)을 사서 전라도와 제주도에 도매로 팔고 전라남도 목포와 학다리에서 쌀을 사 서 철도로 서울로 가져오는 장사를 하기 시작하셨다. 나도 학교를 중단하고 집에서 담배를 말아 목판에 얹어서 목에 걸고 다니며 파는 가짜담배 장사를 하게 되었다. 혹시 아는 친구를 만날까 보아서 낮에는 집안에서 담배를 말고 어두워 진 저녁이후에만 남대문시장 길가에 나가서 팔았다. 담임선생님이 이런 내 사정을 알고 몇 개월 후 동급생인 주 상구의 초등학생인 조카의 가 정교사로 들어가 공부를 계속하도록 알선해 주셨다. 주 상구는 일찍이 부모님이 돌아가셔 신설동에서 제분업을 하시는 큰 형님 댁에서 얹혀사 는 형편이었는데, 형수님과의 사이가 나빠 집안에서는 골칫거리로 여겨지다 보니 상구는 기 회만 있으면 집을 나갈 궁리를 하고 있었다. 내가 상구 형님 집에서 생활한지 약 1년이 지날 무렵인 어느 날, 상구는 나에게 같이 일본 으로 밀항을 하자는 제안을 했다. 자기가 형의 돈을 훔쳐서 일본에서 1개월 동안 지낼 정착 금을 마련할 터이니 부산으로 가서 밀항선을 타자는 것이다. 나는 처음에는 안 된다고 펄쩍 뛰었지만 상구는 끈질기게 나를 붙들고 늘어졌다. 나중에는 내가 안 간다면 자기 혼자서라 도 가겠다고 해서 나도 마음이 점점 흔들리기 시작했다. 냉정히 생각해보면 나 역시 당시 집안 형편으로 보아서 대학교는 다니기가 어려울 전망이고 그렇다고 해서 한국에서는 중학 교만 졸업을 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우리 둘은 떠나기로 결심을 하고 1949년 상구 형님의 돈을 훔쳐 떨리는 마음으로 12 월 26일 경부선 열차를 탔다. 부산에 가서 1 주일을 기다리다가 밀항을 알선하는 브로커에 게 돈을 주고 드디어 밀항선을 탔다. 밤새도록 통통거리는 똑딱선을 타고 항해를 해서 이른 새벽 무렵에 일본에 도착한 것으로 알고 두려운 마음으로 조심조심 사방을 경계하면서 땅으 로 올라왔더니 이상하게 전형적인 한국 어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내린 곳은 일본 땅이 아니고 전라남도 여수 근처의 어떤 섬이었다. 이 당시 우리만이 아닌 많은 사람 들이 이렇게 사기를 당했다. 결국 우리는 경부선으로 내려갔다가 호남선으로 올라온 꼴이 되고 말았다. 우리 가족이 아현동에 살 때는 공덕동에 있는 도원교회에 다니다가 남산 밑의 도동으로 이 사한 후에는 남대문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그 당시 남대문교회는 서울서 유명인사가 제일 많이 모이는 교회로 이승만 박사, 김구 선 생, 남 궁혁 박사, 엄 항섭 선생 이 용설 박사 등 저명인사들이 출석했던 장안에 이름난 1200명 정도 모이는 큰 교회였다. 김치선 목사가 담임목사였고 배 명준 목사가 부 목사였으 며, 이 용설, 한 상기, 고 재만, 김 병찬 유 지수 장로와 김 선경, 김 신애 권사님 등이 교 회의 중추적인 인물들이었다. 나는 특별히 배 명준 목사님과 한 상기 장노님 그리고 김 신 애 권사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남대문교회의 본당 건물은 대형 한옥건물이었고 옆에 조그마한 유치원 건물이 붙어 있었을 따름이라 우리 중등 부는 세브란스 의과대학 교실에서 예배모임을 가졌으며 남학생들은 운 동장에 설치된 농구장에서 농구를 무척이나 많이 했다. 그 당시는 중 고등학교의 구분이 없는 중학교 6년제로서 학생들의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나이가 많은 학생은 나보다 네 살이 더 많았고 남학생은 배재중학과 서울중학 재학생이 여 학생은 경기여중생이 제일 많았다. 신학교 재학 중이던 맹 의순 선생이라는 분이 중등부의 담임교사였는데 우리들은 이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 분은 6.25 사변 중 남하하다 인민군으로 오인 받아 거제도 포로수 용소에 수용이 되었다. 교회에서 그 소식을 알고서 석방운동을 벌여 석방이 되려는 시점에 "저는 이곳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이 수용소 안에 이미 교회가 세워졌고 제가 석방되어 신 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도 이렇게 전도하기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 라면서 한사코 석방되기를 거절하였다. 결국 그는 포로수용소 내에서 전도사업을 하다 과로로 쓰러져 1952 년 8월 수용소 안의 병원에서 27세의 젊은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난 분이시다. 주일과 수요일 저녁 예배 전 서울역 앞에서 북을 치고 트럼펫을 불고 찬송가를 부르며 지 나가는 행인들에게 전도지를 나누어주면서 노방전도를 하던 일들이 어제 일처럼 눈에 삼삼 하다. 그 때는 아무 것도 모르고 맹신적이긴 했어도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 시기였 던 것 같다. 누구나 소년 시기에 한번쯤은 문학에 대한 동경에 빠지는 것처럼 나 역시 햄릿, 오델로, 베 니스의 상인, 돈키호테, 상록수 등 수 많은 문학 서적들을 한 때 닥치는 대로 읽었다. 중등 부에서 나는 나이가 어린 편이었지만 문예부장을 맡아서 한 달에 한번씩 간행물을 내는데 온 정성을 기울였다. 가장 아름답게 기억나는 일은 매년 X-MAS가 돌아왔을 때 교회에서 밤 을 새며 성탄절 행사를 치루고 교인들 집을 찾아다니며 새벽 송을 부르는 것이었다. 나의 경우 사실상 학교에서 교과적인 것을 배웠다면 비교과적인 모든 지적활동은 교회 중 등부에서 배우고 익힌 것이라고 볼 때 남대문교회의 중등부는 나의 인생행로에 중대한 영향 을 끼쳤다고 생각된다. 6.25전쟁 전의 남대문교회 중등부 생활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나의 소년시절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지금까지도 계속 교제가 이루어지고 있거나 비록 교제가 단절되었어도 기억나는 소년 시절 의 중등 부 옛 친우들은 다음과 같으며, 이미 고인이 된 친구도 3 명이나 된다. 鄭昌源, 孫豪寅, 宋基善, 李寅植, 洪大極, 金在俊, 全承在, 柳美使, 金炯玉, 宋俊, 韓龍澤, 權 明順 孫雄寅, 李眞煥, 李喜元, 吳潤錫, 魏仁燦, 韓寬夏, 兪容鎭, 孫道成, 金宅根, (무순) 4. 6.25동란 우리 민족의 최대 비극인 6.25동란이라 불리는 북한 공산집단의 남침이야말로 동족상잔이 라는 측면에서 역사상 미증유의 사건이다. 이 전쟁으로 인해서 국토는 초토화되고 우리 쪽 만해도 60만 명이 죽었고 100만 명이 훨씬 넘는 부상자를 냈으며 50여 만 명의 전쟁미망인 과 10여 만 명의 전쟁고아가 가정 파탄의 비극 속에서 몸부림쳐야 했다. 사람에 따라서 그 개인의 삶이 역사의 흐름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도 있겠으나 나는 전 적으로 역사의 흐름이 나의 인생의 방향을 결정한 경우였다. 6.25동란은 아직 뿌리도 내리 지 못한 나의 인생을 마치 거센 파도와 같이 덮쳐서 순식간에 성난 바다 속으로 몰아 넣어 버리고 말았다. 중학교 4학년이었던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아침 개성과 의정부 방면에서 인민군이 38선 을 넘어 침공해 왔으나 국군이 인민군을 격퇴하고 있으며, 국군의 일부는 오히려 북으로 진 격하고 있다고 방송이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방송을 들을 때 여느 때처럼 "38선에서 또 소소한 무력 충돌이 있었나 보다"하는 정도로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점 심시간 무렵부터 서울 시내는 군용 지프차에서 "휴가 나온 장병들은 즉시 부대로 복귀하라" 는 가두방송을 하는 소리로 요란스러웠고, 전방으로 향하는 군인들과 군수물자를 실은 수송 트럭이 줄을 잇는 등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런데 이것이 웬 일인가? 이튿날 낮에는 북조선 인민 공화국의 마크가 뚜렷하게 보이는 비행기 한 대가 서울 상공을 선회하는 것이 아닌가? 더욱 이상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항하는 우리 측 비행기를 찾아 볼 수도 없었고 당연히 적의 비행기를 떨어뜨리기 위하여 있어야할 고사포 사격도 없었다. 밤이 되어 서울의 북쪽에서부터 대포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시민들은 점점 불안을 느끼게 되었다. 대포 소리는 미아리의 북쪽에서 들려왔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커져서 인민 군이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 날 즉, 3일째 오전에는 인민군이 이미 서울에 입성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고 오 후에 남대문에 나가 보니 정말로 인민공화국 깃발을 달고 있는 전차를 앞세우고 인민군이 입성하고 있었다. 내 눈으로 인민군을 직접 확인하고서야 내가 지금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조선 인민공화국 천하에 남아 있음을 실감케 되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궁리 해 보았지만 조금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서 별 뾰족한 대책이 없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서 이미 라디오 방송도 끊어졌기 때문에 일단 상황 이 어떻게 진행되어 가는지 라도 알아야겠기에 이튿날 아침 느지막이 10시경에 조심스럽게 학교로 향했다. 멀리서 학교 안의 동태를 지켜보았더니 평소에 불량하게 굴던 학생들이 붉 은 완장을 차고 몽둥이를 든 체 학교를 지키고 있었다. 한편 인민군은 서울을 점령하고 4일째 되던 날부터 시내의 길가에서 책상을 펴놓고 젊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영광스런 조국 해방 전선에 나서라"며 인민군 자원입대를 강요하기 시작 하였다. 나도 당연히 입대 연령에 해당되기 때문에 가족들과 의논한 끝에 일단은 피신을 하 기로 했다. 내가 찾을 수 있는 가장 안전한 피신처는 할머니의 친정인 경기도 능곡의 친척 집이었다. 그 집에서 약 한달 동안을 숨어 있는데 이번에는 인민군이 가가호호 다니면서 입 대할 대상자를 색출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오히려 사람이 별로 없는 시골이 더 위험하게 느껴져 하는 수 없이 다시 서울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서울의 우리 집은 도저히 숨을 곳이 없어서 당장이라도 잡혀 갈 것만 같아서 이틀 밤을 자고 또 다시 어디로 든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사자인 나보다도 부모님들이 더 불안해하면서 아무 데나 숨을 곳을 찾아 빨리 떠나라고 발을 동동 구르셨다.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르면서 일단 어디든 떠나야 하는 나도 괴로웠지 만 한 번 헤어지면 언제 만날지 모르는 난리판에 어린 자식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선 어딘가 로 보내야만 했던 부모님의 가슴은 어떠했으랴?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지만 궁리 끝에 남대문교회 중등부 친구인 김재준 군이 생각이 났 다. 우선 재준의 집은 크기 때문에 숨을 곳도 있을 것 같았고 생활도 넉넉한 편이라서 끼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이 생각되었다. 김 군은 배제중학교에 다녔는데 노량진 언덕에 당시로는 찾아보기 힘든 2층으로 지어진 벽 돌집에서 살았다. 김 군의 집안도 이북이었지만 김 군의 어머님은 억센 이북 여자의 이미지 와는 거리가 먼 아주 인자하신 분이셨다. 혹시 거절을 하시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에 마 음을 졸이면서 찾아갔는데 천만 다행히도 김 군의 어머님은 나를 반갑게 맞아 주셔서 그날 부터 우리 둘은 2층 천장 다락방에서 숨어 지내게 되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김 군의 외삼촌인가 하는 사람이 이북에서 파견된 서울시 인민위원회 고 위간부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 사람이 가끔 김 군의 집을 방문하기 때문에 오히려 의심을 받을 가능성이 적어서 다른 어떤 곳보다도 안전한 피난처가 된 셈이었다. 나는 김 군의 어 머님 덕분에 모든 사람이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고 있던 어려운 때에 끼니를 거르지 않고 안전한 피신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김 군과 나는 나치 독일의 손아귀를 피해서 다락방에 숨어 지냈던 안네 프랑크처럼 천장에 서 책도 읽고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2개월쯤 지나서 몰래 듣던 라디오 방송을 통 하여 전세가 점점 역전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가끔 들리는 김 군의 외삼촌 의 행동으로도 그것이 단순한 남한 쪽의 선전 방송이 아니라 신빙성 있는 사실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드디어 연합군이 인천 상륙작전에 성공해서 9월 28일에 서울이 다시 국군의 손에 떨어져 다시 2개월여 만에 가족과 기쁨의 재회를 하였지만 부모님과 동생들이 모두 먹지를 못해서 너무나 야윈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 동안 안전하게 피신해 있었던 나보다도 가족들은 훨씬 더 고생들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온 가족이 무사하다는 것 하나만 으로도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 아들 하나도 돌보기 어려운 전쟁 중에 나까지 거두어 주신 김 군의 어머님의 각별한 돌보심에 대한 고마움은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1953년 3월 경 중위시절 서울에 나온 나는 얼마 동안 모아 가지고 있던 돈으로 쌀 1가마를 사서 지게꾼에게 지워 김 군의 어머님을 찾아뵙고 모처럼 고맙다는 인사를 드렸다. 그러나 어찌 그것으로 내가 입은 큰 신 세의 보답이 될 수 있었겠는가? 그 후로도 자주 찾아뵈어야 하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으나 김 군이 1954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나는 고달픈 초급장교생활을 하는 처지라서 그 후 에는 김 군의 어머님을 자주 찾아뵙지 못하였다. 그 후 나는 김 군이 뉴욕 주립대학의 수학교수가 되었고 컴퓨터로 크게 성공하여 부자가 되었다는 소문만 들었다. 1997년 5월 우리부부가 미국방문 길에 뉴욕에서 김 군과 45년만 의 재회의 기쁨을 나누게 되었다. 나는 김 군을 만나자마자 제일 먼저 어머님의 소식부터 물어 보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김 군의 어머님께서 1년 전 별세하셨다는 것이 아닌가? 나 는 그 동안 생명의 은인이 돌아가신 것도 모르고 지냈던 나의 무심함이 참으로 부끄러웠다. 5. 격랑 9.28 서울 수복 이후 다시 학교에 나갔지만 학교는 선생님을 타도하는 학생들로 시끄러워 수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학생의 절반 정도가 나오지 않았는데 학교에서는 인민군 측의 의용군으로 간 학생과 국군 측의 학도병으로 간 학생으로 구분해서 결석 학생들의 상 황을 파악했다. 일본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 된지 5년도 안 되어서 이제는 어제까지 같이 공 부를 하던 친구들이 한 달만에 군대로 끌려가 서로 총을 겨누는 적이 되어야 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졌으니 이 무슨 기구한 민족의 운명이라는 말인가? 그러나 우리들의 마음은 어떻건 간에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국군에 학도병으로 자진 입대하 는 것으로 조성되어 갔다. 당연히 나도 이런 상황에서 계속 공부를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학도병으로 자원입대를 해야 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던 중 그 해 10월말 경 거리에서 포병장교후보생을 모집하는 포스터가 붙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곰곰이 생각하던 끝에 어차피 군에 입대할 것이면 차라리 장교로 가는 것이 좋겠 다는 생각이 들어 시험에 응시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응시자격이 6년제 중학교 졸업예정자 이상이어야 하고 나이도 19세 이상으로 신체검사 갑종 합격자로 되어 있었다. 어떻게 할 것 인가를 망설이다가 "애라 모르겠다. 안 되어도 할 수 없다"하는 생각에서 원서에 나이를 2살 이나 올려서 적고 학력도 6학년 졸업예정자로 올려 적어서 응시를 했다. 다행히 나는 체격 이 커서 나이를 2살이나 올려도 별로 의심을 받지 않고 넘어 갈 수가 있었고 혼란했던 때였 기 때문에 학력증명서와 호적등본을 제출하지 않아도 되어서 무난히 넘어갈 수가 있었다. 효자동에 있는 진명여자중학교에서 시험을 치렀는데 " 우리는 왜 공산주의와 싸워 이겨야 하는가? " 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쓰고 수학 시험을 쳤다. 논문은 어느 정도 자신 있게 써냈 지만 3각 함수를 푸는 수학은 자신이 없어서 합격될 것을 아예 기대 하지 않았다. 그래도 2주 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합격자 발표장에 가보았더니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이 있었 다. 이 무렵 즉 1950년 11월 예기치 못했던 중공군의 전격적인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국 군이 다시 후퇴를 하기 시작하자 부모님이나 나는 지난번에 안일하게 생각하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생각밖에 큰 고생을 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미리미리 피난을 서둘러야 되겠다고 생각 했다. 우리가족들은 12월 초순부터 서둘러서 짐을 꾸려서 12월 중순에 서울을 떠나 부산을 거처 제주도로 피난을 가기로 했다. 그러나 나는 이번에도 또다시 가족과 떨어져야만 하는 운명에 놓여졌다. 왜냐하면 포병간 부후보생 시험에 이미 합격이 되었기 때문에 소집일자인 12월 22일까지 서울에 남아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드디어 22일이 되어 오전 10시 부풀은 마음으로 소집장소인 진명여중 교정 으로 들어서는데 어쩐지 분위기가 이상했다. 군인은 한 사람도 안 보이고 나 같은 지원자들 몇 사람이 모여 서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모집관계관들은 이미 후퇴를 해버렸고 12월 30일 까지 대구의 병사구사령부로 집결하라는 공고가 붙어 있었다. 이미 식구들이 피난을 가 버리고 혼자 남았기 때문에 나는 뒤돌아 볼 것도 없이 1주일 내 에 대구까지 가야만 한다는 생각으로 영등포역을 향하여 뛰기 시작하였다. 2시간을 뛰어서 영등포역에 도착해보니 언제 떠날지도 모르는 군수물자를 수송하는 화물열차 지붕 위까지 이미 피난민으로 만원이었다. 그러나 별 방도가 없는 나로서는 그 화물열차에 올라타고 기 다리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열차가 밤 11시가 되어 발차하더니 새벽 5시에 수원 역에 도 착하여 또 다시 움직일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해서 일단 열차를 타는 것을 포기하고 수원 역에서 김밥을 사 먹고 피난민들의 행렬을 따라 걷기 시작 했다. 12월의 혹독한 추위 속에 눈보라를 무릅쓰고 피난을 가는 사람들로 길이 메워졌다. 북한에 서부터 내려 온 사람들과 서울 및 경기지역 피난민들의 행렬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크고 작 은 도로에 가득했다. 조그마한 보따리만을 들고 가는 사람, 살림살이를 실은 손수레를 끌고 가는 사람, 큰 짐 보따리를 등에 지고 쓰러질 듯 걸어가는 사람 등 움직일 수 있는 모든 방 법을 동원해서 지칠 대로 지친 사람들이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길을 가다가 움직이지 않 는 사람을 보면 얼어 죽거나 굶어 죽는 사람이었다. 대열 속에는 부모 잃은 어린아이들이 우왕좌왕하고 아이들을 찾는 어머니들이 미친 듯이 홍수 같은 피난민 대열을 헤치며 뛰어 다니는 모습도 보였다. 이미 죽은 어머니의 등에서 울고 있는 아기를 피난민이 데리고 가기 도 했고 삶의 희망을 완전히 잃어버린 노인이 길가에 주저앉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나는 걸어서 4일 만에 대전에 도착하였다. 주요 교차지점인 대전에는 헌병과 경찰 합동검문 소가 있어서 피난민들의 행렬을 전라북도 방향으로 향하도록 유도하고 소위 5열(원래 군대 의 대열은 4열이지만 전시에 후방을 교란하기 위하여 끼어든 간첩이 있을 것을 가정하여 5 열이라고 불렀다)을 색출하고 있었다. 나는 피난민들 중에 드문 젊은 나이였기 때문에 검문에 걸려서 간첩 혐의를 받고 심문을 받게 되었다. 헌병들은 무조건 간첩이 아니냐고 다그치면서 간첩이 아니면 당장 제2국민 병 으로 입대하라고 윽박질렀다. 나는 포병간부후보생 합격증을 보여주면서 만약에 잘못되면 당신들이 책임 질 것이냐고 항의를 해서 12시간 만에 겨우 풀려났다. 다시 대전에서 남하하는 화물열차를 타고 열차가 서면 걷고 열차가 움직이면 다시 타고 하 기를 번 갈아가면서 해를 넘겨 1951년 1월 1일 대구에 도착하여 드디어 병사 구 사령부를 찾아갔다. 그러나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죽을힘을 다해서 겨우 집결지에 도착했더니 이 미 전날 집결된 인원이 부산에 있는 전시사관학교로 이동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 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지금으로서는 별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지칠 대로 지친 데다가 허탈감에 빠져 그만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더 이 상은 한 발작도 걸을 힘도 없고 수중에는 돈도 한 푼 없었다. 당장 갈 곳도 밥 한 끼니를 때울 곳도 없고 엄동설한 속에서 추위를 견딜 방법도 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제2국민 병으로 지원 입대하는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 1월 4일 약 300여명의 다른 청년들과 함께 부산으로 후송되어 부산 거제리에 있는 신병훈련소에 입 소하게 되었다. 이 시점은 전선 상황이 긴박하여 신병훈련소에서 고작 2주일간 신병훈련을 시켜서 전선으 로 바로 투입시키고 있었다. 훈련은 제식훈련과 각개 전투 및 총검술 그리고 집총훈련을 했 는데 M-1소총이 없어서 일본군이 2차 대전 때 쓰던 99식 소총을 가지고 훈련을 받았다. 가 장 기가 막히는 일은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에게 제일 중요한 실탄사격훈련 상황이었다. 1개 중대 단위로 숲 속으로 데리고 가서 조교가 큰 아름드리나무에 M-1소총 8발 칼빈 소총 10 발을 사격해 보이고 수류탄 2발을 투척하여 폭발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전부였다. 일선에 배치되는 신병들이 실탄을 한 발도 쏘아보지 못하고 전선으로 보내지는 기막힌 전쟁이 바로 한국 전쟁의 모습이었다. 식사는 보리밥에 콩나물소금국 뿐이고 이것마저도 배를 채울 수가 없어서 늘 배가 고팠다. 잠자리는 1월의 추위 속에서 난방이 없는 목조 창고 안에서 땅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모포를 뒤집어쓰는 것이 고작이었다. 광목으로 된 전투복과 훈련화가 지급되었는데 지급된 품목이 몸에 맞지 않아 다른 것으로 바꾸어 달라고 하면 "옷에 몸을 맞춰", "신발에 발을 맞춰" 라 고 했다.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소리이지만 그것이 현실이었다. 내 발은 285mm로 한국인의 표준에 비하여 유난히 커서 나한테 맞는 신발이 있을 리가 없었다. 매일 아침 거제리에서 서면 로터리까지의 왕복 구보를 발가락을 오므려서 억지로 신발을 신고서 뛰느라고 큰 고통 을 겪었다. 훈련을 마치기 하루 전날 나는 운이 좋게도 훈련소 제3대대 보급과 기간 병으로 선발되어 전선으로 투입되는 것은 일단 면했다. 그러나 같이 훈련을 받던 나의 중학교 동기동창생인 홍 기선 군은 그 다음날 전선으로 떠나게 되었다. 내일 생명이 붙어 있을지 전혀 보장이 없 지만 이 운명을 거역해 볼 생각조차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하루만에 기간 병이 된 권한으로 취사장에서 누룽지를 얻어 전선으로 떠나는 홍 기선 군에게 다른 사람 모르게 주고 가면서 먹으라고 말하는 것이 내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전 부였다. 나는 보급과의 부식계원으로 근무했는데 구입한 부식을 취사장으로 가져오기 전에 대대장 집과 선임하사관의 집에 들러서 부식을 내려놓고 오는 것이 나의 업무의 하나이었다. 부정한 짓의 하수인 노릇을 계속해야하는 자신이 너무나 비참하게 느껴졌고 무식한 하사관 에게 무시당하고 지시 받는 것이 정말 죽기보다 싫었다. 자존심도 상하고 고민이 되어서 보 급과장 라 중위(육사10기생)의 숙소를 찾아가 '차라리 생명을 하늘에 맡기고 전선으로 나가 는 것이 낳겠다고 나의 심정을 털어놓았더니 라 중위는 나에게 종합학교(전시사관학교)에 들 어가 장교가 되라고 권유했다. 6. 전시사관학교 1951년 3월 18일 전시사관학교인 육군종합학교 사관후보생 시험을 쳐서 입교했다. 육군종 합학교는 6.25전쟁 초기에 이미 국군이 괴멸에까지 직면하면서 4년제 사관교육을 지속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자 육군사관학교와 보병학교를 통합하여 전시사관학교로 발족시킨 것 이다. 당시 육군종합학교는 1950년 10월에 부산 동래에 있는 동래남고와 동래여고의 두 시설을 이용 개설하여 1951년 8월까지 불과 10개월 동안 32기생까지 약 7.000여명을 육군소위로 임관시켜 전쟁에 투입했다. 일선에 배치된 소대장은 선두에 서서 소대를 지휘 하다가 대부분이 전사 아니면 전상을 당 하게 됨으로 총알받이 또는 소모품 소위라는 별칭이 붙었다. 그러나 육군종합학교 출신 장 교들이야말로 조국을 위기에서 구한 방탄복이었다고 해도 조금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전사한 장교만도 1377명이고 부상자가 2256명이라면 졸업생 2명중 1명 꼴로 희생되어서 이 만큼 치열한 전쟁은 세계 전쟁사상 드문 일이었고 월남전에 비하면 약20배 가까운 치열도 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의 대부분은 그 당시 6년제 중학교 5-6학년생과 졸업생 그리고 대학 재학생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대학 졸업자와 중학교교사, 그리고 심지어 중학교 교장이나 대학교수도 끼어 있 었다. 그런가하면 일본 육사 및 해사출신의 소위로부터 대위까지 수십 명이 입교함으로서 대한민국 육군소위로 임관하였다. 이들은 나이도 18세로부터 40여세까지 다양해서 아들과 아버지, 제자와 스승이 동기생이 되어 같은 소위로 임관해서 일선에서 같이 싸웠다. 교육기간은 처음 8주간이었으나 나중에는 18주간으로 늘어났지만 교육훈련은 강행군의 연 속이었다. 현대전에 있어서 일개 전투병사를 훈련시키는데도 4개월이라는 시간이 필요로 하 는데 이들은 이렇게 단기간의 교육을 받고 전선으로 출전해야 했다.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가르쳐야 하니 별 도리가 없었겠지만 그야말로 스파르타식이어서 교육훈련이 얼마나 심한지 호랑이라도 때려 잡을만한 힘이 있다고 스스로 생각되던 18세의 내 체력도 고통을 이겨내기 힘들 정도였다. 우리들은 각종화기의 사격훈련으로부터 각개전투, 야간전투, 독도법, 분대, 소대, 중대의 공 격 및 방어전술과 지휘관으로서 갖추어야 할 교수법, 통솔법 등의 모든 과목의 교육훈련을 받았다. 그것은 실제 전쟁터에서 써먹을 전술전기는 물론 이론까지 폭넓게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 주간에 실시되는 학과 강의 시간 중에 태반이 강의를 제대로 듣지 못하고 졸기 에 바빴다. 낮 시간의 훈련이 고되기도 했지만 정신교육을 시킨다고 야간에 실시되는 체력 단련과 기합으로 몸이 녹초가 되어 마치 물먹은 솜처럼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앉 기만 하면 잠이 쏟아져서 눈 뚜껑이 솥뚜껑이 되어버려서 심지어는 화장실에 앉아 있다가도 잠이 들어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아마도 당시 단기간에 장교를 양성해 내야하다 보니 전술 전기에 교육의 중점을 두기보다는 극한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정신교육에 두지 않았던 것인 가 싶다. 육군종합학교 총장이었던 김홍일 소장은 자주 이런 내용의 훈시를 하신 것을 지금도 기억한 다. 1. 장교는 군대의 골간이다. 2. 조국의 운명은 귀관들의 두 어깨에 메워져 있다. 3. 국권을 회복하는데 귀관들의 헌신적인 충성이 있어야겠다. 4. 장교는 명예를 목숨 보다 더 소중히 해야 한다. 5. 군인은 죽음을 무릅쓰고 책임과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 민간인과 다른 점이다. 6. 장교는 국제신사다. 7. 솔선수범하고 부하를 사랑하라. 훈련기간 중 가장 힘들었던 것은 배고픔을 참는 것과 기합을 받고 견디어 내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후보생들이 가족들의 생사를 서로 알지 못하고 지내는 판이었지만 운이 좋은 소수 의 후보생들은 일요일에 가족들이 면회를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면회를 와서 가족들과 음 식을 먹는 후보생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입교한지 8주 째 되는 일요일에 시내로 외출을 나가서 '혹시라도 가족이나 아는 사람을 만 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사람들의 왕래가 가장 많은 부산시내의 광 복동을 아침나절 왔다 갔다 했다. 오후 1시쯤 되어서 지치기도 해서 이제 그만 헛된 기대를 포기하고 부대로 돌아갈까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정말로 하나님이 도우셔서 기가 막히게도 5촌 숙부님 같이 생긴 분이 먼발치에서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나는 부리나케 그 사람을 쫓 아가서 무조건 "숙부님!"하고 옷소매를 붙잡았다. 가까이에서 정면으로 쳐다보니 행색이 워 낙 달라지기는 하였지만 숙부님이 틀림이 없었다. 숙부님은 나를 알아보시더니 "어이구! 이 게 누구냐? 인수가 살아있었구나" 하시면서 나를 부둥켜 앉고 우셨다. 숙부님의 손을 붙잡은 나도 눈물이 펑펑 흘러 내렸다. 숙부님 가족은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하고 계셨고 우리 집은 제주도로 피난을 가서 모두 무 사하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 날 나는 숙부님을 따라서 피난살이하는 숙부님 댁으 로 갔다. 할머님과 숙모님께서 흰쌀밥에 데친 오징어를 해 주셨다. 나는 그 많은 음식이 어 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위가 늘어나 배가 터질 정도로 먹었다. 부대로 돌아가기 위 해서 마루에 앉아 신발 끈을 매려고 허리를 굽히는데 그만 목에서 먹은 음식이 입 밖으로 나오려고 하는 것을 겨우 참았다. 한편 나는 부산에서 남대문교회 중등부 친구인 정 창원을 만나게 된 것도 큰 행운이었다. 정창원은 사변 전에 군에 입대하여 육사 10기생으로 임관해서 중위로 부산 병참기지창에 근 무하고 있었다. 나는 그 친구를 찾아가 부대의 장교식당에서 얻어먹고 가끔 용돈도 얻어 쓰 고 귀대할 때는 건빵을 10봉씩을 얻어 가지고 와서 숨겨 놓고서 한 주간 동안 간식으로 화 장실에 갈 때나 야간에 불침번 근무를 할 때 혹은 순찰을 돌 때 먹으면서 허기를 채웠다. 졸업하기 2주를 남겨 놓았을 무렵 우리들은 구급 법 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교육용으 로 상영하는 영화가 교육을 위해서 제작한 필름이 아니라 실제 상황을 그대로 촬영한 기록 영화였다. 실전에서 팔다리가 부러져 덜렁거리고 튀어나온 배창자를 손으로 움켜쥐고 쓰러 져 살려달라고 소리 지르는 비참한 광경을 보고서 우리들은 충격을 크게 받았다. 실제상황은 아직 실전경험이 없는 우리들에게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비참하게 보였기 때 문에 앞으로 각자에게 닥칠 일들을 생각하면서 눈앞이 캄캄해 져왔다. 후보생들은 이미 각 오를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고민 하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친구 정 창원 중위와 같이 후방근무를 하는 방법은 없을까? 아니 면 최 일선에서 전투하는 병과만이라도 면해 볼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지만 별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몇 일후 우리 기(期)에서 40명을 병참병과(兵站兵科)로 선발한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그 때까지 병과에 대한 지식도 없었기 때문에 관심도 거의 없었던 우리들은 그 때부터 삼삼오오 모여서 병과에 대한 이야기로 수군거렸지만 모두 막연한 이야기들뿐이었 다. 졸업하기 약 10일 전쯤 새벽 1시에 깊은 잠에 골아 떨어져 있는데 "팬티만 입고 연병장으 로 집합" 이라는 비상이 걸렸다. 통상적으로 단체기합을 받을 경우에는 팬티 바람에 집합하 여 살을 베는 겨울의 찬바람을 맞으며 서서 일장 훈시를 듣고 곧 이어 "우 향 우" 한 다음 "목표 A고지 선착순으로 집합" 이라는 구령이 떨어졌다. A고지는 연병장으로부터 약 150m 높이의 아까시야 나무로 뒤덮인 가파른 고지였는데 기합 을 넣는 날에는 이미 구대장 한사람이 A 고지 정상에 올라가 후레쉬 라이트의 불빛을 반짝 이며 대기하고 있었다. 각자가 최선을 다하여 A고지를 향하여 뛰어 정상에 올라가면 구대장 이 확인 스탬프 도장을 가지고 팔뚝에 도장을 찍어주면 다시 뛰어 내려와 선착순으로 1열 종대로 선다. 무조건 1/2에 들지 못한 나머지는 또 다시 A고지를 뛰어야하고 2차에서 또 다 시 1/2를 추리고 나머지는 또 뛰어야 하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이번 선착순에서 나는 100명 안에 들어서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그런데 다음 날 일과 후 어제저녁 목표 A고지로 선착순을 돌던 기합에서 맨 나중까지 쳐진 40명을 병참병과로 보낸다는 것이 밝혀졌다. 당연히 신체가 허약하고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잘 뛰지를 못하기 때문에 전투병과가 아닌 지원병과로 가게 되었고 당시로서는 나름대로 최 선의 선택이었겠지만 "그럴 줄 알았으면 천천히 뛸 걸"하는 아쉬움의 한숨을 내 쉬었다. 그 러나 그 때 병참병과로 갔었다면 생명의 위험부담과 부상은 당하지 않았겠지만 전쟁터에서 부여받은 전투임무를 완수해 내는 참다운 군인다운 군인의 길을 걷지는 못했을 것이다. 1951년 7월 21일 드디어 4개월의 교육훈련을 마치고 우리 동기생(육군종합학교 30기) 210 명(해병10명 포함)은 엄격하고 고된 훈련과정에서 10%이상인 22명이 탈락하고 188명이 육 군소위로 임관하였다. 나의 군번은 214143이다. 제2부: 사선을 넘나들며 그리고 사랑 1. 열여덟 육군소위 1951년 7월 21일 나는 홍안(紅顔)의 18세에 육군소위로 임관하였다. 전쟁터에 나가자마자 총알받이로 소모가 되어버릴 것이란 뜻에서 붙여진 일명 소모품 소위로 말이다. 어머니는 내가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로 임관하여 곧 전쟁터로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피난처인 제주도에서 부산에 도착하셨지만 연락선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임관 식에는 참 석치 못하시고 그날 밤을 작은댁에서 나와 같이 지내셨다. 다음 날 오후 부산 역 플랫 홈에서 어머니와 나는 또다시 이별을 해야만 했다. 좀처럼 우 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시던 어머니가 "인수야"하며 나를 꼭 끌어안고 통곡을 하시는 것이 아 닌가? 파리 목숨처럼 사람이 죽어나가는 전쟁터로 이번에 헤어지면 정말로 살아서 만날 수 있다는 기약을 전혀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아마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이란 바로 이런 때를 일컫는 것일 것이다. 자식을 여덟을 잃고 아홉 번째로 건져서 하나님께로 바치기로 굳게 마 음먹고 키운 자식을 살아 돌아올 가능성이 없는 전쟁터로 떠나보내는 어머니의 심정이 어떠 하였겠는가? 오랜만에 어머니의 품속에 안긴 내 눈에서도 흘러내리는 눈물이 멈추어지지가 않았다. 어 머니는 얼마를 우시더니 눈물을 닦으시며 "너는 결코 죽지 않아! 하느님이 지켜 주실 거야! 너는 결코 죽지 않아! 하나님이 지켜 주실 거야!" 라고 하시면서 마치 주문처럼 같은 말을 몇 번씩 반복하는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어머니가 정상적인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절망 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지만 오직 신앙에 의지해서 서려고 하신다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느 낄 수 있었다. 어머니를 그렇게 강하게 만든 것은 분명히 신앙이었다. 열차가 출발 할 시간이 되어 할 수없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서 기차에 올라탔지만 어머니는 플랫 홈에 홀로 서서 한없이 손을 흔들어 대셨다. 아마 어머니는 계속해서 '인수 야! 너는 결코 죽지 않아! 하나님이 너를 지켜 주실 거야'를 외우고 계셨을 것이다. 나도 어 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지만 어머니 같은 믿음이 없어서인지 어머니 의 모습이 점점 작아질수록 눈물만 쉼 없이 흘러내렸다. 대구 제 1보충대에서 발령 받기 위하여 몇 일간 머무는 동안 대구로 피난을 와서 양키물 건 장사를 하신다는 고모님을 찾아 나섰다. 다행히도 양키물건시장에서 미군 군복장사를 하 고 계시는 고모님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고모님은 내 모습을 보시고 깜짝 놀라더 니 장교가 된 것이 대견하고 흐뭇하신 지 나를 연신 쓰다듬으며 시장의 모든 장사꾼들에게 자기의 장조카라고 자랑하고 다니셨다. 아마도 고모님은 어린 시절에 나를 업어서 키워주셨 기 때문에 더욱더 나를 자랑스러워하시는 것 같았다. 고모님은 자기가 팔고 있는 것들 중에서 내 몸에 맞는 미제 전투복(작업복) 2벌을 찾아 주 고 다른 가게에 가서 군화도 사 가지고 와서 신어 보라고 하셨다. 후줄근해 보이는 광목으 로 된 군복을 벗고 미제 전투복에 군화까지 신고 나니 제법 그럴 듯한 장교의 모습이었다. 고모님은 나의 모습을 보시고 무척이나 만족해하면서 시장에서 녹두지짐, 순대, 떡 등을 사 다가 억지로 배가 터질 정도로 먹으라고 권하셨다. 나는 그 날 그 양키물건시장에서 어머니가 주신 약간의 돈으로 당시 한참 유행하던 왜정시 대에 일본군 장교들이 차고 다니던 일명 똥 가방이라고 하는 가죽가방과 미제 군용 나침반 을 구입했다. 미제 군복과 군화에 나침반을 주머니에 달고 똥 가방을 오른 쪽 엉덩이에 차 고 다니는 것이 당시 대부분의 신참장교들이 그리는 멋쟁이 장교의 모습이었다. 내일이면 전방으로 가서 죽을지 살지 모르는 전쟁통에서도 이렇게 한 번 멋을 부려 보고 싶었던 심정은 머리를 총천연색으로 염색을 하고 싶어하는 요즘의 청소년의 심정과 무엇이 다른 것이 있었겠는가? 몇 일 후 우리 동기생들은 전원 전방부대로 발령을 받았는데 나를 포함하여 21명이 보병 제5사단에 발령 받았다. 8월초의 한참 무더운 여름날 트럭을 타고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 쓴 체 5사단사령부에 도착한 우리 동기생 21명은 사단장 민 기식 준장에게 부임신고를 했다. 사단장은 우리들에게 이런 훈시를 했다. "모든 전선은 지금 고지 하나라도 더 탈환하기 위하여 혈투를 계속하고 있다. 우리는 한 치 의 땅도 양보할 수 없으며, 백병전도 불사하면서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야 한다. 우리 사단도 정비가 끝나는 대로 곧 전선에 투입되어 공격할 것이다" 이 무렵 전선은 교착상태로 접어들면서 전쟁의 양상이 점점 국지전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아마도 6.25전쟁기간 중 가장 치열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것은 이 단계에서 희생된 사상 자가 태반이었던 것으로도 증명된다.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국지전보다 전면적인 공세가 더 병력손실이 많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았다. 왜냐하면 국지전은 한 개의 고지를 두고 치열한 공방전을 치르다 보면 상호 병력 손실이 많게 되는데 더욱이 쌍방의 화력이 강 해지면서 인명손실이 더 늘어만 가기 때문이다. 6.25전쟁의 단계를 4단계로 구분 지어 볼 때 이 단계는 마지막 제4단계로 볼 수 있겠다. 제1단계: 1950년6월25일 새벽 김일성의 남침 개시로, 국군은 인민군의 전차에 밀려 3일 만 에 수도 서울을 내주고 낙동강 방어선(부산만 남긴)까지 밀려 악전고투하고 제2단계: 1950년9월15일 UN군의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서울을 탈환하고, 38선을 돌파 하여 북진으로 한만 국경까지 이르렀으나 제3단계: 1950년11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UN군은 다시 밀려 서울은 1.4후퇴를 겪게고, 전선 은 평택-삼척을 가로지르는 방어선을 형성하였다가 UN군이 다시 서울을 탈환하 고 양양까지 북진하여 Kansas선이라는 지금의 휴전선에 이르는 밀고 밀리는 상황 에서 제4단계: 1951년7월10일부터 본격적인 휴전회담이 재개되어 1953년7월23일 휴전 일 까지 하나의 고정방어 전선에서 고지의 탈환전으로 변한 것이다. 피 아 간에 고지 하나라도 더 탈환하기 위하여 혈투가 진행됨으로서 전방의 고지들은 초토 화되고 주인이 밤낮으로 바뀌기를 거듭하는 가운데 무수한 인명과 물적 자원이 사라져 가는 소모전이 계속되는 동안 소리 없이 쓰러져 간 젊은이가 얼마나 되는지 헤아릴 수도 없었다. 오늘 부임한 소대장이 다음날엔 시체로 내려가는 것이 거의 다반사였다. 그래서 일선 소대 장을 소모품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헛된 죽음이 아니라 누군가가 그 자리에서 희생되 어야 할 자리를 맡고 쓰러졌던 것이다. 나는 보병 제5사단 35연대 2대대 7중대 1소대장으로 임명되었다. 나의 직속상관은 사단장 준장 민 기식, 연대장 대령 고 백규, 대대장 소령 정 인순, 중대장 중위 이 배억 이었다. 우리 사단은 전번 전투의 손실이 커서 당시는 군단(미 제10군단) 예비로 전환되어 강원도 현리 일대에서 재편성 및 부대훈련 중에 있었기 때문에 당장 전투에 투입되지 않아서 다행 히도 나는 내가 소속될 부대와 내가 지휘할 소대를 파악할 여유가 있었다. 나의 소대인 제 1소대는 소대장 이하 총 32명이어야 할 소대 병력이 절반도 안 되는 15명 뿐이었다. 선임하사관 김 일등 상사와 향도 고 일등 중사 그리고 분대장 요원 2등 중사 3명 과 나머지 신병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약 1주 후 부족한 소대원이 신병으로 보충되었다. 31명의 부하 중 나보다 나이가 적은 병사는 3명뿐이었지만 그래도 소대원들은 소대장인 나 의 명령을 잘 따라주었다. 나는 전투에 투입되기 직전까지 소대원들에게 우리는 생사를 같이하며 싸워야하는 전우로 서 공동운명체라는 생각을 심어 주고 소대장인 나를 믿고 따라 주기를 당부하면서, 한편 나 자신은 사관학교에서 배운 원칙대로 장교로서의 긍지를 잃지 않고 모든 일에 솔선수범하기 위하여 나름대로 애를 많이 썼다. 또한 그런 와중에도 틈만 있으면 사격군기와 야간 전투 및 적 전술에 대하여 교육을 실시하며 강조하였다. 당시 대형 천막은 대대 본부에만 하나가 있을 뿐 모든 장교와 사병들은 맨 땅에다 개인 당 한 장씩 지급되는 판쵸 우의 두 장을 붙여서 친 개인용 텐트에서 2 명씩 숙영을 하고 있었 다. 1951년 8월 중순의 어느 날 많은 비는 아니지만 비가 줄줄 내리는 새벽 1시경 출동명령이 떨어졌다. 드디어 전투를 하게 되나보다 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중대장이 대 대장으로부터 작전명령을 수령하고 돌아와서 소대장들을 집합시켜 지도를 펴놓고 우리중대 는 798고지를 0500시를 기하여 공격하기 위하여 지금부터 행군종대로 공격대기지점으로 이 동하며 도착과 거의 동시에 공격을 개시할 것이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우리 소대는 약 1시간 동안 행군해서 공격대기지점에 도착하여 정확하게 새벽 5시가 되자 798고지로 공격을 위한 전진을 시작하였다. 비는 거의 끝였지만 안개가 몹시도 짙게 끼어 5m 앞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사방은 내가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원시림을 방 불케 하는 거대한 아름드리나무들이 꽉 들어찬 숲 속이었다, 그 거대한 아름드리나무들이 포탄에 맞아 꺾어져 여기 저기 무질서하게 쓰러져 있어서 전진하기가 몹시도 힘겨웠다. 나는 선두에서 소대원들을 이끌고 쓰러진 나무 밑으로 기어가거나 나무를 타고 넘어서 안 개를 헤쳐가면서 조심조심 고지 정상을 향하여 진격해 올라갔다. 어느덧 희미하게 동녘이 밝아오고 있었지만 적의 저항이 전혀 없는데도 진격의 속도가 원하는 만큼 빠르지가 못했 다. 약 1시간 가량 진격해 올라갔을 무렵 전방에서 적군인지 아군인지 알 수 없는 물체들이 움 직이는 것이 포착되었다. 우리들이 점점 가까이 접근해도 그들은 전연 경계상태에 있지 않 았다. 나는 부대를 정지시키고 그들의 신원을 확인했더니 아군의 패잔병들이 확실했다. 그들 은 얼마나 굶었는지 설령 적이 접근한다 해도 움직일 힘조차 없어 보였고 그나마 경상자들 은 상처를 싸안고 비틀거리면서 삼삼오오 모여 산에서 버섯을 따서 반합에다 끓여 먹고 있 었다. 그 당시는 오늘날과 같이 부대 마크를 달고 있는 것도 아니어서 어느 부대인지 식별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일단 아군임을 확인한 이상 우리는 안심하고 진격을 계속했다. 우리는 계속 전진해서 오전 8시경 전혀 적의 저항이 없이 정상을 무혈점령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공격목표가 잘못되었으니 즉시 공격대기지점으로 복귀하라는 명 령이 떨어졌다. 우리는 또다시 약 2시간 이상을 소비하며 하산해서 원래 출발했던 곳으로 집결하였다. 당 시 소대장인 나의 입장에선 지형을 확인할 입장이 못 되었으나 지도 하나를 제대로 판독할 줄도 모르는 무능한 지휘관 때문에 우리 소대는 밤새도록 엉뚱한 곳만 헤매고 다니는 헛고 생만 한 셈이었다. 우리 중대는 당일 오후 1시를 기해 798고지를 다시 공격하였다. 또 다시 부슬비가 내렸지 만 안개가 계속 겉이지 않아서 공격하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유리한 편이었다. 의외로 적의 저항이 극히 미미하여 가끔 '따콩, 따콩' 하는 AK소총 소리가 들리고 일정한 사격 목표 없이 여기 저기 무작위로 사격하는 요란사격의 박격포 탄이 산발적으로 떨어질 뿐이었다. 전투라는 것이 싱거울 정도로 나의 소대는 1명의 희생도 없이 목표를 탈취하는데 성공하였 다. 극도로 긴장된 가운데 치러진 첫 번째 전투가 너무 싱거워서 나는 오히려 의아하지 않 을 수 없었다. 어쨌든 고지를 점령했으니 이제는 점령한 고지를 방어할 방어편성을 실시해 야하는데 방어편성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분명 사관학교에서 배우기는 배웠는데 공격 할 때처럼 잘 생각이 나지를 않았다. 눈치가 빠른 선임하사관 김 상사는 "소대장님 ! 분대장을 집합시켜 방어편성을 하겠습니 다." 하길 레 나는 그저 "응" 하고 대답만 하고 김 상사가 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선임 하사관은 "분대장 집합! 우리 소대의 방어지역은 저 지점에서 저 지점까지 다. 나를 따르라. 1분대장! 1분대는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2분대는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3분대는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담당한다. 각 분대간의 간격에는 교차사격을 준비하고, 각기 전 사면 9부 능선에 개인호를 파고 수류탄의 안전핀을 펴놓을 것, 소대본부는 후사면 소대중앙 제일 큰 소나무 이다. 적의 공격은 오늘 저녁 9시경으로 예상되니 사전에 충분한 휴식을 취하라"고 능숙하게 방어 편성을 했다. '아 ! 저렇게 하는 것을 배웠는데 왜 생각이 안 났을까?' 나는 그 때 아는 것과 할 수 있 는 것과는 크게 다르고 경험이란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소대원들은 급히 자기 몸을 가릴 수 있는 개인 참호인 급편 방어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 다. 나는 소대원 하나 하나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면서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했다. 김 상사는 "소대장 님! 전투는 오늘밤에 붙을 것 같으니 지금 먼저 잠을 좀 자 두는 것이 좋 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아무래도 잠이 올 것 같지 않아서 김 상사에게 내가 후방경계를 할 터이니 먼저 눈을 좀 붙이라고 했다. 나 혼자서 후방경계를 하는데 안개가 끼어 그리 멀리는 보이지 않지만 작은 소나무들이 조 금씩 내 앞으로 다가오는 것 같이 느껴졌다. 눈을 다시 비비고 보면 그 자리에 있는 것도 같고 어떻게 보면 앞으로 많이 다가 온 것도 같아 보였다. 사관학교에서 배웠던 적이 교묘 하게 위장하여 접근하는 적 전술을 연상하니 물체가 환상적으로 보였던 것 같다. 생각나야 할 때는 생각이 안 나고 생각을 안 해도 되는 때는 생각이 나는 상황이었다. 김 상사가 예상한 저녁 9시가 되었을 무렵까지 우리는 무척 긴장된 체로 기다렸지만 전선 의 밤은 지나칠 정도로 고요했다. 그러나 9시가 지나자 오늘밤은 적의 공격이 없을 것 같기 도 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다소 긴장이 풀리는 듯 했다. 새벽 3시가 되었을 무렵 바로 방어진지 앞에서 요란한 따발총 소리가 나면서 적의 병력이 돌격하여 올라왔다. 적이 바로 코앞에서 순식간에 출몰했기 때문에 백병전을 벌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 일부는 적과 뒤엉켜 백병전을 벌리기도 했지만 대부분이 전투경험이 없는 신병들이었기 때문에 겁을 집어먹고 방어선의 후방으로 물러남으로서 우리의 방어진지는 무 너지고 말았다. 결국 우리는 기습을 당하여 제대로 총도 쏘아보지 못하고 유린당한 것이었 다. 원래 정상적인 공격전술이었다면 포병이 공격준비사격을 하고 공격대기지점에서부터 공 격을 개시하여 포병의 지원사격을 받아가면서 공격을 해오는 것인데, 적은 안개가 끼어서 앞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을 이용하여 이미 우리의 방어진지에 최대로 가까이 다가와 있다가 아군의 전초경계병을 칼로 찌르고 무 조명 무 지원의 기습공격을 해왔던 것이다. 어이없이 당한 적의 기습공격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렇게 쉽게 무너질 수도 있는 것인가를 생각하니 분통이 터졌다. 게다가 더욱 한심한 것은 한번 후퇴하기 시작한 우리의 병사들은 한없이 산밑으로 후퇴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산중턱에서 소대원들을 수습 집결시 켜 보려고 애를 썼지만 도저히 통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산밑에 다다랐을 때 그곳에는 헌병들이 일렬횡대로 서서 우리에게 총을 겨누고 더 이상 후퇴할 수 없도록 막고 있었고, 대대장도 노기가 등등해서 권총을 뽑아들고 더 이상 후퇴하면 즉결처분을 해버리겠다고 엄 포를 놓고 있었다. (6.25전쟁 기간 중 한때 한국군에는 직결 처분권이 분대장에게까지 부여 된 적이 있었다.) 우리 중대는 일단 이 선에서 수습되고 역습할 준비를 갖추었다. 우리포병은 적이 남아 있 을 수 없을 정도로 포격을 퍼부어서 저항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다시 공격해 올라가 방어진 지를 회복 확보할 수 있었다. 진지를 다시 점령하고 보니 아군의 포격으로 인한 인민군의 시체들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이 전투 중 우리 소대병력의 손실은 단 2병이 총상을 입어 후송되었을 뿐이었다. 나의 첫 번째 전투는 허망하게 실패로 끝났지만 나는 이 전투를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전투경험이야 말로 가장 귀중한 것임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 다. 애당초 우리가 고지를 쉽게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적이 본격적으로 우리를 공격하기 전에 우리의 전투력을 확인하기 위하여 적의 정찰부대가 배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투경험이 없는 내가 이런 적의 교묘한 전술과 기도(企圖)를 이해하기 어려웠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일선 소대장인 나로서는 당시에는 알 수가 없는 상황이었으나, 나중 에 가서야 이 전투가 주 저항선인 Kansas선의 전초기지 확보전이였음으로 피 아 간에 치열 한 전투가 전개되지 않았던 것을 알게 되었다. 2. 김일성 고지 김일성 고지 전투 또는 가칠봉(加七峰) 부근 전투라고 불리는 이 전투는 1951년9월4일-10 월14일까지 40일간에 걸친 고지 쟁탈을 위한 처절한 격전이 벌어진 전투였다. 우리의 공격목표였던 김일성 고지(1211고지)는 강원도 양구 북방에 위치한 대우산(1178고 지) - 가칠봉(1242고지) - 매봉(1290고지)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의 한 봉우리이다. 지형으로 보아 바로 남쪽의 가칠봉 보다는 낮아서 가칠봉에서 내려다 볼 수 있는 조건이었지만 방어 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어져 있었다. 더욱이 이 고지가 중요한 이유는 미 10군단 전투지경내의 주요 작전도로인 사태리 도로를 통제할 수 있어서 미 제2사단이 주 거점을 형성한 피의 능선 동측을 엄호하는 입지적 조건 을 갖추었기 때문에 적도 이 고지를 필사적으로 고수(固守)하고자 하였으며, 아군도 기필코 이를 탈취 확보하여야만 하는 전략적 요충(要衝)이었다. 미 10군단에 배속된 우리사단(한국군 제5사단)의 공격목표인 김일성 고지(1211고지)를 탈 취하기 위하여 제5사단의 예하 제27, 35, 36 연대가 축차적으로 투입되어 공격을 감행함으 로써 수차 그 정상을 탈취하는데 성공하였지만, 적의 역습으로 뺏었다가 빼앗기고 또다시 빼앗는 치열한 전투였었다. 작전지구는 험준한 산악지대여서 대부분이 충암절벽과 급경사로 된 능선으로 되어 있어 병 력 투입이 매우 곤란하였다. 또한 공격목표인 김일성 고지(1211고지) 일대에는 쌍방의 포격 으로 인하여 대부분의 수목이 사라지고 사계청소로 벌목되어 적진의 전면과 측면은 완전 노 출되었고 급경사의 지형은 공격부대가 은폐(隱蔽)할 수 있는 지형지물도 없었으며, 일대가 높은 산봉우리로 중첩되어 있어서 도로망이 좋지 않아 보급추진에도 곤란하였다. 작전기간 중 기상상태는 대체적으로 청명한 날씨가 이어져 제공권을 확보한 우군의 항공지 원을 받는데 유리하였다. 적군은 인민군 제2군단 주력인 제27사단 7연대로서 대부분이 강제로 징집된 20세 미만의 학생층과 30세 이상의 농민출신으로 구성되었다. 인민군은 고지의 이름을 김일성 고지라고 붙인 것 답께 탄약과 식량의 보급 및 월동준비도 완료하고, 방어진지의 축성 상태는 배사면(背斜面)에서 전사면(前斜面)까지 갱도를 뚫어 놓 았으며 전사 면에는 방사선(放絲線) 모양의 유개(有蓋) 교통호를 만들고 통나무로 유개진지 를 구축함은 물론 기관총 진지는 콘크리트로 요새화(要塞化)하여 포격과 폭격에도 지탱할 수 있는 거점(據點)을 강력하게 구축하고 있었다. 1951년 9월 5일 0800시를 기하여 5사단 27연대의 3대대가 1211고지(김일성 고지)에 대한 공격을 개 시 하였으나 예상외로 완강한 적의 저항으로 공격의 진전이 없는 가운데 오히려 역습기세(逆襲氣勢)마저 보이게 되자 사단장은 9월6일 우리 35연대를 저녁 무렵 덕곡리에 집결시켰다가 다음 날 오후에 상평으로 진출시킨 후, 그 일대의 진지를 점령하고 27연대의 직 후방(直後方)을 엄호(掩護)하게 하면서 증원태세(增援態勢)를 갖추도록 했다. 우리는 공격을 위한 부대이동과 진지점령 그리고 공격준비에 여념이 없으면서도 소대원들 의 얼굴에는 이제 정말 강력하게 저항하는 적 진지에 대한 공격을 앞두고 저마다 이번 전투 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염려로 두려움의 그림자가 드리어져 있었다. 미국의 쌕쌕이(전투기)들이 날아와 바로 앞에 있는 적진을 폭격하는데 천지를 진동시키는 그 광음은 얼이 빠질 지경이었다. 쌕쌕이들이 폭격을 마치고 떠나자마자 이번에는 아군의 지상포들이 포문을 열고 적진에 포탄을 작렬시켰다. 시간적으로 쉼이 없고 공간적으로 빈틈 없이 퍼붓는 포격은 포탄이 작렬하는 쐐 소리와 불꽃 및 검은 연기로 적진을 완전히 뒤덮어 버렸다. 실제 전쟁에서의 화력지원은 내가 지금까지 막연하게 상상했던 정도를 훨씬 넘어서 과연 저런 속에서도 살아남을 생명체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또 한편으로는 나 도 앞으로 저런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니 어금니가 덜덜 떨렸다. 우리 대대는 이틀 후 9월8일 공격을 위하여 전진진지(前進陣地)를 점령하고 있었는데 오후 에 우리 대대 정면에 1개 대대 규모의 적이 공세를 취하여 왔다. 우리 대대는 즉각 포병의 지원사격을 받아가며 악전고투를 치른 끝에 일단 적을 격퇴하였다. 이 전투가 내가 전장에 서 맛볼 수 있었던 첫 번째 승리였던 셈이다. 소대원들의 대부분은 2주간의 훈련을 받고 보충된 병사들이어서 수류탄도 제대로 까서 던 지지도 못하여 오발사고가 나기도 하고, 머리를 땅에 파묻고 적 방향을 내다보지도 않고 총 을 쏘는 병사가 많아 나는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고래고래 악을 쓸 수밖에 없었다. 전투지 휘를 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실전훈련을 시켰다고나 해야 할 것 같았다. 다행이 주간 전투와 아군의 우세한 화력으로 적을 격퇴하고 나니 우리 모두를 사로잡고 있던 두려움이 어느 정 도 사라지고 약간의 자신감이 생겨나서 병사들의 사기도 다소 앙양되었다. 나는 여기에서 막연하나마 군인의 사기는 전투경험에서 얻어지는 자신감으로부터 나오며, 또한 사기가 올 라야 군기가 확립되고 유지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다행이랄까 우리연대의 제1대대만 27연대의 공격을 지원하는 공격 제대로 포함되고 우리대 대는 Kansas선의 방어진지 공사에 투입되어 한숨을 돌릴 수가 있게 되었다. 몇 일 후, 아마도 9월 중순의 어느 날 새벽 5시를 기하여 우리 연대가 2개 대대 병진으로, 공격준비사격을 연신해 가면서 일제 공격을 실시했다. 공격준비사격에 가담한 전 군단 예하 포병들의 야포사격은 김일성 고지(1211고지) 일대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또한 6부 능선 에서 최고봉까지 탄착점을 옮겨가면서 매설된 지뢰를 파괴하기 위한 사격으로 짓이겨 나갔 다. "쉿쉿 쾅! 쾅! 쉿쉿 쾅! 쾅!"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진동 소리가 계곡을 뒤흔들었다. 우리 중대는 계곡을 뒤덮은 초연(硝煙)속을 뚫고 일제히 약진하여 깊은 계곡을 횡단하는데 이번에는 인민군의 포탄이 날아오기 시작하더니 우리 근처에 떨어져 요란한 폭음과 함께 작 렬하였다. 쾅! 쨍! 하는 소리에 마치 귀청이 터져 나가는 것 같았고 흙과 돌 부스러기들이 사정없이 내 철모를 두드렸다. 처음으로 포탄이 집중적으로 떨어지는 속에 서 있게 되니 정 신이 하나도 없었다. 적의 포탄이 사정없이 계속 우리 주변에 떨어지다 보니 혹시 내가 포 탄의 파편에 맞은 것이 아닌 가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몸 어디를 살펴보아도 아무 이상이 없 었다. 그러나 나는 정신을 차려 좌우의 우리 소대원을 돌아보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1명의 소대원이 포탄의 파편에 얼굴을 맞아 피를 흘리며 손을 허공에 휘젓고 있고 또 1명은 대퇴부에 맞아 "소대장님! 소대장님!"하면서 애타게 나를 찾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정말로 그 순간에 그 병사가 찾을 수 있는 것은 부모도 친구도 아니고 소대장인 나밖에 없 었던 것이다. 소대원의 대부분은 땅에 엎드려 꼼 짝을 하지를 않았다. "위생병! 위생병! 부상자를 후송하 라"고 소리를 지르고는 땅에 엎드려 움직이려 하지 않는 소대원들을 향하여 "제1소대! 뛰어 서 앞으로 전진하라" "무조건 산 밑에까지 뛰어서 전진하라" 라고 외치면서 나부터 앞으로 뛰어나갔다. 그제야 소대원들은 나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뛰면서 옆을 보니 제2소대 3 소대에서도 부상병이 속출 후송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우리 중대는 목표 1의 밑에 도착하였지만 목표 2를 공격할 제6중대가 뒤쳐져 있었다. * 상황도 제35연대 작전계획 참조 우리 대대는 다시 공격 대오를 가다듬고 1200시 목표 1 및 2의 밑에서부터 돌진하기 시작 하였는데 이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적은 포병지원과 기관총사격을 개시하여 좌우 측방 에서 우리를 크게 위협하였다. 목표 1과 2는 경사도가 가파른 데다가 정상에 이르는 2개의 능선 접근로가 멀리 떨어져 있 어서 제6중대와의 상호지원이 곤란하였다. 우리 7중대는 물론 6중대도 더 이상 진출하지 못 하고 공격이 중단상태에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급박하게 전개되자 대대장은 대대 예비인 제5중대를 제6중대 우측 방으로 공격케 하여 측방 화력을 견제(牽制)하도록 하였으나 공격 의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한편 적은 경사도가 가파른 진지에 근접해 있는 아군에 대하여 야포로 포격을 하다가는 잘 못하면 자기들에게도 포탄이 떨어질 우려가 있게 되자 주로 82mm박격포 사격을 퍼부었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급히 각자가 야전삽으로 개인호를 파는데 까지 파고 그 속에 들어갔는 데, 다행이 경사가 심하여 포탄은 대부분 우리 뒤에 떨어져 피해가 크지 않았다. 이렇게 공격의 진전이 없게 되자 연대장은 즉각 항공지원을 요청하고, 공격 중이던 우리대 대를 폭격선상에서 이탈하여 우군의 전투기가 아군의 위치를 알아 볼 수 있도록 대공포판 (對空布板)을 펴도록 명령하였다. 잠시 후 김일성 고지(1211고지) 상공에 나타난 미 공군의 전폭기 3개 편대는 급강하로 김일성 고지(1211고지) 일원을 강타하기 시작하였는데 마치 봉 우리에 화산이 폭발하는 것 같았다. 우리대대는 용기백배하여 초연 속을 뚫고 목표 1및2로 약진을 거듭하여 오후 3시경에는 적 진지 50m에 다다라 일제히 수류탄을 던지면서 돌격을 감행하려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다가 가자 지형지물을 교묘히 이용하여 구축된 적의 거점은 맹렬한 폭격에도 크게 타격을 받지 않았는지 기관총이 일제히 불을 뿜기 시작하고 잠시 동안 침묵을 지키던 좌우측 방의 적도 또다시 측면 사격을 가해왔다. 그러나 우리중대가 희생을 무릅쓰고 정상 20m전방까지 돌진 하였을 때, 적의 방망이 수류탄 세례를 받게 되자 그만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여기저기에 서 수류탄과 지뢰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중대장은 도저히 이대로는 공격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일단 철수명령을 내렸다. 나는 김 상사에게 부상자를 끌고 내려오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나는 지뢰에 발목이 끊어져 피를 줄줄 흘리고 있는 신 이등병을 질질 끌고 남쪽 차폐지역으로 철수하였다. 신 이등병은 발목 이 달아난 상태에서도 신음소리도 내지 못하고 "소대장님 감사합니다. 소대장님 감사합니다" 라는 소리만 연달아 해댔다. 나는 차마 그 소리 때문에도 그를 데리고 가는 것을 포기할 수 없어서 죽을힘을 다해서 산밑으로 끌고 내려왔다. 소대를 파악해 보니 2명이 전사하고 9명이 부상을 당해 소대병력의 1/3이 희생된 상태였 다. 부상병 중에는 김 이병이 대퇴부에 살점이 떨어져 나가 왼쪽 다리가 덜렁거리고 출혈이 심하여 신음하고 있었고, 이 이병은 가슴에 총상을 입고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부상을 입 은 내 부하들이 처절하게 울부짖으며 죽어가고 있는 소리를 듣고 보니 나도 모르게 적에 대 한 증오가 사무치고 눈에는 핏발이 섰다. 지금 생각하면 아마도 사람들이 그처럼 피를 보기 때문에 지옥 같은 전쟁터에서 전쟁을 계속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든다. 위생병과 김 상사와 나는 대충 대충 가지고 있는 압박붕대로 응급처지를 해서, 자기 발로 걸을 수 있는 부상자들은 대대 구호소로 내려보내고 중상자의 후송방법을 강구했다. 우리 병사들은 공포의 도가니에 빠져서 사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져 꼼짝도 하려하지 않았다. 나 역시 빗발치듯이 날아오는 기관총탄과 포화 속에서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었지만 내가 병사들과 달리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장교의 긍지와 명예를 지켜야 된다는 사관학교 의 정신교육이 아니었던가 싶다. 생사의 기로에 선 전쟁터에서 그 장교의 긍지와 명예가 무 엇이기에 그것이 힘이 되고 지켜지는 것이었을까? 나는 맥을 놓고 있는 부하들을 격려하면 서 나 자신도 스스로 힘을 내려고 애를 썼다. 밤 11시가 되어서야 노무자들이 지고 온 주먹밥과 탄약이 도착하여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었는데 소금을 바른 주먹밥이었지만 그대로 꿀맛 같았다. 아마도 언제라도 배고픈 자에게 주어지는 음식의 맛은 진수성찬에 못지 않을 것이다. 6.25전쟁 기간동안에 노무자들은 포탄이 떨어지는 일선에서 무거운 보급품을 등에 지고 나 르고 돌아가는 길에는 중상자들을 후송하는 일을 했다. 그들은 그 날 저녁 우리에게 밥과 탄약을 운반해온 것처럼 총을 들고 직접 싸우지 않는다는 것뿐이지 전투요원들에 못지 않게 위험부담을 안고 고생을 했다. 그들은 대략 군인들의 형이나 아버지 벌되는 40-50세의 나이 로 노무지원을 위해 징집되어 온 사람들이었다. 실제로 노무자들은 전투 중에 많은 희생자 를 내면서도 군인과 달리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6.25전쟁의 숨은 공로자들이며 희생자들 이었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들에 대하여 미안스러움과 공로를 잊을 수가 없다. 사단장은 35연대의 공격이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진전을 보지 못하자, Hays방어선으로 진 출한 36연대 의 주력을 투입하여, 김일성 고지(1211고지) 일원을 남북으로 협공(挾攻).함으 로서 일격에 목표를 탈취키로 결심하고 요지 다음과 같은 사단 작전명령 제53호를 하달하였 다. 1. 사단은 1211고지를 계속 공격, 탈취하려한다. 2. 36연대는 9월20일 0400시를 기하여, 2개 대대로서 가칠봉 동북쪽으로 우회 1211고를 공격하라. 남은 1개 대대로서 가칠봉 이서의 Hays선 방어진지를 확보하라 3. 제35연대는 계속 1211고지를 공격하라 4. 제27연대는 현 임무를 계속하라. 5. 공병대대는 9월20일 0400시를 기하여, 제35연대 정면의 적의 특화점(特火點)을 파괴하 여 연대의 공격을 지원하라. 6. 제26포병대대는 사단을 일반지원 하라. 7. 사단 CP는 야촌리에 위치한다. 사단 작정명령에 따라 우리연대(35연대)는 9월20일 0400시를 기하여 다시 전날과 같이 일제공격을 시작하였고 우리중대도 최 일선 공격부대로 진격하였다. 적은 일제공격을 예측 하였음인지 전날보다 더욱 맹렬한 포병지원 밑에 정면과 좌우의 3면에서 전 화력을 집중하 여 우리의 돌진을 저지하려고 하였다. 우리가 움직일 때마다 토치카에서는 기관총탄을 퍼부 어 댔다. 설상가상으로 아군의 집중된 포격 속에서도 터지지 않고 있던 대인지뢰까지 가끔 씩 터지고 적의 박격포 탄이 우리 주변에 사정없이 떨어져 도저히 전진할 수가 없었다. 사방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적잖은 희생이 발생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 다. 나는 소대의 선두에서 전진하였지만 소대원들이 뒤 처져 움직이려는 기미가 없었다. 나 는 선임하사관 김 상사를 불러서 소대원의 후미에서 독전하도록 지시하였다. 나는 "움직이지 않으면 다 죽는다! 앞으로 전진하라!"라고 목청이 터지도록 외쳤다. 그러나 그렇게 소리를 지를 때만 조금 움직이는 듯하다가 다시 전진은 멈추는 것이어서 참으로 답답하기 그지없었 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 우리소대 뿐이랴? 제2 및 3소대는 물론 제6중대도 고전하고 있었 다. 문제는 그토록 맹렬한 공중폭격과 야포의 집중 포격에도 끄덕하지 않는 토치카와 엄체호 들이었다. 대대장은 토치카를 파괴할 대책으로 75mm 무반동총을 집중해서 운용하여 적의 기관총 토치 가의 총 안구에 대한 사격을 하도록 하였으나 총 안을 길게 아래로 덮고 있는 총안 덮게 때문에 총 안구 속으로 포탄을 명중시키기는 좀처럼 어려웠다. 대대장은 아울러 공병 파괴 반을 포함한 특공 조를 운용하기로 하였다. 대대 특공조의 전 진과 우리 공격부대의 전진을 위하여 연막차장을 실시하니 최대한 신속히 전진하여 돌격선 상에 접근, 특공 조를 엄호지원하고 토치카가 파괴되는 즉시 돌격하라는 중대장의 지시가 무전기를 통하여 왔다. 잠시 후 연막탄이 낙하하면서 연막차장이 이루어지고 다행하게 바람 이 우리에게 유리하게 불어 주었다. 그러나 시계가 차장 되었음에도 우리의 정면에 상하좌 우로 배치된 4개의 기관총토치카로부터는 더욱 맹렬한 최후저지사격이 가해졌다. 우리는 희생을 무릅쓰고 필사적으로 전진하여 돌격 선으로 전진하였으며 특공조가 토치카 2개를 파괴하자 우리중대도 일제히 돌격하여 2차로 토치카 2개를 파괴하고 우리는 드디어 목표 1을 점령하였다. 고지를 점령하고 나니 마치 온 세상을 얻은 것 같아 더 이상 아무 것도 바랄 것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흥분된 감격에 이어 슬픔과 울분이 뒤따라 뒤범벅이 되어 흐르는 눈물을 주 체할 수가 없었다. 아! 아! 정말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르고 빼앗은 고지인가? 흥분된 감정 을 억제하고 우선 적의 역습에 대비하기 위하여 소대를 재편성하여 배치하니 나를 포함하여 우리소대의 남은 인원이 14명뿐이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분대장 2명이 부상을 당해 후송 된 것이었다. 나는 부상병부터 찾아 후송하라고 지시하고 교통호에 뛰어들어 연결된 교통호를 이리저리 수색했다. 배가 터진 시체, 머리가 반만 남은 험상궂은 시체, 불에 타서 검게 그을린 시체들 이 여기 저기 널려져 있었다. 보기에도 꿈직한 시체더미 사이를 헤집고 다니려니 정말 이것 이야말로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그것들은 대부분이 아군의 공중폭격으로 살상된 적의 시체 들인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교통호를 수색하면서 전투를 치르는 장교로서 내가 이상하게 생각된 것은 이렇게 사상자가 많은데 어떻게 그렇게 끝까지 맹렬하게 아군에게 기관총을 퍼부으며 방어를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었다. 그러나 토치가 안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그 의문이 풀릴 수가 있었 다. 각 총 안에 배치되어 있던 기관총의 사수와 부사수의 발목이 쇠사슬로 묶여져 도망할 수 없도록 해 놓은 것이었다. 나는 이 광경을 목격하는 순간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것 같아 "이 개만도 못한 놈의 새끼들! 세상에 아무리 전쟁이라지만 이럴 수가 있나?"하는 욕설이 저 절로 튀어 나왔다. 정말로 인간을 단순히 하나의 물질로 보는 유물론자들이 아니면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토치카의 총안도 예상했던 것처럼 1개가 아니 라 3개나 되어 전면에 기관총이 2정, 측방에 각각 1정식 배치되어 있었다. 군관 1명과 여자 군인 시체도 있는 것으로 보아 지휘자와 간호원이 아니었는가 싶었다. 우리 대대를 후속 하던 제1대대가 목표 2에서 우리를 앞질러서 아군의 최종 공격 목표인 목 표 5를 공격하게 되어 우리는 목표 2에서 적의 역습에 대비하고 제 1대대의 공격을 지원하 도록 임무가 전환되어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목표 5 일대의 적의 저항은 필사적이어서 제1대대의 공격도 진전이 없었고 우리가 있는 일대에도 적의 포탄이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적이 구축해 놓은 덮개가 있는 유개 호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거의 피해가 없었지만 호 속에 널려져 있는 적의 시 체들의 썩는 냄새 때문에 구역질이 나서 견디기가 힘이 들었다. 시체 중에는 이미 상하기 시작해서 구더기가 끓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인민군은 전사자의 시체도 수습처리하지 않는 듯했다. 선임하사관 김 상사는 담배를 피우면 역겨운 냄새를 어느 정도 이겨낼 수 있다면서 필터가 없는 미제 담배 카멜(Camel)을 권하였다. 이것이 내가 담배를 피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으니 담배를 배운 동기치고는 매우 절박한 것인 셈이다. 그 당시 한국군에게는 화랑담배 외에도 양담배가 1주에 1갑씩 지급 받은 것 같았다. 나는 철모를 벗어 깔고 않아서 난생 처음으로 어색하게 담배를 한대 피어 물었다. 그 때 중대장이 어느 새인가 내 옆에 와서 내 어깨를 두드리면서 "한 소위! 수고가 많았 어." 하는 것이 아닌가? 보통 때 같으면 상관이 말을 거는데 당연히 일어서서 무어라고 대답 을 해야 했겠지만 나는 한 마디도 할 기력이 없어 대답 대신 담배 한 대를 내 밀어 중대장 에게 권했다. 중대장은 "한 소위! 그래도 우리는 살아남았소. 2소대장 김 극진 소위는 전사하고, 3소대장 홍 득기 소위는 부상을 입어 후송되었소. 한 소위가 소대장과 병력이 보충될 때까지1, 2소 대를 통합하여 지휘해 주어야겠소. 부탁하오. 그리고 한 소위의 훈장을 대대에 상신하겠소." 하고 자리를 떠났다. 그 순간에 나는 중대장이 '훈장 상신이 어떻고'하는 소리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중대장은 나를 격려하는 뜻에서 한 소리겠지만 나는 오히려 동료 소대장이 전사하고 부상을 당해 후송되는 판에 훈장 이야기를 하는 중대장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중 대장의 말대로 당장은 내가 이 고지탈환의 지옥 속에서 소총소대장으로서 혼자 살아남은 것 이 분명하지만 다음 순간에 어떻게 될지 누가 알 것인가? 전쟁터에서 필연코 죽음의 차례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어떻게 목숨에 대한 미련 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체념을 하면서도 죽기에는 너무나 아쉬운 젊은 나이가 아닌가? 단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오로지 병신이 되는 한이 있어도 부상을 당하여 후송 되는 길밖에 없었다. 차라리 부상을 당해 후송된 3소대장이 부럽게 생각됐지만 나에게는 그 런 행운도 오지 않았다. 이 시점에서 내가 의지하고 믿을 대상은 하나님밖에 없는데 하나님은 정말 나를 버릴 것인 가? 하는 의문도 들고 아마도 인간들은 이래서 신을 믿는 것인가 보다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다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오래 전에 담배를 배운 사람처럼 다시 담배를 피기 시작했 다. 첫 담배가 그대로 줄담배가 되어 버린 것이다. 담배연기 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르 기 시작해서 꼬리에서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부모님과 동생들 친구들 그 중에서도 나의 첫 사랑이라 할 수 있는 류 미사가 몹시도 그리워졌다. 이때 "소대장님!" 하고 선임하사관 김 상사가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김 상사가 인민군 포 로 2명을 이끌고 내 뒤에 서 있었다. 그들의 얼굴을 보니 둘 다 나보다도 더 어린 16 또는 17세 정도밖에 안되어 보이는 앳된 소년들이었다. 그들은 전혀 조금 전까지 우리를 향하여 총을 쏘아대던 적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들 또한 지금 이 순간까지 얼마나 고통을 겼었겠는 가? 그런데도 그들은 마치 전쟁놀이를 하다 붙잡힌 아이들처럼 내 앞에서 미소에 가까운 표 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표정에서 동정을 바라는 뜻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는 동안 만주에서 같이 지나던 나보다 한 살 더 많은 고종 4촌형이 떠올랐다. 분명 그도 살아 있다면 인민군이 되었을 것이고 지금은 나와 적이 되어 서로 총을 겨누고 있는 처지였 을 것이다. 나는 선임하사관에게 사관학교에서 배운 대로 포로를 제네바협정에 따라서 후송하라고 제 법 아는 척하면서 각별히 지시했다. 아니, 실제 내 마음속으로 나는 다음 순간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이제 일단 죽음의 구렁텅 이에서 벗어나게 된 그들만이라도 아무쪼록 안전하게 잘 후송되어 살아남기를 빌었다. 인간이 지탱할 수 있는 정신적 육체적인 한계를 넘어서는 극한 상황이 되풀이 된지가 벌써 열흘이 넘었나 보다. 세수는커녕 수염을 깍지 못하여 짐승 같아 보이고 군화를 벗지 못해 발을 씻을 수가 없어 생기기 시작한 무좀으로 발은 미칠 듯이 근지럽고 전투복은 부상병을 껴안느라 묻은 피와 땀과 흙으로 뒤범벅이 되고 여름철에 깨끗한 물을 마시지 못해 배속이 탈이 나서 설사가 질금질금 나와 팬티는 똥물로 범벅이었다. 내 몸에서 풍기는 악취는 내가 맡아도 코가 문드러질 지경이었다. 하루에 소금이나 새우젓이 발린 주먹밥 세 덩이와 건빵 한 봉지로 때울 뿐만이 아니라 잠 까지 제대로 못 자서 그렇지 않아도 비쩍 마른 내가 마치 명태 같이 야윈 모양은 말이 아니 었다. 얼마나 잠이 부족했던지 나도 모르게 스르르 앉아서 잠이 들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1발의 M-1소총 소리가 들려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나 총소리 나는 곳으로 달려갔더니 윤 이등병이 왼손바닥에 총상을 입고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적의 총격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해란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있는 곳이 유개교통호 이기 때문에 적의 유탄도 날아들어 올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윤 이등병의 총상을 보니 손 바닥에 검은 가스가 묻었고 손등은 크게 으깨져 있는 것이 자해로 인한 총상이 틀림없었다. 가뜩이나 자해 자가 많아져서 총상으로 뼈를 다치지 않은 경상자들은 일단 조사를 하고 나 서 전투 중에 부상으로 밝혀지면 후송을 하고 자해로 밝혀지면 사단 군법회의에 회부되는 상황인 판이었다. 자해를 하려면 남들처럼 요령 것 수통이나 신발바닥을 대고 총을 쏘아서 흔적을 남기지 말 아야 했었다. 나는 그의 엉성한 자해 극을 보고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한편으로 가엽기 그지 없었다.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나도 장교만 아니고 사병이었다면 저렇게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비겁한 자해 대신 자살을 하려고 마음먹었던 것을 생각하니 나는 윤 이등병의 행위에 대해서 처벌을 해야겠다는 마음보다는 동정이 앞섰다. 더욱이 윤 이등병은 이미 입대 전에 결혼을 해서 노모와 처 그리고 아들까지 있는 처지였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해서 서울의 남대문시장 건어물가게 점원으로 있다가 입대하였다고 하였다. 나는 윤 이등병의 손바닥에 묻은 가스를 닦아서 자해자로 보고하지 않고 부상자로 보고를 해서 후송시켰다. 나는 그가 살아서 노모와 처자식에게 돌아가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그 러나 그 후에 그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알 수가 없는 일이다. 3. 수류탄 파편 우리 제2대대를 앞질러서 목표 5(김일성 고지 정상)를 공격하던 제1대대는 적의 완강한 저 항에 부딪혀 전진하지 못하고 우리가 있는 진지까지 철수하였다가 다시 야간공격을 시도하 였으나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연대장의 명령에 따라 이번에는 우리 대대가 다음 날 새벽 0400시를 기하여 목표 5에 대 한 공격을 다 시 개시하였다. 우리는 목표의 8부 능선에서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돈좌 되었으나 연대장의 강력한 지시로 철수를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개인호를 파고 들어가 돌격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자 적은 기관총이나 소총사격의 효력이 없게 되자 이번에는 방망이 수류탄을 까서 밑 으로 굴려 내려보내는 것이 아닌가? 굴러내려 오다가 터지는 것도 있고, 개인 호 속으로 굴 러 들어오는 것도 있었다. 각자가 야전삽을 펴서 갖고 있다가 개인호에 굴러 들어오기 직 전에 받아서 뒤로 내 던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밖으로 조금만 고개를 내 밀면 적 의 조준사격이 날라 왔다. 그야말로 완전히 목숨을 건 테니스 경기인 셈이었다. 우리는 호 속에서 꼼 짝을 할 수 없어서 소변도 호 속에서 철모를 벗어 싸서 밖으로 버릴 수밖에 없었다. 야전에서 철모는 밥이나 국을 끓여 먹는 식기로 대소변을 받아 보는 요강으 로 세숫물을 받아 세수하는 대야로 물건을 담아 나르는 기구로 깔고 앉는 의자로 다양한 용 도로 쓰였다. 우리는 호 속에서 무려 7시간 이상을 대치하다가 저녁 해가 질 무렵 목표 3 및 4를 공격하 던 제3대대가 목표 5의 우 측방의 기관총 진지를 파괴하고 하였다. 드디어 우 측 방의 기관총사격이 정지되었다. 어둠이 다가와서 우리들도 더 이상 그곳에서 쪼그려 앉아서 적의 방망이 수류탄을 받아넘길 수도 없는 처지였다. 바로 이때 중대장의 돌 격준비명령이 하달되었다. 나는 그 순간 사관학교 정신훈화시간에 들은 이순신 장군의 필사즉생(必死則生)란 어구가 떠올렸다. 아울러 지휘관이 먼저 솔선수범을 보여 신에게 생명을 위탁하는 자세를 보여야 부하들이 지휘관을 신뢰하고 따른다는 것을 생각했다. 분명한 것은 내가 특별히 다른 사람 보다 용감해서가 아니고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모두가 살기 위해서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내가 지휘하는 1. 2소대원에게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하여 칼빈 소총으로 공포를 쏘았다. 그리고 돌격준비명령을 하달했다. 나는 "돌격 앞으로!" 라고 소리를 지르며 호를 박차고 먼저 앞으로 뛰어 나갔다. 우리 소대 는 나의 외침에 호응하여 용기백배해서 돌격에 나섰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몽둥이로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이 느끼면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다음 순간 나의 연락병 김 옥순 일병이 "소대장님 ! 소대장님 !"하고 외치면서 내 발목을 잡아끌어 파 놓았던 개인 호 속으로 나를 끌어넣고 무전기로 중대장에게 "제 1소대장이 부 상당했습니다."라고 보고하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진한 액체가 내 오른쪽 눈 위에서와 목에서부터 등으로 흐르는 것을 느껴져서 눈을 닦으려고 손을 얼굴에 대고 보니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있었다. 나는 소스라쳐 놀라서 그 때 부터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김 일병은 응급처치를 할 겨를도 없이 피를 줄줄 흘리는 나를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산밑으로 밑으로 끌고 내려와 대대 구호소까지 나를 후송시켜 주 었다. 그러나 나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인지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그 몽롱한 속에서도 나는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썼다. '아! 아! 이제 내가 정말 죽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순 간 제일 먼저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내 인생이 이렇게 짧게 끝나는 것인가?' 라고 생각 하니 '아직 숫총각인데 장가도 한번 못 가보고 죽는구나!'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20년도 안 되는 짧은 인생살이에서 기억나는 모든 것들이 주마등과 같이 스치고 지나간다. 다음 순 간 나를 살려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하나님을 떠올려 보았다. 어머니가 부산 역 플랫 홈 에서 손수건을 흔들면서 '인수야! 너는 결코 죽지 않아. 하나님이 너를 지켜 주실 거야!'하고 떠나가던 군용열차를 향하여 소리를 지르던 모습도 생각났다. 나는 그 순간 나름대로 하나 님께 "하나님! 한번만 살려주시면 남은 생애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겠습니다."라고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이것은 아마도 기도라고 하기보다는 절망에서 부르짖는 몸부림이라 고 해야 옳을 것이다. 내가 이동외과병원에서 눈을 떴을 때는 부상 당한지 만 48시간이 지난 후였는데 그 동안 진통도 없이 너무나 편안하였다. 아마도 대대 구호소로부터 맞은 모르핀주사(마약 진통제)와 수술할 때의 마취 탓 일수도 있지만 그동안 너무나 여러 날 잠을 못 자서 잠에 떨어진 탓일 수도 있다. 여하간에 나는 부상부위의 수술을 하는 것도 의식치 못하고 48시간 이상을 잠을 자다가 깨어난 것이었다. 내가 호를 뛰쳐나가 돌격하는 순간에 굴러 내려오는 방망이 수류탄이 터져 오른쪽 눈썹 속 의 뼈에 0.7cm의 수류탄 파편이 박히고 또한 오른쪽 목뒤부분에 1.2cm의 파편이 박혔던 것이다. 두 곳의 상처부위 모두가 아주 위험한 부위였으나 천만다행으로 더 이상 깊지가 않 아 수술을 해서 파편 쪽을 쉽게 끄집어 낼 수가 있었다. 그러나 후송도중 응급 처지를 하지 못해서 출혈이 심하여 거의 가사상태로 이동외과병원에 후송되었다는 것을 나중에 간호장교 에게 듣고 알았다. 의식을 되찾고 처음으로 간호장교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었을 때 마치 수십 년 간 산골에 혼자 살던 총각이 처음 여자 목소리를 듣는 것 같아 천사의 목소리가 따로 없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옆에서 고막을 갈기갈기 찢어 놓는 것 같은 비명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옆에서 듣고 있는 것 만해도 너무나 고통스러웠던 비명소리도 점점 작아지더니 얼마 가지 않아서 들리지 않았다. 나는 얼굴을 붕대로 칭칭 감아 맸기 때문에 머리를 돌릴 수가 없어서 귀를 기울여 숨소리를 들으려고 애를 썼지만 분명히 숨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나는 지나 가는 간호장교를 손짓으로 불렀다. 간호장교가 그를 들여다보더니 막 숨을 거두었다고 알려 주었다. 새벽 2시경 처량한 울음소리가 천막으로 된 병실 끝에서 들려왔다. 양다리가 절단된 한 부상자의 처절하게 슬픈 울부짖음 이였다. 다음날 아침 일찍 나는 들것에 실려 앰뷸런스로 춘천 역에 도착하였는데 기차역 광장에는 수많은 부상자들이 들것에 실린 채로 넓은 역 광장을 메우고 있었다. 우리 부상자들은 환자 수송 특별열차 편으로 경주 18육군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경주 18육군병원은 경주의 어느 초등학교의 교실을 병원으로 쓰고 있었는데 나는 장교 병 실의 침대에 눕혀져서 위생병들에 의해 목욕을 시키고 옷도 갈아 입혀졌다. 도대체 얼마 만 에 천장이 있는 건물에 누어 보는 것인지? 한 3년 이상은 된 것 같다. 병실에 누워 하늘이 아니라 천장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마음과 육신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어 마치 천당에 온 것 같았다. 이틀 후 나 보다 먼저 부상당해 후송되었던 3소대장 홍 득기 소위를 병실에서 만나게 되었 는데 홍 소위는 오른 쪽 다리의 총상으로 깁스를 하고 있었다. 나는 1주 후부터 기력을 회 복하여 거동을 할 수가 있었다. 병원의 식사는 생선 갈치나 오징어 국이었는데 건더기가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생선이 목 욕을 한 국물뿐이었다. 그래도 전쟁터의 식사와는 비교 할 수 없이 좋은 편이었지만 턱없이 야윈 나의 영양실조 상태를 회복하는 데는 부족하였다. 신통하게도 내 개인 사물이 들어 있 는 나의 똥 가방이 주인을 잃어 버려지지 않고 이곳까지 나를 따라와 주어 나는 똥 가방에 있는 약간의 돈으로 영양을 보충할 수 있는 미제 계란가루와 마가린 버터 통조림을 사서 국 에 넣어 먹었다. 전선의 상황이 계속 급박하게 돌아가 많은 전상자가 속출하자 육군본부에서는 각 병원에 회복된 환자를 빨리빨리 퇴원시키도록 감찰을 했다.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 않은 환자도 강 제로 퇴원시켜 원대복귀 시키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모든 환자들은 당연히 입원기간이 곧 생명의 연장기간이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하루라도 더 병원에 입원되어 있을 수 있을 가를 궁리하게 되었다. 수요가 있는 곳에 반드시 공급이 따르게 되는 시장경제의 원칙에 따라서 환자들의 절박한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공급 현상이 나타났는데 그것은 무기 밀매의 방법이었다. 보통 장교 들이 전쟁터에서 인민군 장교들이 차고 있는 때때(TT) 권총이라고 불리는 소련제 권총을 획 득하면 노획무기로 보고하지 않고 가지고 있다가 부상을 당했을 때 병원의 군의관에게 권총 을 주고 퇴원을 연장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때때 권총은 귀국하는 미군들이 기념으로 가져 가기 위하여 구입하기 때문에 후방에서 현금화하는데 손쉬워 꽤나 인기가 있었다. 나에게도 때때 권총이 있었으면 군의관들과 흥정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결국 나는 그것이 없어서 상처도 완전히 아물지 않고 기력도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상태에서 10월 중순 3주만 에 강제 퇴원을 당하였다. 의료행정 뿐만 아니라 전쟁 속에서는 온통 모든 것이 불합리한 것이었지만 사느냐 죽느냐 하는 갈림길에 서 있는 나로서는 원망의 대상이 당장 눈앞에 있 는 군의관밖에 없었다. 또 다시 전방으로 가는 더블 빽을 싸면서 '언젠가 내가 살아서 의사 놈들을 지휘하게 될 경우가 생기면 손을 봐 주겠다'고 다짐했다. 1951년 10월 17일 나는 바로 내가 부상당했던 그 전선에서 여전히 김일성 고지 탈환전투 를 계속하고 있는 제5사단 35연대로 원대복귀 하게 되었고 나는 제1대대 3중대 부중대장 겸 화기소대장으로 보임되 었다. 또 다시 죽음이 기다리는 사지(死地)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암담하기 그지없는 내 심정 은 마치 소가 도살장에 끌려들어 가는 심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어차피 죽을 바에야 '용감하다는 소리나 듣고 죽자' 라는 자포자기의 심리상태에 빠지게 되 었다. 이 무렵 우리 사단은 10월14일의 공격작전으로 양구-사퇴리 도로를 감제하는 841고지 (사 퇴리 동남쪽1.5km)를 탈취함으로서 전투지경 내의 요충인 1052고지(가칠봉 서남쪽 2km) 공 격의 기틀을 마련하 고 Hays선을 방어하면서 1052고지-1211고지(김일성 고지)에 대한 재탈 환을 위한 공격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이랄 가, 육군본부 작전지시에 따라 우리 사단은 10월 20일 1800시 부로 미제 10군단으로부터 배속이 해제되어 한국군 제3사단에게 작전임무를 인계하고 우리는 다음 날 양양으로 이동하여 FTC교육을 받게 되어 잠시나마 최전선의 전투임무에서 비껴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상급부대의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있는 처지가 못 되는 초급장교인 나는 소대장으로서 전투에 참가했었지만 내가 군에서 고급장교가 되어 가면서 배운 전술교리를 살펴 볼 때 그 당시의 전투가 너무나 무모한 전투가 아니었나 싶은 의문을 품지 않을 수가 없다. 김일성 고지(1211고지)전투는 1951년 9월 4일-10월 14일까지 여섯 차례의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여 세 번 그 정상을 탈취하는데 성공하였으나 그 때 마다 적의 거센 역습으로 용전분 투의 보람도 없이 후퇴해야만 했던 전투였다. 나의 소견으로는 첫째: 9월5일0800시를 기하여 27연대의 1개 대대로 최초 공격을 개시하다가 결국 전 사단 이 투입되는 전투를 하게 된 것이나 적의 방어진지 구축상태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공격작전을 실시한 것은 기본적인 적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고 둘째: 기동공간이 좁아서 1개 대대밖에 기동할 수 없는 곳에 많은 병력을 투입함으로서, 포 화에 많은 손실만을 보고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으며 셋째: 어렵게 목표를 점령하고도 역습에 대한 대비를 제대로 하지 않아 고지를 확보하지 못 함으로서 몇 시간만에 다시 빼앗기고 또다시 고지의 쟁탈전을 계속하여 많은 사상자 를 속출케 하였고 넷째: 근접전투에서 많은 희생이 따른다고 하겠지만 지휘관의 작전 미흡은 없었는지 냉정하 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본다. 4. 전쟁터에서의 군상들 1951년 10월 21일부터 우리 사단은 한국군 제3사단에 작전임무를 인계하고 강원도 양양의 회용리로 이동하여 FTC 교육훈련을 받게 되었다. 중대단위로 땅을 파서 호를 만들고 개인용 판초우의로 지붕을 만들어 숙영지를 만들었다. 미군이 작성한 훈련계획에 따라 일일 6시간 씩 훈련을 실시했다. 미군 하사 1명이 고문관 으로 중대마다 나와 있었는데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한국군의 중대 훈련에 미군 하사가 고문을 한다니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전투기간 중 최근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해서 후송된 사람들의 몫까지 보급품을 그대로 수 령해서 부대마다 잉여물품들이 남아돌았다. 남아도는 쌀은 부대외부로 유출하여 팔아서 장 교와 하사관들에게 가족생계보조비로 조금씩 나눠주었고 사병들에게는 일본에서 만든 별 사 탕이 들어 있는 건빵 50봉들이 한 상자씩을 나누어주었다. 저녁때가 되면 하사관들은 술타령이 벌어졌고 사병들은 건빵을 놓고 노름들을 했다. 대대 주보(PX)에서는 화랑 위스키와 마른 오징어를 팔았는데 화랑 위스키는 화학 주로 많이 마시 면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것인데 그것을 알면서도 마실 것이 그것밖에 없어서 열심이들 마 셔댔다. 그러나 죽음의 고비를 수없이 넘기고 또한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 들의 행동이다 보니 아무도 말리려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 중대장 전 중위는 방위군 출신으로 술을 너무 좋아해서인지 좀 주책이 없었고, 인사 계 박 특무상사는 우리 중대의 터주대감으로 중대에서 일어나는 문제점이나 모르는 것을 해 결하는 해결사 노릇을 했다. 그는 전쟁이 거의 끝이 나가는 1953년에 장교로 임관되었다. 중대본부 요원 중 서무계 김 세직 하사는 고려대학 재학 중에 입대를 했고 광주 출신 보급 계 박 성수 하사, 그리고 전남 여천 섬 출신인 병기계 배 상필 하사가 기억난다. 소대원들의 약 70%가 문맹자여서 나는 매일 저녁 글을 모르는 소대원들의 편지를 대필해 주느라고 바빴다. 나 혼자서 대서방 노릇만 해서는 도저히 안 되겠다고 생각해서 문맹자들 을 대상으로 한글 교육을 시작했다. 사병들도 열심히 배워서 양양을 떠날 무렵에는 그들이 받는 편지는 스스로 읽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들은 나에게 감사의 표시로 항상 자기 의 건빵 중에서 몇 개밖에 나오지 않는 별 사탕을 안 먹고 수업료 대신 전부 나에게 가져다 주었다. 한편 사단 정훈부에서는 2주에 한번 정도 16mm영화를 대대단위로 순회하면서 상영해주기 도 하고 연 대에서 연예인으로 구성된 위문공연단이 와서 공연을 하던 기억이 난다. 어느 날 오후에 중대장이 소대장들을 소집하여 도장이 찍힌 표 한 장씩을 주면서 오늘 저 녁에 즐기려 가자는 것이다. 나이가 나보다 몇 살 씩 더 많은 세 사람의 소대장들은 좋아하 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그 쪽지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듯했고 나만 몰랐던 것 같았다. 저녁 에 중대장을 따라서 1.5km 떨어져 있는 연대본부 지역에 도착해 보니 24인용 천막이 4개가 나란히 처져 있었는데 3개 천막에는 사병들이 줄을 서 있고 1개 천막에는 장교들이 줄을 서 있었다. 사병들은 안을 기웃거리며 안에다 대고 "빨리 나와! 빨리 나와"하며 소리를 질러 대 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그곳이 어떤 곳인가를 알 것 같았다. 천막에 들어가서 여자에게 표를 주고 10 분간 즐기고 나오는 것이다. 그 순간 나는 부끄럽고 창피한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로 호기 심이 일기도 했다. 그러나 도저히 천막 속으로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아 남들이 눈치 체지 않게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내가 남들 보다 특별히 순진해서라기 보다는 그 동안 받아온 기독교 교육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당시 하급 장교였던 나로서는 위안부 문제가 어떻게 운용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나는 지금까지도 이 문제를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위안부가 전쟁을 하는 장병들의 사 기앙양 방책으로 운영되었지만 일본 군대의 잔재인 것만은 틀림이 없었던 것 같다. 다른 점 이 있다면 일본군은 식민지의 여성들을 강제로 동원했고 한국군은 아마도 직업적으로 몸을 파는 매춘업자들과 계약을 맺은 상업적인 관계가 아니었을까 짐작될 뿐이다. 비록 전시이고 강제성은 없었다고 하더라도 군대가 매춘 사업을 운영하였다는 것은 부끄러 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세계의 많은 전쟁사를 통하여 볼 때, 인간이 극한상황에 처해진 전쟁 속에서라도 인간의 본능인 성 문제의 억제는 어려웠고 그 문제로 야기되는 영향은 전쟁과 전쟁을 치루는 군인은 물론 민간인들에게도 지대하여 이 문제를 어떻게 슬기롭게 해결할 것인가를 고민해 왔다는 점을 감안할 때 우리들의 깊은 이 해가 있어야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1952년 1월 중순 우리 사단이 FTC훈련을 마치고 동부 전선에 배치된 한국군 제11사단과 교대하여 우리 중대는 고성 바로 남쪽 해금강 지역 맨 동쪽 바닷가에 배치되었다. 적 진지 와는 약3km 이상 떨어져 있어 거의 접적 전투가 벌어지지 않아 우리는 바닷가 갯바위에 붙 어있는 김, 미역, 홍합, 굴 등 싱싱한 해산물을 따서 먹을 수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홍합을 따서 구어 먹던 맛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 때는 해금강이 이름 있는 곳인 줄도 모르고 단지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구나' 하는 생각 만 했었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나는 일찍이 우리나라 제일의 명소에서 전쟁통에 쇠진한 기력을 많이 회복한 휴양을 한 셈이었다. 우리가 배치된 진지에서 후방으로 약 2km 지점 떨어진 바닷가 솔 나무 지역에는 한국군 전차중대가 주둔해 있어서 든든한 생각이 들었다. 2월 중순 또다시 우리 대대는 고성군 현내면 하산복으로 이동하여 주 저항선에 배치되었 다. 방어진지 지대의 높이는 해발 1,000m이상이 되는 곳으로서 약 4km 전방에 남강이 흐르 고 2km 전방에는 중대단위의 전초진지를 설치한 거의 난공불락의 진지였다. 적은 가끔 우리 의 전초진지를 야간 기습하는 정도였고 아군도 적 진지를 탐색하고 포로를 잡기 위한 수색 정찰을 하는 정도의 상황으로 대규모의 전투는 없었다. 그러나 진지지대가 높아서 중대본부로부터 진지까지 올라가는데 약 4시간 이상을 눈으로 덮인 산을 설치된 로프를 잡고 올라가야만 했다. 따라서 노무자들이 보급품을 수송하기 위 하여 매일 등짐을 지고 새벽에 중대본부를 출발하여 점심 때 무렵 도착했다가 다시 중대본 부로 내려가곤 했다. 그래도 진지 내 숙소는 전부 온돌을 놓아 따듯하게 지내고 있었다. 아군이 가끔 적진에 대 한 수색정찰을 실시하다가 남강 남쪽 강가에 있는 민가들에서 혼수 감으로 마련해 놓은 고 급 천과 곡식들이 담겨있는 항아리가 땅에 묻혀 있는 것을 발견하여 가지고 와서 천은 머플 러를 만들어 목에 두르고 콩은 볶아서 병사들이 야간에 보초를 설 때 간식으로 나누어주었 다. 이 무렵 군인으로서의 내 상식으로서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일들을 보게 되 었다. 대대장 김 소령은 여자에게 군복을 입혀 자기 Jeep차와 말에 태워 전방 방어진지의 호에까 지 데리고 다녔다. 일명 후생사업이라는 명목으로 각 중대에서 10명씩의 병력을 차출하여 산에 가서 나무를 벌목하여 숯을 구어 대대의 부식구입 트럭으로 싣고 나가 팔기도 했다. 3중대장 최 중위는 똑똑하고 용감하여 가칠봉 전투에서도 혁혁한 무공을 세워 사단에서 이 름을 떨치는 인물이었지만 성격이 잔인해서 자기의 연락병이 사소한 실수를 했다고 해서 일 선 소총병으로 쫓아내 보내는 사람이었다. 그는 중대의 보급품을 부정유출 시키다가 발각되 어 체포령이 떨어지자 월북하기 위해 전초선을 넘는 순간 공교롭게도 얼마 전까지도 자기의 연락병이었던 바로 그 병사의 총을 맞고 붙잡혀 군법회의에서 사형언도를 받았다. 그런가 하면 나의 연락병 손 희보 일병은 나보다도 7살이 더 많았는데도 나에게 어떻게나 충성을 다하는지 내가 무안할 지경이었다. 그는 봄철에 양지에서 쑥을 뜯고 산골짜기 개울 가의 돌을 뒤져 가제를 잡아 국을 끓여 나만 먹을 수 있도록 성심을 다해 밥상을 차려주었 다. 나는 이런 일들을 보면서 생사를 가늠할 수 없는 전쟁터에서 어떻게 인간이 그토록 탐욕스 러울 수 있는지 또 어쩌면 그렇게 순수 할 수 있는지 나로서는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5. 나는 장교를 싫어합니다. 5월 초순경 전방 독립전초진지에 배치된 제1중대가 적의 야간기습을 받아 10여명이 포로 로 잡혀가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상황이 벌어져 다음 날 우리 중대가 제 1중대의 독립 전초진지를 인계 받게 되었다. 중대의 탄약보급의 책임은 중대 부관인 나에게 있기 때문에 나는 탄약계 배 하사에게 부족 한 수류탄과 60mm박격포 탄을 긴급 추진보급 할 것을 지시하였지만 그 탄약들은 당일 보 급이 되지 않았다. 이튿날 탄약계 배 상필 하사가 탄약을 등짐으로 진 노무자 대열을 인솔 하고 도착했다. 나는 탄약 추진이 늦어진 것에 대해서 몹시 화가 나서 "명령지시를 왜 즉각 이행하지 않았 나? 죽여 버리겠다."라고 하면서 M-2칼빈 소총을 배 하사의 발 바로 앞에다 "드르륵 드르 륵" 연발로 쏘아대자 배 하사는 놀라서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그러나 일단 화풀이를 하고 보니 마음이 후련한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이 지나자 내가 너무 심했다는 생각이 들어 찜찜했다. 내가 화가 난 이유는 지시가 떨어졌으면 밤에라도 탄약 보 급이 추진되거나 안 되면 그에 따르는 보고가 있어야 하는데 아무런 설명도 없이 다음 날 추진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상황이 그리 급한 것도 아니었고 더욱이 전초 진지 까지 올라오는 데는 로프를 잡고 무려 6시간을 오르고 내리고 하는 급경사 지역이 많아 낮 에도 실족하면 그대로 떨어져 목숨을 잃어버릴 수도 있어서 실제로 밤에 등짐을 메고 올라 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나는 탄약을 내려놓고 중대로 돌아간 배 하사를 전화로 불러 "아까는 내가 흥분해서 지나 쳤다.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더니 그는 '괜찮다'고 응답했다. 그로부터 35년이 지난 1987년 내가 순천직업훈련원장으로 있을 때 그 당시 광주에 살고 있던 보급계 박성수 하사가 내 소식을 듣고 찾아와 반갑게 만났다. 박 하사와 옛날 6.25당 시 부대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중대 탄약계를 하던 배 하사가 이곳 순천에서 그리 멀지 않은 여수 근처의 섬에서 살고 있다고 뜻밖의 소식을 전해주는 것이 아닌가? 나는 어느 전우의 소식을 듣는 것보다도 반가워서 즉시, 전화를 해보라고 했다. 전화가 연 결되고 박 하사가 "어이! 상필 형, 옛날 우리 중대부관 한 소위님 기억하지? 내가 지금 부관 님 사무실에 와 있거든? 그럼, 전화 바꿔 줄께"하면서 나에게 수화기를 건네주었다. 나는 전 화기를 받자마자 반가운 마음으로 성급하게 "배 하사요? 아! 이거, 정말 반갑습니다." 라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상대방이 아무 응답의 소리가 없었다. 나는 혹시 그가 내 목소리를 잘 못 알아들었는가 싶어 다시 더 큰 소리로 "배 상필 씨! 나 한인수라니까요?"라고 했다. 이번에도 잠시 아무 소리가 없더니 "나는 장교를 싫어합니다." 라고 한마디만 하고는 전화를 '탁' 끊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나는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수화기를 내려놓고 깊은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나에 대 한 원한이 얼마나 크게 쌓였으면 수십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생사를 같이한 옛 전우이면서 상관이었던 나에게 그렇게 대하는 것일까? 나는 몹시도 괴로웠고 철없고 경망스러웠던 지난 날의 내 행동이 한없이 후회스럽고 부끄러웠다. 그 일이 있고 난 며칠 동안 마음도 편치가 않았고 어떻게 하면 배 하사와 화해를 할 수 있 을까 하는 것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제일 좋은 방법은 시간 나는 대로 내 편에서 배 하사를 찾아가서 다시 한번 사과를 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이 들었다. 일방적인 전화통화를 한 날로부터 2주 정도가 지난 어느 날 오후, 내 사무실 노크소리와 함께 들어온 백발이 성성하고 건장한 한 촌부가 부동자세로 문 입구에 서서 거수경례를 올 려 부치고 "육군하사 배 상필 중대부관님께 용무가 있어 왔습니다."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벌떡 일어나 그에게 다가가 그를 포옹했다. 그 날 저녁 우리는 소주잔을 기울이며 35 년 간 쌓인 회포를 푸느라고 밤잠도 제대로 못 잤다. 그 후부터 그는 나의 전우 중 가장 가까운 전우가 되어 한 가족과 같이 지났다. 추석 때마 다 나는 나의 가족과 함께 그의 집이 있는 섬을 찾아 같이 지났고 그가 순천이나 광주에 나 오면 우리 집에서 묵었다. 나는 그의 딸 결혼식 주례를 섰고 그의 아들이 직장에서 승진하 는데 도움을 주었다. 또한 그가 요청하는 도움 중 같은 중대 전우가 부상을 입고도 그 때까 지 적정한 보상 등급을 못 받아 섬에서 어렵게 노후생활을 하고 있는 김 일병과 전 일병을 도와 재판정을 받게 하여 국가유공자로 인정받도록 해주었다. 또한 자기가 후원회장으로 있 는 섬의 초등학교에 복사기가 1대만 있으면 유용하게 쓰겠다고 하는 간절한 부탁을 듣고 또 다른 나의 옛 부하였던 전라남도 교육청 이 부교육감에게 부탁하여 특별 배정해 주는 등 그 가 원하는 일은 내 힘이 닿는데 까지 최선을 다하여 도와주었다. 이제 우리는 다 70이 넘은 황혼에 접어든 노병들이지만 지금까지도 우리는 옛 전우의 정으 로 교류를 유지하고 있다. 5월 중순이 되자 육본에서 위관장교 보수교육과정인 초등군사반 입교자를 차출하라는 지시 가 하달되었다. 물론 우리 중대에서는 내가 소위 중 제일 고참이기도 했지만 나 스스로도 왠지 이 부대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입교를 자원했다. 6. 수도 고지 전투 1952년 6월초부터 나는 전남 광주에 있는 보병학교에서 위관장교 보수교육인 초등군사반 과정에 입교하여 교육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7월 달부터 전선의 상황이 더욱 긴박하게 돌 아가면서 특히 수도고지 전투가 치열해지기 시작했다는 전선소식이 전해져왔다. 8월초에 졸 업하는 우리 앞의 기수는 교육기간을 2주 단축하여 졸업식이 끝나자마자 수송기 편으로 전 선으로 초 긴급수송 배치되었다. 우리는 교육을 받으면서 '우리도 혹시 교육기간이 단축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다. 또 이번에 배치되면 어느 사단으로 배치될 것인가 하는 것이 초미의 관심 사였 다. 그러나 결국 나는 예상했던 대로 수도고지 전투를 치열하게 하고 있는 수도사단으로 발 령 받고 긴급히 부임하게 되었다. 수도 고지 전투는 1952년 7월 7일 - 10월 14일까지 4 개월간 중부전선 강원도 금성 돌출 부에 있는 수도고지(663고지)와 지형능선(612고지) 및 575고지의 3요충지에서 국군 수도사 단과 중공군 제12군 예하 제35사단이 접전을 벌인 전투였다. 수도고지는 이미 휴전협상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군사분계선을 설정하는데 있어 협상 의 주도권 장악을 목적으로 주 저항선 전방의 작전상 조금이라도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펼친 국지적인 전초거점 쟁탈전으로서 피 아 간에 필취불가실(必取不可失)의 요충지였 다. 그야말로 고지의 주인이 주야로 바뀌는 처절한 대 접전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 요도# 1 및 2 참조 작전지역의 특징은 표고 500-700m의 고지 군으로 연결된 산악지역으로서, 기복이 심한 지 세와 좌수동 일대 1km이상의 계곡, 그리고 울창한 산림은 관측(觀測)과 사계(射界)를 제한하 며, 빈약한 도로망과 여러 갈래의 소하천은 부대기동 및 기갑부대 운영에 영향을 미쳤다. 또 한 수도고지와 지형능선 및 F고지에서 주 저항선 진지에 이르는 능선통로는 좌우가 급경사 이며 각종 장애물이 설치되어 있어 능선상의 교통호가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에 부대기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중공군 제12군 예하 제35사단은 5월 하순부터 주 저항선의 갱도 굴착공사에 착수하여 7 월 초순경에는 소대와 중대간을 연결하는 갱도를 완성하였고, 고지 후사 면에 동굴진지를 구축하여 대피호로 이용하고, 수직박격포 진지를 준비함으로서 강력한 화력을 집중할 수 있도록 준비하였다. 1952년 7월7일부터 국군 제2군단 예하 수도사단은 99일간에 거처 전초거점인 수도고지와 지형능선에서 뺏고 빼앗기는 혈전으로 이어지는 공방전을 치르게 되었는바 그 전투는 다음 과 같은 제5차전으로 구분할 수가 있다. 제1차전 (1952, 7, 7 - 7, 8) 621고지 및 지형능선의 A, B, C고지 공략전 제2차전 (1952, 8, 5 - 8, 7) 수도고지 공방전 제3차전 (1952, 9, 6 - 9, 18) 수도고지 및 지형능선의 F고지 공방전 제4차전 (1952, 9, 28 - 9, 29) 수도고지 및 지형능선의 F고지 제5차전 (1952, 10, 6 - 10, 14) 수도고지 및 지형능선의 F고지와 575고지 방어전 *요도 3 및 4 참조 1952년 9월 5일 나는 수도사단 제1연대 3대대 11중대 부중대장 겸 화기소대장으로 보임 받게 됨으로서 수도고지 및 지형능선 전투의 제3차 전부터 전투에 참가하게 되었다. 중대에 부임하여 보니 병력의 구성이 5사단과는 달리 선임하사는 일등상사, 각 분대장은 일등중사로 그리고 전투요원들의 대부분이 전투경험이 있는 역전의 용사들로 구성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동안의 전투경험에서 신병 10명보다 고참병 1명이 더 낫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마음이 든든했다. 수도사단 제1연대는 원래 우리 국군의 모체가 되는 제1 연대라는 명예와 전통을 지닌 부대 였다. 미 8군사령관인 Van Fleet장군도 "수도사단은 한국전쟁 발발이후, 싸워서 한번도 지지 않았던 한국 제1의 영예사단이다 "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아 자타가 인정하는 명예에 빛나는 전통을 지닌 사단이었다. 부대원들은 전투 중에 부상을 입어 후송되더라도 퇴원 후 스스로 원대복귀를 자청할 정도 로 부대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5사단에서 전투할 당시 항상 전의(戰意)가 위축되었던 때와는 달리 나는 이 부대에서 전투를 하면서 필승(必勝)에 대한 자신감이 생기 고 스스로사기(士氣)가 충천하는 것을 느꼈다. 내가 수도사단에서 얻은 전투경험은 부대의 전통이란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절실히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어 후일 내가 부대지휘를 할 때 훌륭한 부대전통을 이룩하기 위하여 관심을 집중하게 했다. 나는 직속상관인 3대대장 박찬긍 중령(총무처 장관)에게 부임신고를 했다. 대대장은 "우리 사단은 우(右) 일선부대로 26연대가 수도고지 일대에, 좌(左) 일선에 기갑연대가 지형능선일 대에 배치되어 방어임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우리 제1연대는 사단의 예비대로서 언제이든 역습할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또한 이 전투의 전술적 개념으로서 중공군은 그들 자신의 방 어태세를 완비한 후 우리의 병력과 물자 양면의 출혈을 강요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우리사 단은 한 치의 땅도 양보하지 않고 고수(固守)한다"는 개념이라며 알기 쉽게 직접전투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나서는 반합뚜껑에 화랑위스키를 한잔 따라 주면서 "전입을 환영한다. 앞으로의 전 투가 치열해질 터인데 절대로 개죽음을 해서는 안 된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대대장의 설명과 훈시를 듣는 순간 사실 속으로는 굉장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시 대부분의 지휘관들은 부임신고를 하면 '죽음을 각오하고 용감하게 싸워라' 정도의 상투 적인 이야기를 하는 분위기였는데 박 중령은 마치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듯이 인간적으로 대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그런 상관을 만나본 적이 없어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알고 보니 대대장은 이미 미국보병학교에 군사유학 과정을 다녀온 분이었다. 1952년 9월 6일 저녁6시 수발의 신호탄에 이어 적은 연막탄으로 아군의 주 저항선인 663 고지 정상의 포병관측과 중화기의 사계를 차단하는 가운데, 1개 대대 규모 이상의 대병력으 로 수도고지에 대한 강습을 감행해 왔다. 이에 고지를 방어하는 제26연대 5중대 1소대는 전력을 다하여 적을 저지하려 했으나, 저녁 7시 반경 소대장 홍 창원 소위 이하 전 소대원이 전사함으로써 수도고지의 정상은 다시 적 에게 넘어갔다. 한편 지형능선에서도 저녁6시40분 F고지에 대한 공격을 감행해 왔다. 이 고 지를 방어하고 있던 기갑연대 5중대는 포병지원이 여의치 못한 가운데도 결사적인 응전(應 戰)을 벌였으나, 결국 저녁9시경 F고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9월 9일 저녁 8시를 기해 공격을 재개하여 수도고지를 기필코 탈환하라는 사단장의 특명 을 받은 제26연대는 제3대대로 하여금 621고지를 양공(陽攻)하여, 적을 기만하는 가운데, 제1연대 2대대를 수도고지 공격에 투입 양면공격(兩面攻擊)을 전개한 끝에 마침내 피탈 당 한지 4일 만에 수도고지 정상을 탈환하게 되었다. 9월 10일이었는지 11일이었는지 중대본부의 서무계는 내가 9월 1일부 중위로 이미 진급되 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나는 위생병에게서 백색 반창고를 얻어, 내 스스로 계급장을 만들 어 철모에 붙이고 대대장과 중대장에게 진급신고를 했다. 드디어 밥풀 때기(당시 계급장 모양을 비유한 말) 하나가 두 개가 된 셈이다. 전쟁터에서 나의 중위 진급은 그 무엇과도 밖을 수 없는 의미 있고 값진 것이었다. 항시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 총알받이 소모품 소대장으로 불리어진 소위를 면한다고 생각하니 마치 전쟁터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은 불사조가 된 기분이었다. 9월14일 새벽4시 우리 연대인 제1연대(-1)가 F고지 탈환전에 나서 공격을 개시하게 되었 다. 돌격중대의 임무를 맡은 제 9중대는 능선접근로를 따라 약진하고 우리 중대는 제 9중대 를 후속 지원하면서 언제든지 초월공격을 할 태세를 갖추었다. 우리의 기습공격을 뒤늦게 알아차린 중공군은 능선접근로에 설정해 놓은 화집 점에 포격을 가하기 시작하고 직사화기로 측방 사격을 가하면서 아군의 공격을 저지하였다. 이로 인하여 제9중대는 소대장 1명이 전사하고 중대병력이 절반으로 줄 정도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이 때 우리 11중대가 제9중대를 초월하여 공격을 시작했다. 쏟아지는 포화 속을 뚫고 F고 지의 적진지 30-40m까지 접근하였을 때 고지 정상에서 중공군이 던지는 방망이 수류탄과 기관총 사격으로 우리 중대도 많은 피해를 입은 위기의 순간, 제2소대 선임하사관 원 상사 가 단신 포복으로 불을 뿜어대는 기관총 진지에 수류탄을 투척 침묵시켰다. 이 순간 중대장의 "돌격 앞으로!"라는 호령과 동시에 우리 중대는 일제히 돌진하여 치열한 백병전을 벌인 끝에 마침내 F고지 정상에 청색 오성 신호탄(약정된 목표점령 신호)을 쏘아 올렸다. 그러나 돌격하는 순간 중대장 오 대위가 부상을 당하였다는 무전이 들어왔다. 부중 대장 겸 화기소대장으로서 700m 떨어진 E고지에서 60mm박격포 사격을 지원하고 있던 나 는 긴급히 점령된 F고지로 나가 중대장 대리로 중대를 지휘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공격을 개시한지 약1시간 30분 동안에 벌어진 상황이었다. 나는 먼저 적의 역습에 대비하기 위한 방어 편성을 하기 위하여 중대를 재편성했다. 다행 히도 1명이 전사하고 10여명이 부상당한 것 뿐으로서 치열했던 전투에 비해서는 피해가 적 은 편이었다. 더욱이 다행한 것은 분대장들과 선임하사관들이 전원 무사한 것이었다. 이상하 게도 자신감이 생겨나서 처음 해보는 중대장의 역할이었지만 능숙하게 각 소대에 방어편성 을 지시했다. 그러나 F고지 일대의 지표면은 거의 무릎까지 빠져서 호를 팔 수가 없는 상태였다. 당초 이곳은 10-15년 생 잡목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는데 피 아 간의 포격이 집중되다보니 처음 에는 1m 정도에서 나무들이 모두 꺾여지기 시작하여 나중에는 뿌리째 파헤쳐지고 검붉은 흙이 폐여서 흡사 수렁같이 푹푹 빠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포탄이 두 서너 발만 떨어져 도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나서 앞을 바라 볼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소총의 노리쇠에 먼지가 끼어서 격발이 제대로 되지가 않았다. 이 전투의 특징은 피 아간 포병의 대결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국군 사단에 이 렇게 많은 포병이 지원되기는 처음이었다. 적도 우리 포병에 못지 않았다. 1일 낙탄 단위가 몇 만발이냐 하는 식이었다. 그래서 병력이 목표를 탈취해도 피 아간 모두 포병의 밥이 되 고 말았다. 나는 대대장에게 전사면에 진지를 구축할 수 없으며 소총사격도 여의치 않다는 것을 보고 하였다. 대대장은 적의 역습이 밤에 있을 것으로 예상되니 수류탄과 흙을 담을 수 있는 부 대(sand bag)를 곧 보급해 주겠다. 샌드백으로 진지를 구축해서 적의 역습을 저지하라고 했 다. 그러나 대대장이 보급해 주기로 한 샌드백은 저녁 7시까지도 도착하지 않았고 수류탄만 600여 발이 도착하였다. 드디어 밤 10시경 적의 공격준비사격이 시작되었다. 머리 위로 정신 없이 집중적으로 떨어 지는 포탄을 피할 수 있는 엄폐물이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대대장에게 다급하게 적과 싸 우기도 전에 적의 포탄에 전 중대가 전멸할 것 같다고 보고하는데 전화선이 적의 포탄에 맞 았는지 통화가 끊겼다. 급하게 중대용 무전기 SCR-508로 대대장을 호출했다. 아직 트랜지 스터가 나오기 전이라 무전기가 진공관 식이었기 때문에 무게가 엄청나게 나가서 무전병 한 사람이 겨우 지고 다닐 수 있을 만한 크기인데다 성능도 형편없었다. 교신하려는데 시끄 러운 중국말이 나왔다. 적도 이것과 비슷한 주파수를 사용하는지 적과 혼신이 되기가 일수 여서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요즘초등학교 학생들까지 가지고 다니는 휴대폰이 있었더라면 전투지휘를 얼마나 잘 할 수 있었을까하는 생각을 이 글을 쓰면서 해 보게 되었다. 나는 어렵게 대대장과 교신하여 철수명령을 얻어냈다. 우리는 진지편성이 용이치 못한 탓 에 어렵게 점령한 진지를 적에게 내어주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공격 그 자체도 중요하지 만 점령한 그 목표를 계속 확보하는 것이 더욱 중요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해 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대대는 3일간 전력보강에 주력하면서 다시 F고지 탈환의 기회를 엿보았다. 9월 18일 새벽 3시 30분을 기해 제 9 및 제 10중대를 공격 제 1선 제대로 삼고 나의 중대인 제11중 대를 예비로 하여 야음을 뚫고 목표를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새벽 6시경에 제 10중대가 F고지 우측의 G고지를 점령하고 제 9중대는 기갑연대 제 1대대 의 증원을 받아 종횡무진으로 적진을 유린한 끝에 드디어 공격목표인 F고지를 다시 탈환하 게 되었다. 대대 예비인 우리 중대원들은 지난번 전투에서 진지편성을 할 수 없어서 어렵게 점령한 목 표를 확보하지 못한데 대한 보완책으로 각자가 개인 당 마대 30매와 많은 소총실탄 대신 수 류탄 15발씩을 짊어지고 공격제대를 뒤따랐다. 우리 중대가 F고지의 방어 임무를 맡게 되어 우리를 뒤따라 올라온 100여명의 노무자가 운반해 온 수류탄과 샌드백을 이용하여 밤에 있을 적의 역습에 대비하기 위한 급편 방어진 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샌드백에 흙을 넣어 엄폐할 수 있는 개인호를 전 사면의 9부 능선 에 구축하였다. 샌드백으로 쌓아진 개인호는 직격탄을 맞지 않는 이상 포탄의 파편과 소총 탄에서 방호될 수 있는 진지의 엄폐물이 되었다. 그리고 수류탄 핀을 펴서 호 앞에 노점상 의 좌판 벌리듯이 진열시켜 놓았다. 밤 10시경부터 예상한 대로 적의 포격이 산 정상에 집중되더니 약 2개 중대 규모의 적이 꽹과리를 치고 피리를 불면서 우리의 정면으로 공격해 올라오고 있었다. 중공군은 수적으로 우월한 것을 믿고 저돌적인 공격을 감행해왔다. 적의 공격개시를 대대장에게 보고하자마자 이미 우리 상공에 떠 있던 항공기가 선회하면서 조명탄을 적당한 간격으로 낙하시켜 주어 거의 대낮 같이 우리 앞을 밝혀 주었다. 우리는 저 멀리서 그야말로 개미떼 같이 떼 지어 올라오는 중공군을 목격할 수가 있었다. 멀리서 중공군이 아군의 포격으로 수없이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얼마 후 적들이 6부 능선 에 도달했을 때 적의 동태를 자세히 볼 수가 있었다. 그런데 적은 사상자 수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지 그대로 사상자를 밟고 올라오고 전투를 하는 군인의 자세가 아니라 마치 등산 을 하듯이 뻣뻣이 서서 올라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적군 중에는 흡사 술 취한 사람같이 비 틀거리면서 수류탄을 던지면서 소리를 지르고 기어오르는 자도 있었다. 나중에 적에게서 노 획한 물자 중에서 아편이 다수 나오는 것을 보면 중공군이 공격 전에 아편을 하고 제정신이 아닌 환각상태에서 전투를 한다는 소문이 사실인 것도 같았다. 우리는 각자가 수류탄을 100발씩 가지고 주간에 교육한 대로 적이 투척거리 안으로 들어온 다음에 나의 통제 하에 일제히 수류탄을 투척하기 시작하였다. 적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 는 모습이 눈에 확연히 보였다. 적도 우리에게 방망이 수류탄을 던졌지만 대부분 우리 진지 앞에서 터졌다. 우리는 수류탄을 아껴가면서 던지는 여유까지 있고 보니 안 된 말이지만 재 미도 있었다. 이렇게 하여 제 1파를 격퇴하였는데 이어서 제 2파가 몰려왔다. 제 2파도 격퇴하였지만 제 3파가 시체들을 밟고 집요하게 꾸역꾸역 기어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바로 이것이 말로만 듣 던 중공군의 인해전술이었던 것이다. 나는 대대장에게 수류탄이 거의 바닥이 나게 되었다고 보고하자 철수명령이 떨어졌다. 우 리가 철수하자마자 즉각 아군의 포병이 조금 전까지 우리가 지키고 있던 F 고지 정상 일대 에 집중포격을 퍼부었다. 우리의 작전 계획은 고지를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고지를 미끼로 해서 최소의 피해로 적에게 최대의 피해를 입히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전투의 양상은 적은 저녁에 공격하여 밤에 진지를 편성하고 아군은 새벽에 공격하여 낮에 진지를 편성하는 것이 반복되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피 아 간에 마치 동네 아이들 패싸움에서 돌팔매질하듯 총탄 대신 수류탄을 투척하는 난투전이 되었다. 얼마 후 적이 숨고르기를 하는지 역습을 중지해서 우리 사단도 전열을 정비하고 전력보강 을 위한 재편성으로 전선은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9월 21일 우리 대대는 다시 확보한 F 고지를 기갑연대에 인계해주고 다시 사단 예비로 복귀하게 되었다. 나는 F고지 방어전의 공로를 인정받아 사단 인사명령으로 52년 9월 25일 전시에 있었던 임시계급 대위로 진급하였다. 아울러 미 8군사령관 Van Fleet 장군이 수도 고지에서 분전하 는 한국군을 독려하기 위하여 제 2군단에 배정해준 미국무공훈장의 하나가 내게도 차례가 돌아와서 미 동성(Bronze Star)무공훈장을 수여 받게 되었다. 중위로 진급한지 한 달도 안 되어서 대위로 속성 진급을 하고 훈장까지 받고 보니 어느 덧 전쟁 공포심도 사라지고 마치 전쟁영웅이라도 된 듯해서 어떤 전투이던 치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겨났다. 9월 28일 황혼이 깃들기 시작하면서부터 적의 기도가 심상치 않더니 이윽고 밤 10시경부 터 약 1시간동안 수도고지 정상에 약 5,000여 발의 포탄이 떨어진 후에 세 방향에서 적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사단 우측 전선의 제 26연대 2대대는 악전고투 끝에 적을 물리 치고 끝까지 수도고지를 사수했다. 한편 다음 날 새벽 5시 경 기갑연대 수색중대가 방어하고 있던 F고지가 적 3개 중대의 공 격을 받아 2시간 여의 공방전 끝에 빼앗겼으나 기갑연대 2대대가 10시 반경 주간 역습으로 다시 고지를 탈환하는 일진일퇴를 벌였다. 이 기간의 전투가 수도고지 전투의 제 4차전이었으며 이틀간에 수도고지와 F 고지 일대에 적과 아군이 퍼부은 포탄수가 무려 20,000여발로 추산되었다. 이 때 우리 연대는 사단 예비 로서 주 저항선의 진지보강 작업을 하면서 역습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 후 또 다시 전선은 몇 일간 소강 사태를 유지했다. 9월 말 무렵 육본으로부터 아군 전사자의 시체를 부대장이 책임지고 수집해서 후송하라는 전례에 없었던 지시가 떨어졌다. 그때까지 군은 전투 중에 전사한 시체에 대하여 완전히 수 집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지시의 의미는 깊은 것이었지만 그 지시를 실행 에 옮기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왜냐하면 전투 중에는 찾을 수 없는 시체도 상당수가 있게 마련이고 더욱이 직격탄을 맞은 시체는 찾았다 해도 형체를 알아볼 수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는 수없이 숫자를 맞추려고 하다보니 궁여지책으로 적의 시체라도 수집하여 맞출 도리밖 에 없게 되었다. 그나마 적의 시체도 최전방에 있으니 그것을 수집하여 후 방으로 후송해 오는 일도 용이한 일이 아니어서 지역에 따라서는 시체를 구해오기 위해서 산 사람의 생명 을 내걸어야 하는 판이었다. 결국 우리는 적의 시체를 야전삽과 대검으로 팔 다리를 잘라 토막을 낸 후에 마대에 넣어 운반하기까지에 이르렀다. 그런데 여기서 기가 막힌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어렵게 토막 낸 시체를 메고 적의 직사 포 조준사격 지역을 막 벗어나 잠시 땅에 내려놓고 물 한 모금을 마시면서 용변을 보고 돌 아서보니 시체가 든 마대가 없어진 것이다. 자기의 생명을 걸고 수집해 온 귀중한 시체를 다른 부대원이 훔쳐 메고 줄행랑을 치는 것이었다. 적은 10월 6일을 기하여 또다시 대대적인 역습을 감행해 옴으로서 전선은 또 한바탕 격전 을 치르게 되었는데 이것을 일명 중공군의 10월 공세 또는 추계공세라고 한다. 제26연대는 10월 6일 저녁 6시를 기하여 전차 4대와 포병의 지원하에 수도고지를 공격해 온 대규모의 적 선두 제1파를 탄막권 내로 유인 격파하고, 제2파는 전선에서 수류탄으로 저 지하였으나, 뒤이어 집요하게 제3파가 방어진지를 돌파하자 백병전과 60mm박격포의 진내사 격으로 적을 격퇴하였으며, 또다시 다음 날인 7일 저녁 7시를 전후하여 들이닥친 적과 약 7 시간 동안의 격전을 벌인 끝에 수도고지 정상을 끝까지 고수할 수 있었다. 한편 기갑연대 6중대는 수도고지 공격과 때를 같이하여 전차 2대의 직접지원 하에 575고 지에 들이닥친 대대규모의 적과 뒤엉키는 백병전을 벌렸으나, 저녁 7시반경 고지를 적에게 넘겨주고 말았으며, F고지마저 새벽 2시경 적에게 피탈 당하였다. 이렇게 되자 지형능선상에서 아군의 전세가 급격하게 악화되어 주저항선까지 위협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천만다행한 것은 적이 숨고루기를 하는지 계속 공격을 실시하지 않는 것이 었다. 우리 중대는 주저항선 바로 전방인 690고지에 배치되어서 이 진지를 적의 포격으로부 터 보호받을 수 있도록 유개호로 보강하고 지뢰와 장애물도 설치하였다. 전열을 가다듬은 적은 575고지와 F고지를 점령한 그 기세를 몰아, 10월 12일 새벽 6시 반 경, 우리 중대가 지키고 있는 690고지로 병력 손실에 전연 구애치 않고 미친 듯이 파상공격 으로 밀어닥쳤다. 아군은 포병의 포격으로 탄막지대 내에 들어 온 적의 기세를 일단 꺾은 다음 우리 진지에 근접한 적에 대하여 수류탄으로 제압하던 중, 아침 8시경부터 우군의 항공지원으로 개미떼 와 같은 적의 공격제대를 네이팜탄으로 격파할 수 있었다. 1소대장 이 신호 소위와 3소대2분대장 손 중사의 시체를 보는 순간 그 동안 전장에서 밤낮 으로 수많은 죽음을 보면서 매마를 대로 말랐던 내 눈물이 어느 구석에 남아 있었는지 끝임 없이 흘러내리는 것을 주체하기가 어려웠다. 비록 값비싼 희생을 치루었지만 전투경험이 많은 역전의 용사들의 힘으로 노도와 같이 밀 어닥치는 적을 격파한 우리 중대는 무적의 중대라고 해도 좋을만했다. 10월 13일 빼앗긴 F고지를 탈환을 위한 공격작전을 실시하기로 하여 새벽 3시, 우리 연대 는 지형능선에서 제1대대 제1 및 2중대를 선두로 F고지를 공격하기 시작하여 새벽 5시경 백병전을 치르면서 F고지를 탈환하고, 이어 G고지를 새벽 6시 반경 모두 탈환하였다. 한편 10월 13일 오전 12시에 수도사단은 10월 24일까지 Missouri선의 현 진지를 한국군 제 8사단에게 인계하고 사창리에 집결하여 미 제 9군단의 예비가 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 다. 그러고 보니 이 날의 전투가 우리 사단의 수도고지 및 지형능선 전투의 사실상 마지막 전투였던 셈이다. 우리 사단은 10월 20일부터 제 8사단에게 진지를 인계하기 시작하여 10월 25일 완전히 교 대를 완료하여 미 제 1군단에 배속되어 11월 3일부터 9주간의 부대정비와 FTC 교육훈련에 들어갔다. 그러나 전선의 전황은 사단에 주어진 9주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12월 10일 부로 미 제 9군단에 배속되어 금성 서남쪽 백마고지 전투로 피로한 한국군 제 9사단의 진지 일부 를 인수하여 또 다시 제일선을 담당하면서 1952년을 보내고 1953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나는 6.25전쟁 기간중 김일성고지와 수도고지 전투에서 나와 함께 생사를 같이하면서 싸우 다가 쓰러져 숨을 헐떡이며 죽어가는 내 부하를 부둥켜안고 통곡하던 일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살아남은 자로서, 조국 대한민국을 위해 숭고한 희생을 마다하지 않은 그들의 영령들 에게 내가 죽을 때까지 죄인이 되어 명복을 빌며, 부끄럽지 않은 군인으로서 삶을 살고 싶 었다. 국가는 무엇보다도 국가의 부름을 받고 희생된 자들에게 최우선적으로 응분의 보상을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라의 위기를 구출하고, 국운을 더욱 흥하게 하는 애국심은 국민 의 마음속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 대한민국! 조국을 위해 꽃다운 나이에 산화한 전우들의 명복을 빈다. 7. 자반 병 1953년 2월 말경 전방고지 중대 OP에 있던 나는 어느 날 아침. 손등과 발등에 검붉은(자 색) 반점이 솟아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대대 의무대장이 군의관이 아닌 의정장교여서 손을 쓸 수가 없어, 사단 치료소로 바로 가서 진찰을 받으려고 대대장에게 보고를 했더니 대대장이 지프차를 내주었다. 사단 치료소에 도착하면서 설사 기를 느껴서 화장실에 갔더니 항문으로 피가 설사모양으로 줄줄 나오는 것이었다. 군의관은 이러한 상태를 보고는 즉각 수혈부터 하면서 미군의 긴급 환자수송 헬리콥터(OH-23)를 요청하여 나를 서울의 수도육군병원으로 후송하였다. 나는 인체 내에 비타민 C가 부족하여 모세혈관이 터져 내출혈을 일으키는 자반 병(紫斑病) 이란 병에 걸린 것이었다. 이 병은 점차 출혈이 심해지면서 결국에는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인체에 한 영양소가 부족함으로 인하여 이런 무서운 병에 걸릴 수 있다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모두 똑같은 환경에서 못 먹고 고생하는데 '왜 하필 나에게 이런 희귀 한 병이 찾아 온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원래 김치도 잘 안 먹을 정도로 야채를 잘 먹지 않는데다가 군에 들어와 전선에 있는 동안 야채라고는 구경하기도 어려웠으니 이런 병에 걸릴만하기도 하다고 생각되었다. 아마도 나의 체질 탓이 라고 생각 될 뿐이었다. 후송된 다음날부터 손등과 발등의 반점이 터져 피가 흐르기 시작하였다. 피가 출혈되는 만 큼 나는 하루 24시간 계속 수혈을 받으면서 생명을 부지했다. 다행히도 한국전을 위하여 세 계 각국에서 지원한 혈액이 충분히 확보되어 수혈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전시 상황에서 비타 민C 주사약을 구할 수 없는 것이 문제였다. 게다가 서울은 완전히 수복되지도 않았거니와 서울 시내의 약국들은 포격과 폭격으로 폐허가 되어 약을 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 었다. 병원장은 군 병원에는 비타민 C 주사약이 없으며 구할 수도 없으니 내가 가족이 어디 있 는지 연락하여 가족들이 나서서 이 약을 구해 와야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가족은 제주도로 피난을 가 있었으므로 당장 연락을 할 수가 없어서 서울 남대문 교회 배 명준 목 사님에게 연락해주기를 병원장에게 부탁했다. 배 명준 목사님은 연락을 받자마자 병원으로 뛰어 오셔서 누워서 수혈을 받고 있는 내 손 을 붙잡고 한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배 목사님은 병원장에게 어떻게 해서라도 비타민 C약을 구해 올 터이니 '인수를 살려만 달라'고 애원을 하시고 교회로 돌아가 이 사실을 수요일 저 녁 예배시간에 광고하고 온 교인이 합심하여 나를 위하여 기도를 하셨다. 전쟁 중이던 때에 수요일 밤 예배에는 교인들이 많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이튿날 전날 예배에 참석했던 신자 들이 나머지 교인들에게도 나의 소식을 알렸다. 지금처럼 약국이 많지가 않은 때여서 남대문 교회 온 교인들은 서울 시내 약국들을 하나도 빠지지 않고 약국 터 자리마다 무너진 잿더미 사이를 호미로 뒤져가며 비타민C 주사약 찾기 에 나서 상당량을 수집해서 병원에 가져왔다. 한편 나중에 제주도에서 이 소식을 들은 어머 니가 부산으로 오셔서 약국마다 돌아다니며 상당량의 약을 구입해 오셔서 수혈과 더불어 같 이 비타민C를 주사 받을 수 있었다. 그로부터 2주 후에는 드디어 출혈이 멈추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내가 또 한번 죽다 살아나게 되었으니 이것이야말로 남대문 교회를 통한 하나 님의 은혜가 아닐 수가 없는 일이었다. 8. 사랑의 싹 나는 서울의 수도육군병원에서 마산 36육군병원으로 이송되어 요양을 하게 되었다. 알고 보니 초기이긴 하나 폐결핵까지 걸려 있었기 때문에 주로 폐결핵 환자들이 요양을 하는 진 영병동에서 입원을 하게 된 것이었다. 아마도 오랜 야전생활에서 잘 먹지도 자지도 못하여 병이 얻어진 것 같았지만 한참 젊은 나이였기 때문에 요양을 하니까 회복이 무척 빨랐다. 간호장교 전 소위와 고 성란 간호원 및 하 봉선 간호원이 우리 병실을 담당했는데 간호원 들이 모두 친절했지만 특별히 고 간호원이 지나칠 정도로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그 녀는 또순이라고 하면 딱 알맞을 만큼 대단히 적극성이 있는 함경도 출신이었다. 그러나 하 간호원은 나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좀처럼 겉으로 표현하지 않는 정숙한 태도가 교양이 있어 보였고, 개성이 돋보이는 것 같은 인상이었다. 그러나 나 역시 그녀와 어쩌다 한두 마디 말을 건넸을 뿐 별로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 퇴원할 때까지 그녀에 대하여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한편으로 내가 다른 여성들에 대해서 적극적인 관심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은 그 때만해도 나의 마음속에는 남대문교회 중등부에서 알게된 류 미사 양이 구원(久遠)의 여인상(女人像) 으로 깊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그녀가 미국으로 떠나버려 언제 어떻게 만날 수 있을지도 전혀 알 수 없는 처지였으나, 나는 다른 여성과 사귄다는 것 자체로도 죄의식 을 느꼈다. 내 마음의 상태가 그러하다보니 혹시 다른 여성이 나에게 호감을 나타내더라도 내 스스로 마음속으로 자유롭지 못했던 것 같았다. 사실 나는 그녀와 손 한번 잡아 보지도 않았고 사랑을 말로 고백한 적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했던 것이 틀림없었지만 이것은 누구에게나 있을만한 숫된 첫사랑일 뿐이 었다. 1953년 6월 8일 나는 퇴원하여 대구의 제1보충대에서 다시 전선으로 배치될 발령을 기다 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생겼다. 인사 분류장교가 "그 동 안 후방근무는 한번도 못해 보고 일관되게 격전지만 돌아 다녔으니 이번에는 희망하는 부대 로 보내주겠다. 희망하는 곳이 있으면 말해 보라."는 것이 아닌가? 나는 뜻밖의 제안을 받고 잠시 생각하다가 가족들이 피난을 가 있는 제주도에 위치한 제1 훈련소로 가고 싶다고 했다. 인사 분류장교는 본인이 원한다면 보내 줄 수는 있지만, 혹시 새로 창설되는 전차부대에 가 볼 생각은 없느냐고 물었다. 전차부대라면 내가 5사단 35연대에서 근무할 당시 동해안 바닷가 솔 나무 밑에 주둔하고 있는 전차부대가 머리에 떠올랐다. 사병들까지도 권총을 차고 특식으로 닭고기 국에 당면을 넣어 먹는 것을 보고 부러웠던 기억이 났다. 그 당시 나로서는 한 달 후에 휴전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에 어차피 전선의 상 황이 급해지면 이번에 후방부대에 가더라도 특별한 빽(배경)이 없는 한 언제든지 또다시 전 방부대로 차출될 터인데 먹기라도 제대로 먹고 멋이라도 부리다가 죽는 편이 차라리 낫겠다 싶어 나는 그 자리에서 전차부대로 가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보병병과에서 기갑병과로 전과(轉科)되는 교육을 받기 위하여 광주에 있는 육군기갑 학교 초등군사반에 입교하여 교육을 받고 있는 도중 한 달 만인 7월 27일 휴전이 되었다. 9월말 기갑학교 초등군사반 졸업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진영 병동에서 같이 입원하고 있던 강 구형 중위를 광주 길거리에서 우연하게 만나게 되었다. 그는 병원에 입원해 있을 당시 하 간호원에게 열렬하게 구애하던 처지였다. 그런 강 중위로부터 나는 뜻밖에 하 봉선 간호 원이 해군소위로 임관하여 현재 진해 해군병원에서 간호장교로 근무하고 있으며, 나에 대한 호감을 아직도 지니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녀의 소식을 듣고 나자 불현듯 나는 그녀를 만나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돌이켜 보 면 그 동안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억눌려 있던 이성에 대한 갈구가 화산처럼 불타오 르기 시작한 것 같았다. 나는 그녀를 만나기 위하여 즉시 달려가고 싶었으나 토요일에 졸업 하였기 때문에 월요일 새벽에 시외버스 정거장에 나가서 진해로 가는 버스를 탈수밖에 없었 다. 왜냐하면 내가 가진 유일한 단서는 하 봉선 이란 이름과 그녀가 해군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것뿐이어서 근무일 퇴근시간 전에 찾아 들어가야만 그녀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 다. 버스가 비포장도로를 무려 8시간을 달려가는데 왜 그렇게 늦게 달리는지 참으로 애가 탔 다. 다행히도 버스가 고장이 나지 않아서 무사히 진해시에 도착했지만 벌써 4시가 되어 버 렸다. 생전 처음 진해에 왔는데 해군병원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뛰면 서 사람들에게 물어서 해군통제부 내에 있는 해군병원을 찾아서 퇴근시간 30분전에야 도착 을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막상 그 병원정문에 도달하였을 때 심장이 고동치기 시작하였다. 강 중위의 말만 듣고 오기는 왔는데 정말 그녀가 여기에 있기는 있는 것인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하봉선 소위를 찾았다. 한 간호장교가 곧 하 소위에게 연락해 주겠다고 답했다. 사람이 있기는 있으 니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또한 나를 어떻게 맞아줄 것 인가?' 등 여러 가지 생각으로 또 다시 가슴이 방망이질 쳤다. 얼마 후 문을 열고 내 앞에 나타난 그녀는 산뜻한 해군소위의 복장을 한 모습이었다. 나는 나의 눈이 의심되어 순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 역시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한동 안 멈춰 선체로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가 다시 정신을 차린 태연한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와 서 "반갑네요." 하고는 조금 뜸을 들이다가 "언제 오셨어요?" 라고 했다. 나는 그때 무어라고 대답하였는지 기억을 할 수 없지만 헤어진 지 불과 4개월밖에 안되었는데도 마치 한 40여 년 만에 만나는 듯 했다. 막상 어렵게 만나기는 했지만 아무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속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을까? 여기에서 이렇게 만나고 그만인 것인가?' 하고 생각하 고 있는데 그녀가 먼저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퇴근시간이 거의 다 되었으니 같이 나가 시지요."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처음으로 같이 해군통제부 내의 가로수 길을 나란히 걸어서 시내로 나와 그녀의 하 숙집으로 갔다. 그녀는 마치 오랜 기간 사귀어온 연인에게 대하듯 자기가 손수 저녁을 지어 나를 대접해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밤늦게까지 이런저런 많은 이야기를 하였으나 막상 우 리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못하고 헤어져 나는 혼자 여관으로 왔 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서로가 이성으로서 좋아하고 있음은 확인한 셈이었다. 그 이후 우리는 매주 1회식 사랑의 편지를 교환하고 2주에 한번 정도 식은 내가 왕복 16 시간씩 걸리는 버스를 타고 진해로 가서 그녀를 만나 사랑의 싹을 틔우기 시작하였다. 9. 숙명적인 사랑 1954년의 새해를 맞은 첫 달 중순 내 인생의 기막힌 이정표가 놓여졌다. 당시 해병대에 1개 중대밖에 없던 전차 중대를 대대로 중편하고 LVT(수륙양용 전차)대대를 창설하기 위하여 교육시킬 육군의 기갑장교 파견요청이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이 때 육군도 3개 전차대대에서 7개 전차대대를 추가로 증편하는 단계여서 기갑병과 장교가 부족한 실태 였다. 그러나 기갑학교장은 육군본부의 지시로 1명을 차출하여 해병대로 보낼 수밖에 없었 고 육군의 기갑장교를 해병대로 파견하는 것이니 만큼 아무나 보낼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결국 최근 기갑학교 초등군사반을 수석으로 졸업한 내가 선발되어 해병대로 파견되게 되었 다. 1954년 1월 22일 나는 더불 빽 1개를 둘러메고 부산에 있는 낯선 해병대사령부에 도착하 였다. 참모장은 많이 기다렸다는 듯이 반기면서 사령관 실로 나를 안내했다. 사령관 김00 중장은 육군의 기갑장교를 파견 요청한 이유를 나에게 설명하고 점심식사 시간에 참모식당 에서 자기의 옆자리에 나를 앉혀 놓고 식당에 모인 해병대 고급장교들에게 나를 소개했다. 나는 군에 들어와 3성 장군을 만나 본 것도 처음이었지만 이렇듯 높은 사람에게서 생각지 못한 후한 대접을 받고 보니 그야말로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그 날 오후 사령부에서 내 준 지프차로 나의 근무처가 될 해병 교육단이 있는 진해로 출발 했다. 지프차를 타고 진해로 가면서 꿈에도 상상치 못했던 일이 현실로 이루어진 것이 너무 기뻐서 "아마도 하나님이 도와주시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해 경화동에 위치한 해병 교육단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퇴근시간인 오후 5시에서 30분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지만 이미 사령부로부터 내가 출발했다는 연락을 받고 부단장인 공 정식 대령(해병대 사령관)이 퇴근도 하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육군중위에 불과한 나 를 맞이하기 위하여 부단장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누가 들어도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이야기이지만 당시 상황은 분명히 그러했다. 부단장은 나를 진해에서 제일 큰 일식식당으로 데리고가 저녁을 사주면서, 앞으로 근무하 면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자기를 직접 찾아와 이야기하라고 했다. 전쟁통에 한번도 가보지 못한 멋있는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이었지만 도무지 내 눈에는 들어 오는 것이 없었다. 나는 먼저 빨리 밥을 먹고 부단장이 식사가 끝나기만 기다렸다. 내 속을 알 리가 없는 부단장은 천천히 많이 먹으라고 계속해서 음식을 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 는 맛있는 음식이나 파격적인 대우보다도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을 뿐이었다. 내가 그녀의 하숙집을 찾았을 때는 이미 밤 8시가 지난 시간이었다. 주말도 아닌 날 예고 도 없이 찾아온 내 목소리를 듣고 그녀는 어리둥절해서 뛰어 나왔다. 내가 자초지종을 설 명하자 그녀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한 체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이날부터 우리들의 아름다운 젊은 날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고 우리들의 사랑은 가속이 붙 은 급행열차처럼 달리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매일 그녀의 하숙집에서 저녁밥을 같이 먹고 밤 10시까지 같이 지나다 헤어지면서도 아쉬워했다. 진해의 극장에서 개봉되는 영화는 한편 도 빼먹지 않고 보고 주말에는 언니가 있는 마산과 숙모가 있는 진주로 주변의 관광지로 돌 아 다녔다. 만 1년 간 해병교육단에서 근무하면서 나는 육군 기갑장교의 명예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각별한 신경을 쓰면서 나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 했다. 부임한지 2주일 만에 부산의 육군 병기기지창에 가서 교육용으로 사용할 M4A3전차 1대를 인수하여 진해까지 손수 조종하여 몰고 왔다. 해병교육단에서 전차교육과 더불어 3개월 후, 미 해병으로부터 LVT도 1대 인수받아 처음 으로 한국 해병에게 LVT교육을 실시하면서 해병대 전차대대의 창설을 위해 필요한 모든 업 무를 지원했다. 또한 당시 해군에서 파견 나와 상륙작전의 교리발전과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해군사관학교 1기생인 이 맹기 중령(해군참모총장)과 해사3기생인 김 창선 대위 및 김00 대위와 같은 사 무실에서 근무하게 되어 상호 군사지식을 교환하고, 상륙작전 시 전차의 운영이라는 과목을 합동으로 연구하여 교육하면서 육군 장교로서 해군과 해병대를 알게 되는 유익한 경험을 하 게 되었다. 당시 한국 해병대는 미 해병대로부터 장비 및 보급품과 예산까지 직접 지원을 받는 상황이 어서 모든 면에서 육군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 풍부하여 여유가 있었다. 교육단의 지휘 부는 나에게 특별한 대우를 해 주어 월 1가마의 쌀과 적지 않은 용돈과 필요하여 신청하는 보급품 그리고 겨울철에는 난방용 경유도 2드럼까지 대 주었다. 당시 이러한 대우는 영관급 장교도 받기 힘든 파격적인 대우였다. 나에게 이러한 대우를 해주는 것을 보고 "뭐 육군 장 교 하나 데려다 놓고 저렇게까지 대우를 해 주어야 하나?" 라고 해병대 장교들로부터 질시 의 대상이 될 정도였다. 7개월이 지났을 무렵 해병교육단장인 김 성은 준장(국방장관)은 나에게 해병대로 전과할 것을 권유했다. 나는 "당장 근무여건이 좋은 해병대로 전과를 할 것인가? 아니면 앞으로의 전망을 보아 육군으로 원대복귀 해야 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더욱이 해병대로 전과하면 그녀와 계속 같이 있을 수가 있으나 육군으로 원대복귀를 하다면 전방지역으로 발령 받게 될 것이어서 그녀와 떨어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정 말로 결정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해병대 기갑부대가 확장 발전해도 1개의 전차대대와 1개의 LVT대 대 이상은 증편되지 못할 것이나, 육군은 추가로 7개 전차대대가 창설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조건이지만 해병대로 전과하는 문제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희망이 없어 보였다. 나는 원대복귀를 결정하고 그 대신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서로가 떨어질 수 없기 때문에 결 혼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결심을 하고 드디어 나는 그녀에게 구혼을 하게 되었다. 1954년 10월 7일. 우리는 서울의 남대문예식장에서 배 명준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 렸다. 그러나 막상 결혼식을 올리기까지 아주 험한 고개를 넘어야했다. 그것은 어머니가 우 리의 결혼을 심하게 반대하셨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단지 신부가 교회를 다지지 않는 비 기독교인이라는데 있었다. 어머니의 입장에서 볼 때, 나를 낳고 살리기 위해서 예수를 믿기 시작하여 내가 맏이로 살 아나자 나를 하나님에게 받친다는 일념으로 목사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 자기의 절대적인 신 앙의 목표였었는데 전쟁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지만 천만다행으로 전쟁터에서 목숨을 건졌다. 그런데 자기의 사랑하는 그 아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 여자와 결혼하겠다는 것은 상 상도 못할 일이었다. 더욱이 어머니의 세계는 바로 남대문교회가 전부였다. 그래서 신부 감 도 교회 내에서 자기의 손으로 고르고 교회에서 결혼식도 올림으로서 온 교인들 앞에서 잔 치를 벌리는 것이 소원이었을 것이다. 물론 내가 어머니의 이런 뜻을 이해하지를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당시 다른 종교에서 는 비신자와의 결혼을 반대하지 않았음에도 유독 사랑과 전도를 전제로 하는 신교에서만은 타종교인과의 결혼을 반대하는 것에 대해 나는 이해할 수 없음은 물론 '비 기독교인과 결혼 하면 자동적으로 전도가 되는 것인데?' 라는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결국 아내는 결혼을 전제로 서둘러 배 목사님에게 학습세례를 받고 배 목사님의 주례로 결 혼식을 올린다는 조건으로 결혼승낙을 얻어냈다. 우리의 결혼식은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턱시도를 입고 아내는 서양식 웨딩드레스를 차 려입고, 친가와 외가의 모든 친척과 남대문교회의 친지들 그리고 친구들의 축복을 받는 가 운데 백년가약을 맹세했다. 결혼식을 올리고 우리는 미제 승용차인 택시 3대로 나눠 타고 남산을 드라이브했다. 그 당시는 결혼식을 올린 후에 남산을 드라이브하면서 카메라로 사진 을 찍는 것이 공식일정이었다. 피로연은 좁기는 했지만 남산 밑의 도동에 있던 우리집에서 벌였고 신혼여행은 생략되었다. 사실 전쟁이 끝나고 1년 밖에 안 된 그 당시는 마땅히 갈 곳도 없었다. 우리는 결혼 다음 날 망우리 할머님의 묘에 성묘하고, 고모님과 숙부님 댁을 방문한 이튿 날 진주에 있는 처가로 내려갔다. 나는 진양 하씨(晋陽 河氏)인 하 천덕(河千德)씨의 6여중 4녀인 하 봉선(河鳳仙)과 결혼한 것이다. 아내는 13살 어린 나이에 어머니 이 순희(李順姬)를 잃었고, 얼마 후 아버지는 재혼 하여 남자 3형제를 낳았으며, 자기의 위 언니들인 계선(桂仙), 계숙(桂淑), 숙녀(淑女) 3명과 밑으로 두 동생인 봉길(鳳吉), 봉화(鳳花) 여섯 명의 여자형제들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 리가 결혼할 당시 아버지의 나이가 이미 70세의 고령이라 언니들이 부모의 역할을 대신할 수밖에 없었고 나는 진주 처가에 가서도 아내의 외숙모 댁에 머물면서 장모님의 사랑 대신 외숙모님의 사랑을 받았다. 결혼을 한 우리의 보금자리는 진해시내의 외곽인 경화동에 단칸방 하나를 얻은 셋방살이로 시작하였다. 결혼을 하였다고 하여 새로운 살림살이를 장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단지 이불 한 채를 새것으로 장만한 것 이외는 지금까지 아내가 자취하며 쓰던 모든 살림도구와 간단한 우리들의 소지품이 전부였다. 당시 우리들의 재산목록 제1호는 Zenith 라디오 1대였 다. 우리들의 신혼생활은 여유 있게 넉넉한 살림은 못되었지만 안정되고 사랑만으로 엮어지는 아름다운 삶이어서 마치 행복이 우리에게서 영원히 머물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 행복의 여신은 단지 우리에게 100일 정도밖에 머물러 주지 않았다. 1955년 1월 말 나는 육군으로 원대복귀와 동시에 전방지역에 있는 제6전차대대로 발령이 났다. 아내는 임신을 해서 병원근무를 하기도 어려웠지만 함께 전방으로 가야하기 때문에 예편을 신청했다. 그러나 장교는 의무복무기간인 3년의 복무를 마쳐야 예편이 가능한데 임관한지 1 년 반정도 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제대가 안 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혼자 전방의 임지 로 가서 근무하다가 2개월 후에야 진해로 다시 내려와 아내를 데리고 전방으로 이사를 하였 다. 제3부: 시련의 군대생활 1. 부조리와 모순 1955년 1월말 나는 제6전차대대에 부임하여 1년 반을 근무하면서 1중대장과 3중대장을 역 임하였다. 내가 지휘한 전차중대는 2차대전 말에 주로 사용하였던 M4A3전차로 장비되었고 1개소대 5대식, 4개 소대 20대와 지휘용 2대를 포함 도합 22대로 편성장비되어 있었다. 나는 이미 6.25전쟁 기간 중 52년 9월부터 소총중대장을 지냈지만 기갑병과로 전과했기 때 문에 또 다시 전차중대장의 경력을 쌓을 수밖에 없었다. 대대본부와 중대의 주둔지는 경기도 포천군 청산 면에 있었으나 연천군 전곡에서 더 가까 웠다. 대대장은 김 0중령, 부대대장은 윤기옥 대위였고 특별히 내가 3중대장 당시 소대장들 은 이준, 이 성일, 정 현모, 홍 성달 소위들이었음을 기억해 낼 수가 있다. 이 이외에도 나 를 잘 따르던 기갑 초등군사반 동기생인 오 창기, 장 창하 및 노 정기 중위들과 또한 같이 중대장을 하던 동료 이 창남, 최 철규, 박 인규, 엄 순환, 이 승우 대위 등이 기억에 남는다. 특별히 여러 사람 중에서도 이 준 중령은 나와 소대장부터 시작하여 주 월남한국군사령부 비서실 행정과장으로 일할 때까지 여러 번 같이 근무를 해서 길고도 질긴 인연으로 맺어졌 다. 감사한 것은 20대 초반에 만나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지금까지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 하고 있다는 것이다. 휴전 직후인 자유당 시절은 전쟁 때 보다 더 모순이 심했고 부조리가 만연했다. 그 당시는 24인용 군용천막 몇 개를 치고 대대를 창설하였고 정상적인 예산 및 물자보급이나 기술지원 없이 부대막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주로 근처 산에서 벌목하여 기둥을 세우고 철조망을 잘 라 못을 만들고 흙벽돌을 찍어 막사를 짓고 꼭 필요한 물자는 미군부대에서 얻어 오거나 그 것도 안 되면 훔쳐오는 도리밖에 없었다. 상급부대는 아무런 지원함이 없이 예하부대에게 무에서 유를 창조하기를 지시하고 요구하 다 보니, 필요한 물자나 예산이 없는 예하부대는 자대가 보유한 군수물자를 팔아 필요한 물 자를 조달할 수밖에 없었다. 쌀이나 휘발유를 각부대가 알아서 처분하는 관행을 이용하여 일부 지휘관들은 사욕을 채웠기 때문에 군대의 부정은 날로 더 심해져 갔다. 상급부대에서는 부정을 조장할 수밖에 없는 여건을 만들면서도 한편 부정을 하면 엄벌하겠 다는 모순된 지시를 내리는 혼란의 시기였다. 그러나 이것은 상급부대의 모순이라기보다 6.25전쟁으로 온 국토가 완전히 폐허가 되어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을 치는 시기였기 때문에 우리 민족이 겪어야만 했던 슬픈 운명으로 돌릴 수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당시 부정한 군의 보급실태에 대한 한 단면으로 전차대대의 경우를 보면, 연료를 보급 받을 때 일단 보급소에서 한 드럼 당 53개론씩의 정량에서 5개론 식을 뽑아내고, 전차대대 의 작전배속의 상급부대인 군단에서 보급량의 30%를 빼가고 또한 수사기관에서 10%를 빼 간 나머지 50%미만의 량만 보급을 받는 형편이었고 다른 보급품도 거의 예외가 아니었다. 더욱이 부정을 단속해야할 군 수사기관은 오히려 한술 더 떠서 부대를 찾아다니며 흥정을 해서 자기들이 호위하여 후방지역으로 보급품을 빼돌려 나누어 먹기를 할 정도였다. 실제로 우리 대대의 예를 든다면, 22대의 전차, 2대의 트럭, 1대의 지프차로 장비 된 전차 중대에 월간 휘발유 30D/M정도밖에 보급해 주지 않았다. 결국 연료 1드럼으로 전차 1대를 한 달 동안 운영해야 하는 실정이니 전차의 시동도 여간하여 걸기가 어려웠고 기동훈련은 1 년에 한두 번밖에 할 수 없었다. 결국 각 중대는 전차에 보충할 연료는 부족했고 검열에 대비는 해야 했기 때문에 비상한 아이디어를 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원통형 특수 파이프를 제작하여 연료 주입구에 꼭 맞 게 끼어 넣는 것이었다. 검열관이 연료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긴 나무 자(尺)를 연료 주 입구에 넣어 찍어볼 때 연로가 가득 차있는 것으로 보이기 위한 완전한 눈속임이었다. 그러 나 일단 전차를 30분 이상 시동을 걸거나 기동시킨다면 30분 이내 모든 전차는 시동이 꺼져 멈쳐설 수밖에 없었다. 대대장은 중대가 보유한 트럭 2대중 1대는 운영용으로 사용하고 1대는 중대장 임의로 공공 연하게 후생사업용으로 사용하는 것을 승인해 주는 것으로 인심을 썼다. 중대들은 트럭 1대 를 한 달에 얼마 식을 받고 후생사업용으로 민간업자에 내 주고 그 돈을 주로 하사관 이상 의 생활보조금으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나는 부대로부터 약20km 후방인 동두천에 가족이 거주할 방을 얻었는데 당시 동두천은 온 통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판자 쪼가리나 종이박스 따위로 지어진 판자촌이었고 대부분이 양 공주 집들과 구멍가게 그리고 술집 및 댄스홀들로 형성되어 있었다. 옆집들은 양공주들이 사는 집들이라 한 발작만 나가도 양공주들로 북적거렸다. 아내가 첫 딸 효숙이를 안고 문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양공주들이 몰려들어 한 번씩 아기를 안아 보고 싶어서 난리들이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살수밖에 없었던 것은 돈을 주고도 그런 곳이 아니 고는 살 수 있는 집이 없어서였다. 연년생으로 둘째 아이를 임신한 아내는 살림이 궁핍하여 제대로 먹지를 못하여 얼굴이 붓 는 지경에 이르러서 결국 아내는 양공주들에게 주사를 놓아주고 푼돈을 얻어 살림에 보태었 다. 동두천에서 첫딸 효숙의 돌을 맞아 서울의 부모님들이 고모님과 고종 사촌 누이동생인 현 숙이를 데리고 아이의 돌 옷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준비해 오셔서 돌잔치를 지날 수 있었 다. 우리가 세 들어 사는 판자 집의 주인아주머니는 교회의 권사인데 아들은 전문적인 미군부 대 털이 꾼 이었다. 우리 중대 소대장 중에 건장하고 날쌔고 배짱이 좋은 함경도 출신인 이 소위가 있었는데 가끔 중대장인 나에게 술도 잘 사고 중대 운영에 보태라고 돈을 내놓기도 하고 필요한 물자 를 얻어 가져오기도 하면서 귀염을 떨었다. 나는 부하인 그에게 종종 도움을 받으면서도 '저 녀석이 돈을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구해서 이렇게 흔하게 쓰나?' 하고 늘 궁금하게 생각했다. 어느 날 술자리에서 술이 거나하게 취한 이 소위가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는 내가 퇴근한 후, 부대 트럭을 가지고 나가서 다른 부대 보급품을 상습적으로 탈취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정말 가관이어서 완전히 황해도 산골에서 임 꺽정이 서울 가는 양반들 을 털었다는 옛날이야기의 6.25판이었다. 그는 부대 차량을 경사가 심한 언덕길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다 숨겨 놓고서 다른 부대의 보급차량이 언덕을 기어올라가느라고 속도가 떨어질 때 날쌔게 트럭 뒤로 올라타서 보급품을 밖으로 집어던졌다가 보급 트럭이 언덕을 넘어가면 우리 부대 트럭을 몰고 가서 주워 다 팔아먹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갖가지로 다른 부대 보급품을 탈취하는데 한번은 자동차 타이어를 내려 던졌더니 타이어가 이리저리 튀고 언덕 으로 굴러 내려가서 아무리 애를 써도 다 걷어오지 못했다며 무척 아쉬워하는 얼굴이어서 우리는 모두 배꼽을 잡았다. 또 야간에는 우리부대 근처 한탄강을 끼고 주둔한 미 공병부대에 들어가 강가에 쌓아둔 목 재를 한탄강으로 던져서 떠내려가게 해놓고 4km 떨어진 베이비스교(다리)에 미리 사병들을 배치했다가 건져서 트럭에 싣고 가서 팔아먹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그는 말만하면 구해 오지 못하는 물건이 없을 정도였다. 또한 어떤 장교는 미군과 짜고서 철로 변에 따라 설치된 미군용 송유관에서 연료를 뽑아 미군용 트럭으로 서울까지 운송하여 팔아먹기도 하였다. 엄격히 따지자면 이 소위가 한 짓은 당연히 군법회의에 회부될 일이겠지만 그 당시는 올바 른 짓이 아니라는 것은 알아도 그렇다고 양심에 가책이 될 큰 범죄행위로 생각하지 않고 어 떤 면으로는 모든 사람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현실이었다. 그래도 재주껏 각자가 알 아서 꾸려 가지만 재주가 없는 사람에게 조금 식이나마 나누는 의리도 있었다. 아마도 그렇 게 하지 않고서 공식적으로 주어지는 것으로는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라는 것을 모두가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싶었다. 전방근무 1년 반 후인, 1956년 8월에 기갑학교 고등군사반 입교 명령을 받았다. 이 당시 전속명령을 받았을 때, 가장 어려웠던 문제는 교육을 끝마친 4개월 후에는 근무지가 다시 전방이 될지 아니면 후방 어디가 될지 예측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다음은 부임지에 가서 집 을 얻는 문제였고 더욱이 후방으로 간다면 비싼 방세가 문제였다. 다행히도 광주로 전출을 갈 때는 교육받는데 고생이 될 것이라고 대대장과 각 중대장들과 나를 따르던 오 창기 보급 관이 각각 쌀 한 가마 씩 다섯 가마를 주어 그것을 팔아 광주에서 셋방을 얻을 수 있었다. 그래도 전방은 후방과는 달리 이런 후한 상부상조의 인심이 있었다. 2. 가난과 향락 그 해 8월말의 아주 무덥던 어느 날 이사라고 할 것도 없는 옷 보따리 1개, 밥 끓여먹을 냄비 등 식기 꾸러미 1개를 가지고 둘째 딸 진숙이를 출산한지 100일도 안 되어 광주로 이 사를 했다. 아내는 돌을 지난 효숙이를 등에 업고 진숙이는 앞으로 안고, 나는 이사 짐 보따 리를 어께에 메고 들고 광주에 도착하였다. 광주는 6.25 전쟁기간에 설치된 상무대로 인하여 거대한 군사교육기지가 되어 도시가 한층 더 활성화되어 있었다. 당시 상무대란 육군의 보병, 포병, 기갑 및 통신의 병과학교가 위치 하여 장교양성 및 재교육의 산실이며 요람이었다. 수많은 장교들이 이곳을 거침으로서 젊은 시절 궁핍한 생활과 관련되는 애환과 많은 추억을 남기게 되었으며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 다. 후방지역 근무는 육체적으로는 편하고 문화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이점이 있으나 경제적 인 축 면에서 어려움을 겪는 생활이었다. 특히 군대생활에서 계급의 고하를 막론하고 교육 을 받는 기간이란 배고프고 피곤한 기간이라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광주시내의 외각 지역인 학동에 월세 방 하나를 얻어 사과상자를 찬장으로 하고 살 림을 차렸다. 아내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내가 전방에서와 달리 정시에 출퇴근을 하고 한 달 에 한두 번이라도 영화를 관람하는 것으로 즐거워했다. 기갑학교 고등군사반에 입교한 나는 4개월의 교육을 이수하면서 아깝게 수석을 놓치고 2등 으로 수료하였다. 수료생들의 관심사는 당연히 '전방이냐? 후방이냐? 어떤 부대냐? 직책은 어떤 것이냐?' 등의 인사명령에 관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먹고사는 것과 직결되는 문 제였기 때문이었다. 재주가 있는 자는 자기의 보직을 이미 스스로 조정하고 안심하고 있는 자도 있었다. 나는 누구도 가기 싫어하는 대전에 위치한 교육총본부로 발령을 받았다. 교육총본부는 고 급사령부이기 때문에 나와 같은 하급 장교는 비벼댈 언덕이 전혀 없는 빡빡한 부대였고 대 전은 나로서는 아는 사람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는 생판이라서 그야말로 쌀 한 톨을 꾸어 볼 수도 없는 곳이었다. 더욱이 광주로 이사 온지 5개월도 안되어 또다시 대전으로 이사를 간 다면 셋방을 얻을 돈도 없었다. 이 당시 대위의 봉급은 독신 장교가 부대의 독신 장교 숙소에서 지나면서 생활하는 용돈에 도 못 미치는 액수였으니 우리와 같이 어린애가 둘이나 딸린 네 가족이 생활하기란 거의 불 가능해서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결국 나는 가족을 광주에 남겨두고 나 혼자 대전에 가서 근 무하다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광주 기갑학교로 되돌아오는 계획을 세우고 학동의 셋방보다 방세가 더 싼 지산동이라는 산 밑 동네로 식구들을 이사 시켜놓고 임지로 부임할 수밖에 없 었다. 나는 독신 장교 숙소에서 지나면서 매주 토요일만 되면 광주로 내려가곤 하는 생활을 했다. 아마도 이 때가 우리가 결혼하여 가장 어려운 생활상황이 아니었던가 싶다. 나는 상관 에게 나의 처지를 통사정하여 다행히도 4개월만에 기갑학교로 전속되어 가족과 다시 합류하 게 되었다. 1957년 4월 나는 학술학과 교관으로 보직을 받았다. 당시 기갑병과 장교 중에는 나와 같이 보병으로 최 일선에서 전투를 체험한 장교가 그리 많지 않아서 내가 담당하는 교육훈련 과 목마다 실전경험을 가미하여 실시하다 보니 나는 점차 인기 있는 교관으로 부각되기 시작하 였다. 그러나 나와 같이 배경도 없고 줄도 없고 재주도 피울 줄 모르는 교관으로 보직된 자 들의 생활상은 무척이나 비참하였다. 결혼한 장교의 경우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학교식당에서 아내와 자식들에게 줄 끼니를 위해서 반합에 밥을 가득 얻어 가지고 가야 하는 형편이었으니 동냥이나 다를 바 없는 비참 함이었다. 도대체 어느 나라 장교가 처자식을 먹이기 위해 밥 동냥을 하는 군대가 이 지구 상에 있단 말인가? 찢어지게 가난했던 위관장교(자유당 시절)의 생활상 이야기가 나왔으니 조금 더 이어보기로 하자. 아내는 거의 매일같이 점심을 무안 고구마나 참외로 때웠고 내 아침밥에는 되도록 쌀 을 많이 넣고서 자기는 꽁보리밥을 나 몰래 먹었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내 생일날 고기 국을 끓여 주기 위해 한 벌밖에 없는 비로도 치마를 전당포에 잡혀야 했다. 겨울철에는 여 름옷을 여름철에는 겨울옷이 전당포에 가 있는 것이 상례였고 나들이옷이 없어서 치마를 빨 아 말리는 동안 속옷바람으로 집에서 지내야하는 생활이었다. 후일 아내는 이런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었다. 당시는 모처럼 계란을 살 경우라도 한두 알씩 사거나 많이 사야 세 알을 샀는데 어느 날 나를 따르는 후배 노정길 중위의 장모님이 시골에서 계란을 가져오셨다고 계란 다섯 알을 선물로 가져왔다. 그 중에 세 알을 후라이 해서 내 밥상에 올려놓으면서 1개는 자기 몫으로 남겨 놓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눈치 없이 3개를 단숨에 다 먹어치우더라는 것이다. 아내는 계란이 먹고 싶기도 했지만 내가 자 기를 전혀 생각지 않는 것이 너무 서러워 부엌에서 마냥 울었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서도 어린 두 아이를 키우면서 효숙이는 업고 방바닥을 이리저리 기어다니는 진숙이는 포대기 띠로 매어 책상다리에 묶어 놓고 밖에서 일을 해야 했으며, 아이들을 키우 면서 귀저기 감은 다 해진 속옷으로 대신했다. 다행이 우리 아이들은 큰 병치레가 없었지만 민 대위의 아이가 수술을 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고도 돈이 없어 부부가 아이만 끌어안고 울 고 앉아 있던 모습을 목격했을 때의 광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이러한 처지에서도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고 충실히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한 그 당시 장교 들의 군인으로서의 태도를 후대의 사람들이 알아주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당시 주로 독신 장교들이 봉급날만 되면 퇴근하지 않고 사무실에 남아서 화투를 가지고 짓 고땡과 섰다를 하는 일이 많았다. 나도 구경하다가 끼게 된 것이 그만 노름에 빠지고 말았 다. 쥐꼬리만한 봉급이었지만 그나마 없으면 큰일인 봉급을 몽땅 걸어 놓고 하는 노름이어 서 우리들로서는 큰판인 셈이다. 독신 장교들은 봉급을 몽땅 잃으면 아무 곳에서나 끼어 자 고 밥은 부대에서 얻어먹고 한 달을 지냈고 돈을 따면 댄스홀과 당구장 등에서 향락을 위해 사용했다. 그러나 가족이 있는 나 같은 경우는 만일에 돈을 잃었다가는 큰 일이 나는 것은 뻔한 이치 였다. 그런데 나는 운이 좋았던지 주로 따는 쪽이어서 한번은 야전잠바의 4개 호주머지에 지폐를 가득 채워 넣고도 남아 허리를 동여매는 잠바의 허리끈을 바짝 매고 잠바 속으로 돈 을 가득 집어넣을 정도로 따 본적도 있었다. 물론 노름에서 딴 돈으로 살림에 도움을 주어 다소 여유를 갖게 된 것도 사실이었지만 문제는 노름에 계속 빠져들게 되어 근무도 소홀해 지며 생활태도가 달라지는데 있었다. 아내는 굶는 한이 있어도 놀음에서 손을 떼라는 간청 을 했지만 이미 노름에 빠진 내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1958년 5월 나는 교관 직책을 면하고 일약 학교의 정보참모로 발탁되었다. 그런데 이 직책 은 납품되는 모든 구매물품의 검수관을 겸하게 되어있어서 간혹 납품업자들이 집어주는 용 돈도 얻어 쓰게 되었다. 이 무렵 나는 납품업자들이 주는 용돈으로 화투에서 한 발 더 나아 가 Poker game에 손을 대기 시작하여 희비가 엇갈리는 생활을 2년이나 계속했다. 그러나 노름판에서는 항상 돈을 딸 수만은 없는 법이기 때문에 어떤 때는 봉급마저 다 날 리고 집에서 끼니를 걱정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 서무계로 있던 이 강열 병장(전남도 부교육감)은 재주가 좋아서 어디서 돈도 마련하여 나에게 꾸어주기도 하고, 우리 집에 쌀도 사다 주고 하였다. 그러나 내가 그에게 해줄 수 있었던 것은 사병으로 근무하면서도 조선대 학교 야간부에 다니는 어려움을 다소 돌보아 준 것과 돈을 땄을 때 필코 트란지스타 라디오 1대를 사준 것뿐이었다. 그래도 그는 나를 많이 따라 제대 후, 그가 결혼식을 올릴 때는 우 리부부가 해남까지 내려갔었고 그 후 광주의 서석동에서 살 때는 친형제처럼 같이 지내면서 효숙이와 진숙이를 몇 주간 씩 맡기고 다니기도 하는 사이었다. 4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우 리는 서로 그리워하는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어느 날 밤 노름판에서 최악의 상황이 찾아와서 봉급을 다 털리고도 끗발이 오르지 않아 밑천이 다 떨어졌다. 이 무렵 나는 클래식 음악에 심취되어 있어서 돈을 땄을 때 녹음기 1 대를 구입해서 그 녹음기가 제니스 라디오를 제치고 우리 집 재산 목록 1호가되었다. 나는 노름꾼의 심리대로 본전 생각이 나서 집에 몰래 숨어들어 잠자고 있는 아내 모르게 벽장 위에 있는 녹음기를 끄집어 내렸다. 방문을 살며시 열고 막 나가려는 순간 자는 척하 고 내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던 아내가 갑자기 내 발목을 잡고 '이것만은 안 된다'고 붙들고 늘어지는 것이었다. 아내 몰래 녹음기를 훔쳐서 나가려던 작전이 일단 실패로 돌아갔기 때 문에 급히 작전을 바꾸어서 이번에는 아내에게 "금방 본전만 찾으면 돌아오겠다."고 통사정 을 해보았다. 그러나 이제까지 순순하기만 했던 아내가 이번에는 전과 달리 완강하게 안 된 다는 것이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아내의 얼굴을 후려치고 녹음기를 들고 나갔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끝내 끗발이 오르지 않아 그 날의 노름판에서 빈손으로 돌아와 야 했다. 도저히 아내의 얼굴을 볼 낯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추운 겨울밤에 달리 갈 곳도 없 는 처지라 완전히 기가 죽어서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 옷을 벗고 아내 옆에 누웠다. 아내는 얼마나 울었는지 내가 옆에 누워도 말 할 기운도 없는 듯했다. 나도 아무 할 말이 없어 말 은 못했지만 그 순간에 나는 '내가 다시 노름을 하면 성을 갈겠다.'고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3. 주전야독(晝戰夜讀)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은 6.25전투에 참가했던 학생들의 학업에의 복귀와 불이익을 해결해 주기 위해서 각급 학교는 복교하는 학도들에게 특별한 배려를 하고 군 복무 중 학년진급이 누락된 학생은 본인의 희망에 따라 학년진급을 인정하도록 훈령을 내렸었다. 나는 이 훈령을 근거로 하여 서울의 모교인 동성고등학교에서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고 1959년도에 조선대학교 법정대학 정치외교학과 야간부에 입학하였다. 이 당시 장교들 가운데 특별히 눈에 뛰게 나타나는 두 부류가 있었는데 하나는 어려운 여 건에서라도 못 다한 학업을 계속하고자 주전야독 하는 장교들이 있었는가 하면 정반대로 전 후 한참 유행하는 댄스와 여자 및 당구 등 향락에 빠진 장교들이 있었다. 나는 하루 8시간의 근무가 끝나고 저녁 5시 반에 퇴근 트럭을 타고 곧 바로 조선대학으로 가서 저녁 6시 반부터 90분 짜리 3강좌를 듣고 밤 11시가 넘어서야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 가곤 했다. 오랜 동안 공부와 거리가 먼 생활을 했던 터라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아 힘들긴 했지만 언 젠가는 배운 지식을 활용할 날이 오리라는 것과 대학졸업장이 유용하게 쓰일 것이라고 생각 하고 열심히 했다. 군대생활을 하면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는 후방근무를 하는 이때가 아니 면 어렵기 때문에 바로 이 기간이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기회라고 생각하고 나름대로 노력 하였더니 옛날 학교 다닐 때의 즐거움과 보람을 되찾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입에 풀칠하는 것조차 힘든 여건에서 독신도 아닌 네 가족의 가장이 공부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무리여서 우선 학비를 마련하는 일이 문제였다. 그런데 "하늘이 무너져 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는 속담과 같이 다행히 서울의 부모님이 외숙부와 같이 가내 과자 공장을 경영하여 경제적으로 다소 여유가 생기기 시작하여 나의 입학금과 학비를 대 주실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산 넘어 산'이라더니 1958년 8월 28일 셋째인 장남 정민이가 태어났다. 우리 부부 보다도 집안의 장손을 보았다는 부모님들의 기쁨은 대단하였지만 그 기쁨도 잠깐이고 아이 들이 셋이나 되고 보니 앞날에 대한 걱정이 태산이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내가 공부해야 한다는 핑계로 장녀인 효숙이를 부모님들이 맡아 키워주시기를 부탁하여 그 때부터 효숙이 는 할머니 손에서 자라났다. 자식까지 떼어놓고 보니 나는 흘러가는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겠다는 일념에서 더욱 더 열심히 공부에 몰두했다. 그러나 때로 몹시도 지치고 피곤한 날 춥고 배고픈 처지에서 고사 리 같은 자기자식을 키우지도 못하면서 밥상을 펴놓고 공부하는 내 자신이 너무나 처량해 보였고 "이 고생을 해서 무엇 하나?" 하는 회의에 빠지기도 하였다. 또한 그 동안 같이 놀음 을 하던 노름꾼들의 유혹을 뿌리치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이렇게 놀자고 유혹을 하는 것은 애교가 있는 것이지만 군 내부에서도 자기 여가를 선용하여 공부하는 소수의 장교들을 비난하는 분위기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나의 책 무를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오직 내 개인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자유시간인 퇴근 이후 의 시간을 활용했을 뿐이었다. 59년 초에 학교장으로 류병현 대령(대장, 주미대사)이 부임하였다. 류 교장은 원래가 보병 병과 장교였지만 도미 군사유학을 보내는 초창기에 미 기갑학교 고등군사반에 보낼만한 기 갑장교가 없어서 기갑장교 대신 보내졌고 미 참모대학까지 수료를 하였으며, 연대장을 역임 한 직후 기갑병과의 어지러운 상황을 정리하라는 육군 고위층의 특별한 뜻에 따라 기갑학교 장으로 부임했던 것이다. 류 교장이 부임하여 학교의 부조리를 제거하고 기강을 바로잡는 단계에서 나는 학교 본부 사령으로 발탁되어 보직을 받게 되었다. 본부사령이란 학교 전반적인 살림살이와 학교 지휘 부 요원의 살림을 뒷바라지하는 직책으로 비공식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업무가 많았다. 직책 이 그렇다보니 자기가 하기에 따라서는 떡고물을 주어 담을 수도 있어서 많은 장교들이 눈 독을 드리는 자리였지만 나의 생리에는 맞지 않는 자리였다. 나는 보직 받은 지 10개월만에 교장에게 상신해서 다시 학술학과 교관으로 되돌아갔다. 정상적으로라면 59년 9월 1일부로 소령이 되었어야 했지만 해가 바뀌어 1960년도가 되어 3월 1일부 진급에도 내 이름이 빠졌다. 첫 번째 해당되는 연도에는 진급이 안 되어도 그냥 넘길 수 있었지만 두 번째에도 진급이 되지 않자 나는 희망을 잃어 버렸다.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이 당시 진급은 물 좋은 자리에 보직되어 윗사람에게 가져 다 받치고 아부를 잘하는 순서로 진급이 되는 것이 자유당시절의 일반적인 실태였으며 기갑병 과는 특히 심했다. 나는 군대생활에 대한 심한 회의와 혐오증까지 갖게 되어 절망에 빠져들게 되었다. 더욱이 몇 개월 후면 우리에게 또 하나의 자식이 태어나 네 아이의 아버지로서 여섯 식구의 살림을 꾸려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군에 남아서 생활해 나갈 수가 없다고 판단되어 군복을 벗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군대를 떠난다 해도 나가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도 아 니고 특별한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막연하지만 장사 밑천으로 1000만환만 있으면 무 엇인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군인으로서 1000만환이란 돈을 만드는 방법은 부정을 하지 않는 한 오로지 한 길 즉, 미국 군사유학 중에서도 제일 긴 장기과정(1년)을 택하여 유학기간 동안에 돈을 절약해서 모으는 방법 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1,000을 목표로 유학의 길을 택하기로 했다. 4. 돈 벌러 유학가다 나는 도미유학시험 준비를 위하여 우선 영어공부를 해야 할 시간과 학비 때문에 4월초에 일단 조선대학을 3학년 초에서 휴학계를 제출하였다. 퇴근 후 광주시내에 있는 영어학원에 서 일일 4시간을 수강하고 특별히 군사영어와 회화를 위하여 나와 절친한 통역장교인 정 중 위를 주말에 집으로 불러서 개인교습을 받는 등 6개월 후인 9월에 있을 도미유학시험에 응 시하기 위하여 전력투구하였다. 도미군사유학시험은 1차로 육군본부 주관 하에 육군의 전 병과공통으로 필기시험을 실시하 고, 합격기준선에 합격한 인원 중 각 병과별 과정별로 2배수를 선발하여 부관학교에 설치된 군사영어 반에 입교시켜 3개월 반의 영어 교육을 시킨 다음 다시 최종 선발과정에서 확정인 원을 선발한다. 그런 다음에 미국으로 출발하기 1개월 전에 미 군사고문단에서 최종 인터뷰 를 하여 합격해야만 해당 미 군사학교 입교 명령이 발령되게 되어 있었다. 이렇듯 어려운 도미군사유학시험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1960년 7월 25일 넷째인 차남 상 학이가 태어났다. 원래의 이름은 정철이었으나 어렸을 때 병치레가 심하여 상학으로 개명한 것이다. 여하간에 이제 우리부부는 네 아이를 갖게 되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둘째인 진 숙이도 언니 효숙이를 따라 서울로 올려 보낼 수밖에 없었다. 1960년 9월15일로 도미 유학시험일자를 받아 놓고 상경준비를 하고 있는 이틀 전인 13일 꿈에도 생각지 못한 큰 시련이 닥쳐왔다. 아내는 낳은 지 2개월도 채 되지 않은 갓난아기인 상학이를 방에 재워놓고 아침나절에 빨래를 하려고 나오려는데 세 살배기 정민이가 자고 있 는 아기의 손과 얼굴을 만지작거려 잠을 깨울 것 같아 밖으로 불러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 다. 아내는 정민에게 "너 고구마 장사 불러올 수 있어?" "고구마 사려! 고구마 사려! 하는 아 저씨 말이야" "응 알아" "그럼 대문밖에 나가 앉아 있다가 고구마 장사 아저씨가 지나가면 불러올래?" "응" 아내는 정민이가 대문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정신 없이 빨래를 다 끝내고 나서 불현듯 아이 생각이 나서 대문 밖으로 나가 보았으나 그 자리에 앉아 있어야할 정민이가 보이지 않 는 것이었다. 아내는 온 동네를 이리저리 다니면서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자 급기야 근무 하고 있는 나에게 연락을 하였지만, 내가 연락 받은 시간은 이미 아이가 실종되고 3시간 이 상이 흘러간 뒤였다. 나는 급히 조퇴를 하고 시내로 나와 광주경찰서에 가서 각 파출소에 미아신고가 들어온 것 부터 확인하였으나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아이가 입었던 옷을 확인한 다음 다시 부대로 돌아가 지프차를 빌려 동료 두 사람과 같이 광주시내를 뺑뺑 돌며 찾아보았지만 허 탕을 치고 날이 저물었다. 이튿날 학교에서 아이를 찾는 전단 수 백장을 등사하여 우리 학술학과 사병 3명과 교육이 없는 장교들이 광주시내로 가지고 나와 전봇대에 붙이기도 하고 각 초등학교마다 들려 아이 들에게 전단을 나누어주는 등 수소문하면서 찾아보았다. 한편 나는 광주 라디오 방송국에 찾아가서 아이를 찾는 방송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 아내는 두 달밖에 안된 상학이를 업고 미친 사람모양 주인 집 아주머니와 광주외각까지 다 니며 찾았으나 허탕이었다. 이렇게까지 해도 아이를 찾지 못하게 되자 우리는 아이가 길을 잃은 것이 아니고 누군가가 아이를 납치한 것이 아닌가 하는 불길한 생각이 떠오르게 되었 다. 그 당시는 광주도 밤12시가 넘으면 전기가 끊어졌기 때문에 우리부부는 이틀 밤을 꼬박 뜬눈으로 촛불을 켜놓고 새웠다. 삼일 째가 되는 날 오후에 방송국에서 제보자가 있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허겁지겁 동료 한사람과 같이 지프차를 타고 방송국에 달려가 제보자를 만났더니 넝마주이였다. 넝마주이 가 안내하는 대로 따라가 보니 넝마주이의 어두운 방안에 정민이가 혼자 앉아 있었다. 정민이를 본 순간 나는 이 세상을 다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보물 덩어리를 다시 찾은 듯했 다. 정민이는 나와 엄마 품에 안겨서도 겁에 질린 충격 탓인지 끝없이 소리내어 울어댔다. 아내 역시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정말로 헤어져 보지 않은 사람은 혈육의 정이라는 것은 알 수가 없을 것이다. 넝마주이는 사흘 전에 아이가 다리 위에서 울고 있어서 데리고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함 평에 사는 부자 집에서 부모가 없는 사내아이가 있으면 데려오라고 하여 내일 데려다 줄려 는 참이었는데 옷차림새와 다리에 부스럼이 난 것 등이 라디오 방송에서 찾는 아이 같고 연 락처가 부대이기에 군인의 아이인 것 같아 제보를 했다는 것이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니 가슴이 철렁했다. 만일 하루만 늦었어도 또한 연락처를 부대로 하지 않았어도 우리는 정민이를 영원히 잃어버리고 한평생을 한과 죄책감을 안고 살고 있었을지 도 모를 일이었다. 아마 정민이는 고구마 장사가 안 오니까 고구마 장사를 찾으러 아장아장 걷다 보니 집이 멀어져 길을 잃어버렸고 넝마주이는 아이를 데려다 돈 받고 팔려다가 군인의 자식인 듯싶어 후환이 두려워 제보를 한 것 같았다. 하여간에 잃어버렸던 정민이를 찾아 우리가 한 가족으 로 살고 있음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감사할 따름이다. 그런데 아이를 찾느라고 난리법석을 떠는 사이에 도미유학시험일자가 지난 것이다. 물론 정신 없이 아이를 찾아다니는 와중에서도 시험일자를 잊어버리지는 않았지만 아이를 찾지 못한 체 시험을 보러 갈 수는 없는 일이어서 1년에 한번밖에 없는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었 다. 일단 아이를 찾고 나니 그간 목표를 향해 전력투구했던 지난 6개월이 허사가 되어버렸다는 생각에 나는 마치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마음이 공허해졌다. 아내는 괴로워하는 내 마 음을 읽고서 '미국 갈 기회를 놓친 것과 정민이를 잃어버린 것과 어찌 비교할 수 있겠는가? 내년에는 틀림없이 합격될 것'이라고 위로를 했다. 그래도 또다시 1년을 기다려야 할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9월에 실시된 시험에 합격자가 미달되어, 3개 월 후인 12월 15일 모자라는 합격자를 보충하기 위해서 도미유학시험이 추가로 실시된다는 것이 아닌가? 결과적으로 나처럼 자신이 없는 사람에게 오히려 준비할 시간을 더 준 셈이 되어서 더 철저하게 준비하여 시험에 합격되었으니 이것도 역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생각 할 수밖에 없었다. 1차 관문을 통과한 나는 1961년 1월 30일부터 경상북도 영천에 있는 부관학교 군사영어 반에 입교하여 약 3개월 반에 거처 영어교육을 받게 되었다. 군영 반 56기에 입교한 학생은 총60여명으로 1개 반 20명 식 3개 반으로 편성되었는데 대 부분의 학생들이 중, 대위로서 독신 장교들이었고 기혼자는 나를 비롯한 10여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놀란 것은 대부분의 학생들 영어수준이 높아서 그 중에는 영어회화를 잘하는 학생도 있었다. 등교하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8시간 영어만 수업했는데 처음에는 중학교 2학년 수준의 기초 부터 시작하더니 2주만에 Readers Digest가 나오는 판이라서 정신이 없었다. 퇴근 후에는 저녁밥을 먹자마자 부대밖에 교관들이 개인의 부업으로 설치한 영어학원에서 돈을 주고 과외공부를 3시간을 해야만 하고 그 날 학습한 과목에서 100개 이상 식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단어를 찾아 정리와 함께 복습과 예습을 하다보면 새벽 1-2시가 되는 것은 보통이었지만 그렇게 해야만 겨우 따라갈 수 있어 나는 비장한 각오를 하지 않을 수 없었 다. 한마디로 밥 먹는 시간과 하루 5시간의 잠자는 시간외는 온통 영어와 투쟁해야하는 시 간이었다. 2주간을 지내고 보니 아내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해서 아내에게 1주일 내로 영천으로 오라 고 전보를 쳤다. 아내도 바라는 바였기 때문에 냄비와 밥그릇 몇 개 그리고 옷가지를 싼 보 따리를 꾸려가지고 출산한지 6개월 된 상학이는 업고 정민이는 걸려서 기차를 타고 영천으 로 왔다. 그 당시 학교 앞에는 피 교육생들의 하숙과 셋방을 놓기 위해 논바닥에 판자 집들을 지었는 데 우리도 그 셋방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2월 중순. 영천의 겨울바람은 정말로 날카로운 칼 날 같은 바람이었다. 논바닥에 판자로 지은 집이다 보니 방안의 위풍은 심했고, 솔가지 나무 를 사서 군불을 지펴야하는 아궁이에는 물기가 있어 불어대는 바람과 함께 역으로 내뿜는 연기로 불을 땔 때마다 질식할 정도였다. 아내는 하루 세끼 더운밥을 해 대고 밤참도 준비하고 내가 일어나야 할 시간에 나를 깨워 주었다. 간식과 밤참은 주로 사과였는데 사과 고장인 그곳에서도 온전한 사과를 먹어보지 못한 것으로 보아 그 당시 생활상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4월 중순 졸업을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에서 공부하는데 지나치게 무리를 해서 나는 심한 몸살을 앓아 3일간을 출석치 못했다. 그래도 나는 아내를 나와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는 미 여군학교에 갈 여군장교의 하숙집으로 보내서 그 날 학교에서 진행된 학습내용을 얻어오게 하여, 누워서 꿍꿍대면서도 교재를 보면서 안간힘을 다 쓸 정도로 결사적이었다. 군영 반에서 공부하는 기간에는 토요일도 없고 일요일도 없었다, 특히 토요일마다 닥치는 시험은 지긋지긋할 정도였다. 드디어 영어와 투쟁한 고난의 3개월 반이 지나고 제 2차 선발 시험도 합격하여 8월에 있을 미 고문단의 최종 인터뷰만 남겨 놓았다. 그런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수료한지 10일 만인 1961년 5월 16일 새벽 군사혁 명이 일어난 것이다. 모든 부대는 비상상태에 돌입하고 군 내부는 정군(整軍)을 위한 숙청이 시작되어 혼란한 상 태에 놓이게 되어 우리 부부는 "이 행운마저 우리 손에서 떠나는 것인가?" 하는 한탄으로 한 숨만 내쉬면서 절망의 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약 한달 후인 6월 중순 도미군사유학은 계획대로 실시한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우리부부의 기쁨은 하늘을 솟구 쳐 올라갔다. 5. Fort Knox에서 8월 초의 어느 날 도미군사유학을 떠나기 위해서 육군본부 부관참모부에서 수속을 밟는 중이었다. 행정처리를 담당하고 있던 부관부 김 중위가 갑자기 생각난 듯 "아참, 한 대위님! 진급되신 것 같은데요?" 했다. "오늘 막 8월15일 부 진급 결제가 났는데 제가 소령 진급자 명단을 잠깐 보았거든요. 아직 발간은 안 되었지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아 닌가? 사실 나는 그 당시 진급은 이미 완전히 포기해 버린 지 오래였고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하여 군사유학을 가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관심이 없었다. 나도 심드렁하게 "그래? 한번 확인해 줄 수 있겠나?"했다. 부관부 김 중위는 "잠깐 기다려 보십시오." 하면서 바로 옆 사무실인 진급과로 갔다 오더니 명령서를 베껴서 들고 나오면서 "여기 있네요. 소령 한 인수. 그러면 도미유학 명령도 소령 으로 다시 정정해야겠습니다." 하면서 "한턱 내셔야하겠습니다. 영관으로 진급하시지, 미국으 로 유학 가시지, 이런 경사가 어디 있습니까? "하는 것이었다. 임시계급을 단 연도부터 따진다면 9년 만에 그렇게도 기다리고 힘을 들였던 진급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되어 버렸다니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평생 대위를 면하지 못할 것 같아 아예 포기를 하고 있던 진급이 된 것이다. 나는 그 때 잘 몰랐지만 5.16으로 군 내부에 정군(整軍) 바람이 불어 일대 숙청이 시작되어 어제 진급한 사람도 오늘 쫓겨나는 판이었다. 군대 안에서 문제 인물들이 대거 쫓겨 나가자 자동적으로 그 공간을 메우기 위해서 나처럼 아무 빽도 없고 줄도 없던 사람이 자기도 모르 게 진급이 되는 수도 있었던 것이다. 하여간에 진급은 되었으나 나는 도미유학을 위한 육군본부 대기로 명령이 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진급신고를 할 곳이 없었다. 나는 8월 15일에 육군본부 앞에 있는 군장 점에 가서 소령 계급장을 사서 거울을 보고 내 손으로 계급장을 달았다. 돌이켜 보면 중위 진급은 전 쟁 중에 반창고로 계급장을 만들어 내 스스로 철모에 붙였고 소령 진급은 5.16 통에 내 스 스로 군장 점에서 붙인 셈이니 군인으로서 나의 삶은 국가의 운명과 결부되어 있었던 것 같 다. 진급된 다음 날인 8월 16일 나는 소령 계급장을 달고 미국 기갑학교에 입교할 P대위와 같 이 오산 비행장에서 난생 처음으로 4발 프로펠러 군용 여객수송기에 몸을 싣고 미국 유학의 길에 올랐다. 비행기를 타는 순간까지도 정말 내가 지금 미국을 가는 것인지 믿어지지가 않 을 정도였다. 그 당시에는 한국에서 미 기갑학교까지 가기 위해서는 오산 비행장에서 일본의 다찌가와 (立川) 비행장으로 가서 괌도와 하와이를 거쳐 San Francisco에 도착, 그곳에서부터는 대륙 횡단 기차로 Chicago를 거쳐 Kentucky주의 수도인 Louisville시에 도착하여 자동차로 기갑 센터인 Fort Knox로 가야 했다. 첫 기착지로 일본의 다찌가와(立川) 비행장에 도착해서 모든 것이 이색적인 주변의 모습을 보고서야 비로소 외국에 나왔다는 실감이 나서 넓은 세계를 향한 호기심과 동경으로 설레는 마음을 추수 릴 수가 없었다. 우리는 다찌가와 비행장 내의 미 군사시설의 장교 숙소에서 외국에서의 첫날 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영관과 위관장교에 대한 대우의 격차에 따라 나와 박 대위의 숙소가 분리 배정되었다. 나는 새삼 영관과 위관 급의 대우가 이렇게 다른 것인 가를 실감하게 되었다. 이튿날 두 번째 기착지인 괌도에 내려 군용비행장의 야외식당에서 닭튀김을 먹었는데 생전 처음 먹어보는 닭튀김이 그렇게 맛이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기내 식사 중 그 때까지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우유와 치즈를 먹고 체해서 혼이 난 이후 나는 20여 년 간을 우유와 치 즈를 입에 대지도 않았다. 무려 30시간 이상이 걸려서야 미국의 본토인 San Francisco에 도착했다. '내가 정말 미국 땅을 밟아보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 올랐다. 그림 같은 시가지 내의 공원과 건물들, 아름다운 금문교와 세계3대 미항중 하나인 샌프란시스코의 항구 등 여러 풍경을 보 면서 " 야! 과연 이곳이 미국이구나!" 하는 탄성이 저절로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음 날 나는 샌프란시스코 시내에서 살고 있는 남대문교회 중등부 여자친구인 김 형옥을 10년 만에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결혼을 하여 어린애가 둘이었고 미국에 온지 5년이 되었 다고 했다. 형옥이는 갈비구이에다 잡채와 김치로 밥을 했는데 한국에는 아직 냉장고가 없 던 시절이어서 더운 여름에 냉장고에서 익힌 김치의 맛이 정말 일품이었다. 그녀와 나는 전쟁 이후 10년 만에 처음 만나는 것이어서 그 동안 쌓여 있는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 그 중에서도 그녀와 경기여중 동기동창인 류 미사가 얼마 전에 결혼하여 뉴욕에 살 고 있다는 소식은 왠지 서운하면서도 반가운 소식이었다. 긴 대륙횡단 열차를 타고 4일 만에 Chicago에 도착하고 보니 도무지 미국이란 나라가 얼 마나 큰 나라인가 짐작이 잘 안되었다. 이곳에서 Kentucky Louisville로 가는 기차를 바꾸어 타기 위한 시간이 약 5시간이나 있어 서 시내를 한바퀴 돌아보고 기차역에 되돌아 와보니 우리가 타야할 기차는 이미 떠나고 없 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아니? 기차가 예정 보다 일찍 떠나다니? 미국에서는 이런 일도 있 나?' 싶어서 신통치 못한 영어였지만 역무원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항의를 했다. 역무 원은 우리를 별 놈들 다 보았다는 듯이 우리를 쳐다보더니 "네 시계가 지금 몇 시냐?" 하고 묻는 것이 아닌가? 아뿔사! 우리의 시계가 가르치는 시각은 시카고지역의 시간과 2시간이나 차이가 나 있었다. 우리는 한나라 안에서 지역에 따라 시간이 바뀌는 것에 익숙하지 못해서 기차를 타고 오면서 시간을 마추어야하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우리는 시카고에서 하루 밤을 더 자고 다음 날 기차를 타고서 '혹시라도 마중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하고 마음 조리면서 Louisville역에 도착했을 때 다행히도 우리들의 스 폰서들은 웃는 얼굴로 우리를 마중해 주었다. 허나 나의 눈에는 '이 촌놈들아 그럴 줄 알았 다.' 라고 하는 표정으로 보였다. 미 육군기갑학교는 Kentucky 주의 수도인 Louisville시에서 약 25miles 떨어져 있는 Fort Knox 기갑센터 군사기지 내에 있었다. 기지 내에는 2개 기갑사단과 1개의 기계화 보병사단 기타 지원부대 및 대형 육군병원이 있었는데 영내에 고속도로와 기차철로가 관통하고 있었 으며 미국 연방은행 금 보관소가 영내에 위치하고 있었고 한 큰 도시를 이루고 있었다. 도 대체 영내의 넓이가 얼마나 넓은 것인가에 대해 다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기갑학교에 도착한 첫 날 독신 장교 숙소를 배정 받고 교범과 실습할 때 입을 전투복과 사 용할 장비 등을 지급 받은 다음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영내의 각종 시설들을 소개받았데 극 장, 박물관, 쇼핑센터, 골프장을 비롯한 각종 운동시설 등 갖춘 규모가 엄청나서 과연 '이것 이 미국의 군사시설이 구나'하고 입이 저절로 벌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숙소와 교실도 약 2km 이상이나 떨어져 있었고 보통 다른 시설들도 대부분 멀리 떨어져 있어서 영내이지만 자동차 없이 생활하기란 아주 어려웠다. 미군장교들은 승용차를 타고 다 녔지만 가난한 외국군 장교들은 보통 걸어 다니다가 나중에 몇 사람씩 합하여 차를 사서 타 고 다녔다 내가 입교한 고등군사반 정규과정의 학생 총 200명중에 40명이 23개국에서 온 외국군 장 교들이었는데 월남전이 막 시작되어 월남 장교가 제일 많은 5명이었고 다음으로는 비교적 남미장교들이 많았다. 전원 대위들인 미군장교의 2/3는 기갑장교이고 1/3은 보병장교였으며 자기의 기본 병과 외에 헬리콥터 조종, 낙하산, 또는 특수전 등의 특기를 각기 하나씩 가지 고 있는 점이 특이했다. 본격적으로 학과의 교육이 시작되기 이전에 많은 교범들을 짧은 시간에 소화를 시키기 위 해서 4시간에 거처 속독법을 교육하는데 진행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그야말로 눈알이 팽팽 돌 지경이었다. 군사교범에서 모르는 단어를 찾는 것만 해도 시간이 많이 걸려서 잠자는 시 간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처음 몇 달 동안 hearing이 안 되어서 무척이나 힘이 들었 다. 그러나 기갑학교의 교육방법이 사전 예습 중심으로 짜여져 있고 강의실에서는 토의와 교관이 강평만 하기 때문에 예습교재에 나와 있는 최소한의 필독부분만 잘 이해하면 강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다행히도 대부분의 과목들은 내가 한국의 기갑학교에서 가르치던 것과 비슷했고 교육보조 재료가 워낙 잘 되어 있어서 이해하기가 점점 쉬워져 갔다. 차랑학과 포술학은 주로 실습 위주로 참모학과 전술학은 그룹을 편성해서 각자에게 직책을 부여하여 실습하는 도상 연습 방법이었다. 한국과는 달리 아침 7시부터 학과를 시작하기 때문에 항시 새벽에 일찍 일어나 서둘러야만 학과출장에 늦지 않았다. 겨울에는 8시에 시작을 했는데도 캄캄할 때 일어나서 1교시가 끝 나야 밖이 훤해지곤 하였다. 시험은 주로 실기시험 위주로 치렀지만 필기시험을 볼 때는 외국장교에게는 자기 나라 영 어사전을 쓸 수 있도록 하고 통역관도 입회시켜 주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한국 통역관 이 없어서 일본계 미국인 상사가 들어와서 일어로 모르는 것을 묻고 일어로 설명을 들어야 하는 슬픈 코미디를 연출했다. 교육 기간 중 어떤 과목은 종종 외국군장교는 제외되고 미군만 대상으로 하는 비밀교육이 상당부분 있어서 처음에는 무척 기분이 상했다. 그 때 마다 학교 당국은 외국군장교들에게 는 주로 관광을 시켜주는 배려를 잊지 않았다. 당시 한국군장교의 미국군사유학 비용은 군사원조비 속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월 지급수당 은 1인당 $180이었다. 그 당시 햄버거 1개에 25c, 코카콜라 (적은) 1병에 5c였으니 요즘의 돈 가치로 비교한다면 $1,800-$2,000정도로 보면 되지 않을까 추정된다. 나는 내가 받는 수당 중에 $80을 가지고 생활을 하고 무조건 매월 $100씩을 저축하여 귀국할 때까지 $1,000을 저축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러나 $80을 가지고 교통비, 세탁비, 오락비, 관광비. 학용품비를 쓰고 돌아갈 때 선물까지 구입을 해야 했으니 결국 줄일 수 있는 것은 식비밖에 없었다. 장교식당의 아침 식사가 35c, 점심이 45c, 저녁이 65c였는데 이 돈을 절약하기 위 해서 아침 식사는 도넛 2개에다 뜨거운 수돗물을 틀어서 계란 2개를 반숙으로 만들어 먹고 점심은 통상 햄버거로 때우고 저녁은 주로 제일 값이 싼 닭고기나 소고기를 사다가 삶아서 밥과 김으로 때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김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은 가볍기 때문에 한국에 서 보내기가 가장 쉬었던 까닭이었다. 그러나 장교식당에 전혀 나타나지 않으면 다른 나라 장교들로부터 이상하게 보일까 보아서 가끔씩 장교식당에 가서 식사를 했다. 다행한 일은 남대문교회 중등부 친구인 전승재 군이 켄터키 주립대학에 유학하고 있었는 데 전 군은 아내와 두 아이와 같이 루이빌에 살고 있었다. 나는 특별한 일이 있는 주말을 제외하고는 거의 매 주말을 전 군의 가족과 같이 지나면서 한식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가 난한 유학생활을 하는 친구에게 보탬을 주지 못하고 빈대 노릇을 하고서도 그 다음에 보답 도 못한 것을 지금도 너무나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당시 루이빌에는 한국 가족이 두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또 한 가족은 후에 전 미국 기독교 연합회회장을 지낸 이승만 목사의 가족이었다. 그 부인은 나의 고종누이동생 현숙이와 이화 여고 동기동창이어서 내가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소개를 받았기 때문에 더욱 가깝게 지냈 다. . 1년 간의 미국생활은 군사지식의 기본준칙과 체계를 체득한 것은 물론, 새로운 세계를 발 견하여 신나고, 풍요로움을 만끽하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좋은 이미지만 남긴 것이 아니라 지울 수 없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하는 일도 있었다. 한번은 Fort Knox에서 루이빌로 가는 버스 안에서 일어났다. 나는 사복을 입고 그레이하운 드 버스를 탔는데 백인 운전기사가 앞자리에 앉은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나에게 다가와 거 만하게 흑인들이 앉도록 되어 있는 뒤 좌석으로 가라는 손가락 짓을 하는 것이 아닌가? 처 음 당해보는 인종차별이었다. 그 날 버스를 타고 가면서 울화통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느라고 무진 애를 썼다. 만일 내가 군복을 입고 있었다면 운전사가 그렇게 못했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이 런 곤경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다시는 미국에 있는 동안 외출 할 때는 사복을 입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사실 나는 그때까지 군복 때문에 항상 신경을 쓰고 있었다. 왜냐하면 각국의 장교 들이 나라마다 각기 고유의 군복을 입고 왔는데 한국군은 단지 계급장과 모표와 팔 옆에 붙 인 태극 마크만 달랐을 뿐 미군과 똑 같은 군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같은 군복 에 얼굴 색깔만 다른 것이 한국군이 미군에 종속된 것처럼 보이는 것 같아 자존심을 구기는 창피한 일로 느껴졌던 것이다. 다음은 전차정비 실습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내가 속한 조의 실습을 위해서 배당된 하사 관이 한국에 다녀온 모양이었다. 이 녀석이 실습 시간에 나를 정면으로 쳐다보면서 "X이, X 이 김치? OK?"하는 것이 아닌가? 이번에는 내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실습 중이던 공 구를 집어던지고 한판 붙어 보자고 덤벼들었다. 덩치는 물론 그 녀석이 나 보다 훨씬 컸지 만 나는 이번 기회에 지난번 버스운전사에게 당한 모욕까지 한꺼번에 갚아줄 각오로 주먹을 굳게 쥐었다. 영화에서 흔히 보는 것처럼 미국에서는 싸움이 나면 주변에서 절대로 말리는 법이 없기 때문에 수업 중에 갑자기 싸움판이 벌어지자 멀리 있던 교관이 뛰어 왔다. 교관 은 싸움을 중지 할 것을 명령하고 문제를 파악하더니 하사관에게 사과를 하도록 했지만 나 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유학의 실제목표였던 $1,000 저축이고 뭐고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나는 즉시 숙소로 돌아와 귀국을 하기 위한 짐을 싸기 시작하였다. 결국 학교장이 사과하고 미군 조교는 군법회의에 회부는 것으로서 마무리를 짓기는 하였지 만 그 기억은 영원히 나의 뇌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이런 입맛이 쓴 인종차별의 경험 들 때문에 1962년 귀국한 이후 공직에 있는 동안 미국에 갈 기회가 많았지만 한번도 가지 않았다. 미국 생활을 하면서 가장 부러웠던 것은 남미에 있는 나라들의 장교들이었다. 그들은 마치 공부를 하려 온 것이 아니라 유람을 온 것과 같이 좋은 차를 타고 가족들을 동반해서 생활 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언제 이렇게 좋은 세상을 아내에게 보여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로서는 이런 꿈을 꾸는 것 자체가 환상에 불과한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이었다. 그 러나 그 꿈이 마침내 현실로 이루어져 1996 년 5월, 34년 만에 미국을 다시 방문했을 때 나는 일부러 아내를 대리고 Fort Knox 미 기갑학교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하루 밤을 지내면 서 내가 유학생활을 하던 숙소와 교실을 비롯하여 영내를 두루 보여주면서 옛 추억을 되살 렸다. 결혼 이후 우리 부부는 전 후방을 전전하면서 때로는 끼니를 거르는 군 생활을 하면서도 한번도 떨어져 살아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미국유학을 온지 3개월이 지나면서부터 아내가 몹시 그리워지기 시작했고 특별히 네 아이들 중에서도 첫 돌도 지나지 않은 것을 보고 떠난 막내가 가장 보고 싶었다. 그리움을 달래는 유일한 수단은 오로지 1주일에 한 번씩 정규적으로 주고받는 편지뿐이었 다. 어쩌다가 편지가 몇 일 늦게 와도 초조하고 불안했었는데 어느 땐가 2주 동안 편지가 오지 않아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 무척이나 속을 태웠던 적이 있었다. 1961년 12월 말 2주간의 X-mas 휴가가 주어졌다. 나는 미국을 제대로 보고 가야하겠다는 생각으로 우선 미국의 중심지인 동부의 New York과 Washington DC를 먼저 보면서 류 미 사도 만나보기로 작정하여 그녀에게 미리 편지를 띄었다. 승용차의 휘발유 값의 절반을 부담하는 조건으로 뉴욕에 있는 집으로 휴가를 가는 동급생 Jhon 대위의 차를 타고 이틀만에 뉴욕에 도착했다. 10년 만에 만나는 미사는 첫돌이 지나지 않은 아이가 하나 있었고 남편과 같이 공부를 하고 있었다. 원래가 활달한 성격인 데다가 미국생활에 적응을 잘 해서인지 더욱 행복해 보였다. 우리 세 사람은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미사 부부는 내가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해서 주로 내가 이야기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사선을 넘나들면서 전투를 치른 이 야기를 들은 두 사람의 얼굴이 너무나 심각해졌다. 그들은 크리스마스이브까지는 자기 집에서 같이 지내자고 해서 이틀 밤을 어린애 방에서 자면서 같이 지났다. 지금 생각해 보니 신혼과 다름없는 결혼한 여자친구네 집에 찾아와서 잠을 자고 갔다는 것은 참으로 뻔뻔스러웠던 일이지만 그 때는 내가 너무 순진했던 것인지 아니면 너무 눈치가 없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12월 24일에 벌어졌다. 오후에 그녀의 남편이 자기가 아이를 보고 있 을 터이니 나와 그녀에게 뉴욕의 타임스퀘어에 가서 크리스마스이브를 기억에 남을 만하게 보내고 들어오라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녀 남편의 너무나 관대한 제안에 놀랐지만, 절대 그럴 수가 없는 일이라고 극구 사양하였다. 그런데 나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그녀가 그렇 게 하자며 싫다는 나를 끌다시피 데리고 나가는 것이었다. 십여 년 전 소년시절 우리가 서로 좋아하면서도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하고 지나오다가 이제 유부남 유부녀가 되어 만나서 팔을 끼고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이브에 뉴욕의 타임스퀘어를 거니는 감정은 내가 마치 에로틱한 소설 속의 주인공이 된 것 같기도 하여 쑥스럽기가 그지 없었다. 여하간에 나는 평생 잊을 수 없는 1961년도 크리스마스이브를 그녀와 함께 뉴욕에 서 보냈다. 젊은 나이에 나를 그렇게 후하게 배려해 줄 수 있는 도량을 가진 그녀의 남편에게 지금까 지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뉴욕에 도착한지 4일째부터는 지도를 가지고 지하철을 이용하여 혼자서 뉴욕의 관광명소 를 찾아다녔는데 제일 먼저 마천루부터 보러 갔다. 102층 꼭대기에 올라가 뉴욕 사방을 내 려다보는 그 장관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으랴? 나는 '인간의 능력의 한계가 어디까지 일까?'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뉴욕의 5번가를 관광버스와 도보로 왕래해 보고는 분 명 별천지에 와있다고 생각되었다. 다음으로 자유의 여신상을 보러가서 여신상의 머리부분까지 올라가 뚫어진 관망구로 밖을 내려다보고 내려왔다. 돌아오는 길에 한글로 '자장면'이라고 쓴 중국식당이 있어서 반가운 마음으로 들어갔더니 한 그릇에 $2이었다. 햄버거 1개가 25c인데 햄버거의 8개 값이니 엄 청나게 비싼 값이라 그만 나올까 말까 망설이다가 '애라 모르겠다. 눈 딱 감고 오랜만에 한 국의 자장면 맛 한 번 맛보자' 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나 자장면 맛을 보는 것은 잠깐이 고 $2에 팁까지 주고 나올 때는 속이 쓰렸다. 그 자장면은 내 평생에 가장 비싼 돈을 주고 사먹은 음식일 것이다. 나는 Washington DC로 내려와 3일간을 지내면서 내가 꼭 보고 싶었던 백악관, 국회의사 당, 국립묘지, 펜타곤, FBI, 제퍼슨 기념관, 와싱톤 마뉴먼트를 비롯한 기타 관광명소들을 관 광했다. 나는 돌아다니는 곳마다 다시는 미국에 올 수 없을 것 같아 사진을 많이 찍었다. 1962년 7월 나는 드디어 미국 육군기갑학교 고등군사반 정규과정을 수료하고 귀국 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동안 비율빈 장교인 Almeda소령과 6개월 전부터 $300 씩을 투자해서 $600짜리 중고자동차를 구입하여 같이 타고 다녔다. 우리는 귀국 길에 이 자동차로 대륙횡 단을 하면서 주요관광명소를 관광하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차를 팔아서 다시 돈을 나 누기로 계획을 세웠다. 우리는 교대로 운전을 하면서 사흘은 차에서 자고 나흘째는 사워를 해야 하기 때문에 모 텔에 들어가는 식으로 해서 13일간에 거처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Colorado를 거쳐 Grand Canyon, Las Vegas, Hollywood, Disneyland, Universal Studio 등의 명소를 빠짐 없이 관광하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는데 이 방법은 미국을 제대로 보아야겠다는 나의 생 각에 어느 정도 적중하였다. 자동차를 $500에 팔아 각기 $250씩 나누고 보니 지급 받은 여비가 꽤나 남게 되었다. 나 는 남은 여비로 $100을 주고 19인치 흑백 TV set 1대와 아내에게 줄 좁쌀만 한 다이아가 박힌 반지를 생전 처음으로 샀다. 아내에게 줄 선물을 사고 보니 곧 결혼할 학수동생의 결 혼식 때, 형으로서 무엇인가를 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에 한참을 망설이다가 큰마음을 먹고 제수씨에게 줄 결혼예물로 아내의 것과 똑 같은 반지를 하나 더 샀다. 김포공항에 내려서 아내를 보는 순간 너무나 반가웠다. 그러나 부모님과 고모님이 나와 계시고 어머니가 먼저 나에게 다가와서 손을 잡는 통에 아내는 저만치 떨어져 나에게 눈길 만 주는 것이다. 나는 아내에게 다가갔지만 아내의 손도 못 잡고 업고 나온 막내의 손만 잡 아 흔들면서 아내와는 눈인사만 할 뿐이었다. 그 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공항을 떠나기 전에 나는 애지중지 모은 미국 돈 $1,000을 환전소에서 한국 돈으로 바꾸었 다. 계획한 대로 모표를 달성한 셈이었다. 6. 도약의 발판 사실 군대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방법으로 미국 군사유학의 길을 택했지만 이 군사유학이 오히려 직업군인의 길을 택하게 만들고 말았다. 군사유학이 나의 인생항로의 길잡이가 되고, 내가 직업군인으로 발전하는데 큰 계기가 될 줄은 나도 몰랐다. 나는 미국 군사유학기간에 군사학의 개념을 정립한 것이 가장 큰 소득이었지만 미국 사람 들의 검소한 생활태도, 자립정신, 그리고 논리적이며 합리적인 사고방식 등을 경험하면서 인 생공부도 많이 한 셈이었다. 그 후부터 나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자식들에게도 이 세 가지만 큼은 실천하고자 노력하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사치와 낭 비는 죄악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고 자식들과의 경제적인 관계에 있어서도 각자 자립정신 을 지켜나가는 한계를 확실히 실천하고 있다. 1962년 7월 말 나는 10일간의 휴가를 마치고 아이들 넷을 데리고 다시 광주로 이사를 하 였다. 최신 군사학을 배우고 왔으니 여러 장병들에게 가르치라는 육군본부의 방침에 따라 2 년간 의무적으로 기갑학교에서 교관으로 근무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미 기갑학교에서 공부하면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기도 하였지만 군사학의 개념이 정 립됨으로서 앞으로 직업군인으로서 우리 군과 기갑병과에 기여하면서 나 자신도 발전해야겠 다는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바로 이 시점에서 기갑학교 교육을 직접 관장할 수 있는 핵심 적인 교무과장의 보직은 나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 육군기갑하교는 전차(TANK)를 타고 싸우는 기갑병과의 장교와 사병을 양성배출하고 기성 기갑장병들의 재교육을 실시하는 곳이다. 창설 된지 10여년이 넘어 발전하는 가운데 많은 기갑장병을 양성배출 하였으나 미 기갑학교의 교육체계나 교육방법에 비하면 너무나도 많이 뒤떨어져 있었다. 나는 먼저 교육체계를 수립하기 위하여 교육실행을 위한 예규(SOP)부터 문서화하여 작성 발행함으로서 교육계획의 작성 단계와 절차 등을 쉽게 알고 관계관들이 업무를 처리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종전의 주입식 교육방법에서 토의식 교육방법으로 장교들에게 실시되는 교 육방법을 개선하고 교육보조 재료의 개발과 확보로 우선 환등기(Overhead Projector)활용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나를 보좌한 기획 장교 김 봉기 대위(대령)와 시간장교 이 준 중위 (중령)는 내 뜻을 따르느라 고생하였지만 우리 모두는 즐거운 마음으로 일을 성취시켰다. 아울러 나는 말로 수없이 하는 것 보다 직접 보여주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 생각하여 공격 준칙과 방어준칙의 전술과목을 직접교육하면서 여러 교관들에게 교육방법을 시범으로 보여 주었다. 한편 나는 우리병과를 요약하여 소개하는 "기갑소개"라는 과목을 보병학교와 포병학교의 장 교과정에 실시하는 대외교육을 담당하였는데 미국 기갑학교에서 배워온 특이한 교육방법을 사용했다. 고대의 전차로부터 현대의 전차의 발달사와 전사(戰史)를 통하여 본 기갑전사 그 리고 전차와 기갑의 개념과 역할을 소개하는 교육내용의 시나리오를 잘 짜서 나와 전 동린 대위가 같이 교단에 서서 번 갈라 설명하면서 적절하게 칼라 환등기, 영사기, 일반 환등기 등을 이용하여 교육하는 시청각 교육 방법이었다. 이러한 교육방법은 당시 한국의 군사학교 에서는 처음 시도된 것이었고 학생들은 마치 한 토막의 쇼를 보는 듯하여 대단한 인기를 끌 었다. 또한 이제 막 장교로 임관하게 될 보병학교 간부후보생들에게 기갑소개 과목을 교육한 결 과 병과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많은 후보생들이 기갑병과 선택을 희망하게 되어 치열한 경쟁 을 치르게 되었다 한다. 그러나 후일 나의 기갑소개 교육을 받고 기갑병과를 선택한 갑종간 부 157기 전후의 많은 기갑장교들로부터 나는 원망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왜냐하면 교육을 받을 때는 교관의 노란 머플러와 병과배지 그리고 머리를 스포츠형으로 깎고 용모 단정한 멋진 군인의 이상형인 한 소령에 반하여 기갑병과를 선택했는데 와서 보니 보병에 비해 병 과의 규모가 좁아 진급이 어렵고 활동범위가 제한되어 발전성이 없어 후회스럽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 때문에 현혹되어 병과를 잘못 선택하였다는 푸념이었다. 나는 온 정열을 쏟아 기갑학교의 교육을 내실 있게 개혁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주도적 역할 을 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이렇게 바뿐 가운데서도 나는 도미유학 때문에 휴학한 조선대학 야간부의 학업을 1963년도부터 다시 계속하였다. 그리고 나는 도미유학 의무보직 기간인 만 2년이 끝날 무렵 앞으로 나 개인의 보직관리를 위하여 전방의 전차대대장으로 보직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학교장 박 00 대령은 내가 다른 부대로 전출하는 것을 막자는 뜻에서 64년 7월 초 학교 인사처장으로 나의 보직을 변경시켰다. 그러나 내 입장에서는 다음 중령진급을 위하여 최선의 방법은 오 직 전차대대장으로 보직을 받는 것이었다. 나는 그해 말인 1964년 11월 2일부로 전방에 있 는 제3전차대대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7. 똥파리 떼 쫒기 1957년 - 1964년까지의 기간 중, 미국 군사유학 기간 1년을 제외한 만 6년간의 기갑학교 근무를 마치고 광주를 떠나 1964년 11월 2일 전방의 제3전차대대장으로 부임했다. 제3전차대대는 경기도 포천군 운천면 야미리 라는 의정부에서 철원으로 올라가는 3번 국도 변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터가 세서 대대장들이 정상적인 임기를 제대로 마치기가 힘들다는 소문 때문에 대대장으로 부임을 꺼리는 부대였다. 그 대표적인 예로 5.16군사혁명 직후 휘 발유를 부정유출 시키던 대대장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사형선고를 받은바 있었다. 부대의 주변 환경도 약 3km 거리의 운천에 미군부대인 캠프 카이자 및 태국군부대가 있기 때문에 기지촌이 형성되어 있었고 유원지인 산정호수가 6km 거리에 있어서 사철 내내 행락 객이 들끓어 복잡하기도 하고 사고가 자주 일어나는 소위 위험지대였다. 내가 부임하여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하는 과제는 부대를 괴롭히는 '똥파리 떼'들을 쫒는 문제였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부대 앞을 지나가던 영관급 장교들과 수사기관 요원들이 제 집 드나들듯이 우리 부대에 들려 자기 차에 휘발유를 넣어 달라는 것이었다. 사실 이런 문 제는 우리 부대뿐만 아니라 기름을 많이 소모하는 육군의 모든 전차부대가 안고 있는 공통 의 골칫거리였다. 그러나 나는 내가 지휘하는 부대에서만은 어떻게 해서라도 이런 악습을 근절시켜야 되겠다 고 결심하고 처음에는 내가 직접 나서서 찾아오는 이들에게 '전차 부대가 다른 부대보다 휘 발유를 많이 보급 받지만, 전차는 휘발유를 많이 소모하기 때문에 우리도 역시 부족하기는 일반부대와 마찬가지'라고 설명을 했다. 그러나 이해는커녕 오히려 세상 물정을 모르는 빡빡 한 대대장이 부임했다는 소문만 났다. '똥파리들'로부터 거듭되는 휘발유 요구를 거절하자 이번에는 사방에서 손을 보아주겠다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나도 더 이상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되어 한 달간 휘발유를 얻으러 오는 외부 차량번호 를 기록하고 통계를 내어 군단장에게 직접 보고하고, 전차대대의 기본임무 수행에 막대한 지장이 있음으로 시정될 수 있도록 조치해 줄 것을 건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우리대대 정문에는 "이곳은 작전부대이지 연료보급소가 아니다."라고 쓴 현수막을 내 걸었다. 그 당시 이와 같은 행동은 내 놓고 부정을 행하고 있던 기세 등등한 수사기관과 정면으로 도전하겠 다는 선전포고와 다름이 없는 무모한 짓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렇게 단호하게 대처하자 일단 외부차량이 휘발유를 요구하는 일은 없어졌지만 수사 기관들은 "어디 두고 보자."며 우리대대 주변에서 3개월 이상 잠복근무를 해 가면서 우리 대 대와 나의 약점을 잡아내려고 하였다. 소신대로 산다는 것이 정말로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절감하면서도 나는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고, 다행히 나의 부하들도 대대장의 의도를 잘 이해하고 협조를 잘 해주었다. 휘발유 사건이 일단락 되자 나는 대대의 기본임무인 작전임무를 확인할 수 있는 여력을 가 지게 되어 작전계획에 따르는 각 전차중대의 기동계획과 각 전차의 축차진지의 하나하나를 실제로 투입하며 확인할 수가 있었다. 나는 우리 부대가 전투기동부대임을 강조하면서 불시에 비상을 걸어 최단시간 내에 출동할 수 있는 전차부대의 기능을 살려 진지투입 훈련을 실시하여 전투태세를 완비했다. 전차 대대장으로서의 임무 외에 나에게 주어진 또 다른 임무는 강원도 철원군 지포리에 위 치한 TCPC(전차포 이동사격장)를 관리하는 것이었다. TCPC는 한국에 한 군데 밖에 없었기 때문에 한국군이던 미군이던 간에 한국에 있는 모든 전차는 1년에 한 번씩은 이곳에 와서 전차포 이동사격을 하게 되어있었다. 그러다 보니 숙영지의 마련, 사격장의 이동표적의 기계 적 관리, 사격결과의 점수관리, VIP 내방 시 브리핑 준비, 미군부대 주둔 시 일어나는 도난 사건, 사격장에서 고철을 수집하려는 사람들의 무단출입으로 인한 위험 및 유탄으로 인한 피해 방지 등의 문제들이 언제나 발생하고 있어서 관리업무가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어느 날, 전차포 이동사격장을 관리하는 덕분에 미 기갑학교 동기생인 McLennan중령을 만 나게 되었다. 더욱이 그가 지휘하는 제10기갑수색대대는 아주 가까운 운천의 캠프 카이자 내에 주둔하고 있어서 우리는 수시로 왕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신문을 읽다가 미 제10기갑수색대대의 한 병사가 보초근무 중에 무기 를 가지고 초소를 이탈하여 서울로 나와 택시강도를 하다가 한국경찰에 체포되었다는 기사 를 보고 깜짝 놀랐다. 나는 지휘관으로서 McLennan중령이 문책을 당하지 않겠나 하는 염려 때문에 일과를 끝마치자마자 그를 방문하였더니 그는 장교구락부 바에서 술을 마시며 희희 낙락하고 있지를 않는가? 나는 그에게 "너의 부대 병사가 서울에서 사고를 냈는데 너에게 책임이 추궁되지 않느냐?" 라고 물었더니 그는 이상한 질문을 한다는 듯 나를 쳐다보면서 이야기했다. "아니? 그게 왜 내가 책임져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느냐? 그 병사는 이미 개인의 책임을 질 수 있는 18세가 넘은 성인으로서 군에 입대하지 않았는가? 또한 그에게 군인의 기본책임과 의무에 대한 교육은 신병훈련소에서 시켰으니 개인책임이외의 책임을 져야한다면 그곳에서 책임을 져야할 일이고, 나는 병사들에게 부대훈련을 잘 시켜 전쟁터에서 전투에 승리하도록 하는 책임을 지기에도 힘이 버겁다"라고 하였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망치로 한데 얻어맞은 것 같아서 할 말을 잃어 버렸다. 과연 서 구인들의 사고방식이 논리적이고 합리적인데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날 부대 로 돌아와서 Mclennan과 주고받은 이야기를 생각해보니 미국 군대가 부럽기 그지없었다. 왜냐하면 한국 군대에서는 부대나 부하의 사고는 원인 여하를 막론하고 무조건 지휘책임을 묻기 때문에 유능한 지휘관들이 자기 탓도 아닌 일에 희생이 되고 마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 이후 내가 지휘관으로 근무하는 동안만큼은 사고가 생기면 반드시 사고의 원인을 밝혀내고 지휘책임의 한계를 분명히 하여 문책을 하는 부대지휘를 하기로 결심했다. 그 후, 어느 날 우리 부대의 사병 3명이 일요일에 운천의 기지촌으로 외출을 나갔다가 태 국군 사병들과 패싸움이 붙는 사건이 발생했다. 먼저 태국 군 사병이 칼을 휘두르자 우리 사병이 칼을 빼앗아 태국 군 사병을 찌른 사건이었다. 젊은 사병들 사이에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었지만 기지촌에 주재하는 지방 신문기자 란 녀석들이 먹을거리가 생겼다고 달려들어 기사를 중앙으로 송고 하겠다며 돈을 요구해 왔 다. 내가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자 기자들은 당연히 기사를 송고했고 신문에 나자 육군본부 와 주한 태국대사관에서 알게 되어 외교적인 문제로 제기될 가능성이 발생하였다. 군단 헌 병대는 우리 대대에 와서 3명의 사병을 체포하여 영창에 감금해 버렸다. 오직 전투력증강에 온갖 신경을 집중해야 하는 전방의 전투지휘관들에게 골치 아픈 똥파리 들이 바로 지방 신문기자들과 수사기관 요원들이었다. 이들은 부대나 군인에게 문제가 발생 했다고 하면 사건의 크고 작고에 관계없이 무조건 쫓아와서 공갈 협박으로 금품을 뜯어가기 위해서 지휘관을 괴롭히는 것이었다. 나는 즉시 군단장에게 사실대로 사건을 보고하고 가능한 한 문제가 외교적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조치를 취하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나서 나는 태국군 중대장 쿵 소령을 찾아가 진정으로 사과하고 젊은 사병들 간에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문 제이니 만큼 지휘관들이 서로 이해를 하고 더 이상 문제가 확대되지 않도록 서로 협조하기 로 했다. 다행이 쿵 소령은 태국군 기갑병과 장교로서 미국 Fort Knox의 기갑학교 OBC (초등군사 반)과정 수료생으로서 이미 잘 알고 지나던 사이여서 이야기가 쉽게 풀릴 수가 있었다. 쿵 소령은 자진하여 나와 함께 주한태국대사관으로 가서 자기 사병의 잘못이 더 크다는 것 을 설명하면서 일체 이 문제를 외교적으로 제기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돌아왔다. 나는 군단장에게 태국대사관에 다녀온 경과를 보고하고 나의 부하 사병들에 대하여 선처를 해줄 것을 간청했다. R 군단장은 문제를 해결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하는 나의 태도를 보고서 사병 2명은 즉각 석방해 주고 칼을 사용한 사병도 얼마 후에 집행유예로 석방시켜 주었다. 우리 대대의 장병들은 이 사건을 처리하는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고서 나를 자기들을 지켜 줄 수 있는 지휘관으로 신뢰하기 시작해서 이 사건 이후 나의 명령과 지시에 대해서는 거의 무조건 따르겠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부대지휘가 훨씬 수월해졌다. 1965년 10월 1일 소령으로 진급한지 만 4년 만에 파격적으로 중령으로 진급하였다. 이번 진급은 육사출신이 아닌 나로서는 대단히 빠른 편으로 자유당 시절 대위 계급장을 9년이나 달아서 지연되었던 기간을 만회한 셈이었다. 군사유학을 다녀와서부터 직업군인의 길을 선택한 후 기울였던 노력의 결실이라고 생각하 였다. 그러나 기갑병과 내에서만 근무해서는 크게 발전하기 어렵다고 판단이 되어 앞으로 기갑병과를 떠나서 대외의 근무로 나를 알리는 방법을 강구하기로 하였다. 그 방법은 내가 자주 접촉할 수 있는 군단장과 사단장들로부터 나의 능력을 인정받아 그들이 필요하다고 생 각될 때, 나를 요청할 수 있도록 내 스스로 노력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이 무렵 네 아이들 중 효숙이와 진숙이는 전방으로 또 다시 데리고 다닐 수가 없어서 서울 의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맡겨 서울남대문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어느 날 동생 성수가 찾아와서 아내에게 노인들이 아이들을 응석받이로 키우고 큰아이와 작은아이를 편해하는 것 이 심한 것 같다면서 아이들의 인격교육을 위해서 어려워도 부모 곁에 있도록 하는 것이 좋 겠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일리가 있다고 생각되어서 서울만 못하지만 아이들을 전방의 기지촌에 있는 운천 초등학교로 전학시켰다. 나는 아이들 넷을 하나도 유치원에 보내보지 못했다. 당 시 아직 학교에 가지 않는 막내인 상학이는 하루 종일 운천의 급수장을 왕래하는 부대 물탱 크차량의 조수석에 타고 다니는 것이 놀이의 전부였다. 1965년 10월 1일 서울에서 펼쳐지는 국군의 날 행사에 나갔던 부대가 복귀하자마자 군사 령부에서 1966년 1월 말경에 제 3전차대대를 주축으로 하여 철원평야에서 전차대대 공격시 범을 실시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 해에 장군으로 막 진급을 한 제6사단 부사단장인 김 00 장군이 시범단장에 그리고 제3전차대대장인 내가 시범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 당시만 해도 육군에서는 국토의 대부분이 산악으로 형성되어 있고 일부 평야지대가 있 다하더라도 그 대부분이 논으로 된 지형에서 전차대대가 1개의 단위부대로서 과연 독자적으 로 전술적인 운영을 할 수 있겠는가? 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고 있었다. 물론 기갑병과에서 는 이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이 전술적인 운영을 실제적으로 입증하기 위하여 전 개시범을 실시해 보기로 한 것이었다. 이 시범은 기갑부대의 운명이 걸린 시범이었음은 자명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만일 이 시범 이 성공하지 못한다면 한국 지형에서는 전차부대는 포병과 같이 단지 보병부대를 지원하는 부대로서 존재할 수 있지만 전차부대를 주축으로 한 전투기동부대인 기갑부대의 존재는 인 정받을 수 없는 입장이 되어서 앞으로 더 이상의 기갑부대의 창설은 기대하기가 어렵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나는 막중한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시범단장으로 임명 된 김 장군도 처음부터 솔직하게 '나는 보병병과이기 때문에 기갑전술에 대하여 잘 모르니 한 중령이 모든 것을 잘 기획하고 실행해주기를 바란다. 그 대신 시범을 위한 모든 필요로 하는 군수지원문제는 최대로 지원하겠다'라고 해서 어깨가 더욱 무거워졌다. 다행히도 미국 군사유학 시절에 기갑학교에서 전차대대 공격시범을 참관한 경험이 크게 도 움이 되었다. 또한 성공적인 시범을 보이기 위해서는 기갑병과의 전 역량을 집중시켜야할 것이라고 판단되어 군사령부 기갑부장인 S 대령에게 건의하여 필요한 기획 및 통제요원들을 차출하고 시범을 위한 군수물자지원을 확보하였으며 우리에게 없었던 연막산포 전차와 가교 전차(ABLV)는 미군 전차대대에서 빌려서 시범에 사용하기로 하였다. 시범은 2개의 전차 중대가 횡대로 전개, 공격 중 예비로 후속 하는 전차중대가 보병부대를 배속 받아 종대대형으로 초월공격을 실시하는 형태로서, 과감하고 신속한 기동과 집중적인 강력한 충격행동으로 목표를 탈취하는 전차대대 공격작전의 시범이었다. 이 시범은 육군의 역사상 최초로 실시되는 시범이기 때문에 대단한 관심이 집중되어 국방 부장관을 비롯한 육군참모총장과 군사령관, 육군의 연대장급 이상 지휘관과 미 8군사령관 및 미 1군단장까지 참석하였다. 다행히도 시범은 대성공이었고 이 시범이 결국 기갑여단을 창설하는 전술적인 이론의 기초 가 되어서 육군의 기갑부대 역사에 기록할만한 날이 되었다. 이 시범이 끝난 직후부터 나는 앞으로 직업군인으로 보다 충실히 실력을 쌓기 위하여 육군 대학 정기과정을 마친 다음 교관으로의 경력을 쌓아야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8. 1년에 한번씩 전학하는 아이들 5.16군사혁명이 일어나서 군인에 대한 처우가 비교적 많이 개선이 되었다고 하는 60년대 후반에도 우리가 받는 봉급만으로는 겨우 최소생활비의 2/3 정도밖에 충당이 되지 못했다. 그러므로 아무 보직이 없이 피교육자의 신분이 되어 기본적인 봉급만 받으면서 교육을 받는 생활을 좋아할 사람이 별로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육군의 최고교육기관인 육군대학조차도 육군대학을 수료하지 않고는 대령 진급을 할 수 없 는 중령들이 마지못해 입학을 하거나 입학을 한다 하더라도 3개월의 단기과정을 선호하는 경향이었지만 나는 1966년 8월29일 육군대학 1년제 정규과정에 입교를 자원하였다. 경제적 인 어려움을 극복해 나갈 각오를 단단히 했지만 다행히도 부하들이 앞으로 1년 동안 고생할 것을 격려하는 뜻에서 전별금을 모아준 것이 다소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결국은 군대생활 16년을 하고 중령까지 되어서도 장사를 하고 있던 부모님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처지 였다. 그 당시 경상남도 진해에 위치한 육군대학은 현대식의 강의실을 비롯한 세미나 실, 도상 실습실, 대강당, 정구장과 수영장이 갖추어져 있어 선진국의 군사시설에 그리 뒤떨어지지 않 을 정도로 한국에서는 제일 좋은 시설과 환경이었다. 더욱이 무엇보다도 다행한 것은 교관 용 관사 50여 동과 학생용 관사 100여 동이 한 울타리 내에 있어서 피교육자인 학생까지도 주택이 제공되는 것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1967년도 육군대학 정규과정에는 해병 3명을 포함하여 103명이 입교를 하였는데 그 중 1/5이 중령이고 4/5가 소령이었다. 후일 103 명중에서 나를 포함해서 16명의 장군이 배출 되어 육군대학 대강당에 걸려있는 졸업자 명단에 영광의 별이 표시되어 있다. 학생 중에서 나는 유일하게 파이프 담배를 피웠는데 아마 내가 멋으로 파이프 담배를 피우 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담배를 워낙 좋아했지만 담배 값 을 감당할 수 없어서 값이 싼 잎담배를 피기 위하여 파이프를 물었던 것이다. 다음해 6월 26일 졸업을 할 때까지 나는 그야말로 고시 준비생처럼 밤잠을 자지 않으면서 공부에 전념했다. 나는 목표를 세웠던 대로 육군대학 교관으로 선발이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전혀 예기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보병 제8사단장인 양 봉직 장군이 나 를 사단 군수참모로 요청한 것이다. 양 장군은 전혀 내가 모르는 분이었다. 그 무렵 전방에 배치된 보병사단에 전차중대를 창설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양 장군 은 우수한 기갑장교를 군수참모로 기용하면 전차중대를 창설하는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 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1군사령부 기갑참모에게 전차중대장과 대대장을 끝마치고 육군대학 정규과정을 졸업한 사람을 추천해 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그 때 마침 그럴만한 대상자가 기갑병과에서 나 한사람밖에 없었기 때문에 내가 지명선발 되었던 것이다. 나는 기갑장교로서는 보직을 받기 쉽지 않은 보병사단의 일반참모인 군수참모라는 보직도 해 볼만하다고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래도 육군대학 교관 경력이 앞으로 더 유용할 것 같이 생각되어, 육군대학에 남는 쪽을 택하고 싶었다. 또한 육군의 인사규정에 의하면 우선권이 육군대학 교관임명에 있기 때문에 육군대학의 총장의 승인 없이는 이미 선발해 놓은 교관요 원을 다른 곳으로 발령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양 장군은 내 문제를 육군대학 측과 합의해서 결국 내가 1년 동안 보병 제8사단에 가서 근무를 마치고 다시 육군대학 교관으로 복귀하는 것으로 합의 결정되었다.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군인의 길이라 어쩔 수없이 나는 진해에서 1년을 살고 다시 전방의 제8사단으로 온 가족을 이끌고 경기도 일동으로 이사를 가야 했고 1년 후, 또 다시 진해 육 군대학 교관관사로 이사를 해야 했다. 보병 제8사단에 도착하여 사단장에게 부임신고를 마치자 사단장은 나에게 환영의 뜻을 표 하면서 "한 중령을 우리 사단에서 특별히 요청한 것은 전차중대의 창설을 원활하게 하기 위 해서 였소, 한 중령 입장에서도 기갑장교로서 보병사단 일반참모를 역임하게 된 것이니 어 쩌면 행운이 아닌가?"라고 하는 것이었다. 사실 사단장의 말대로 기갑장교들이 사단 일반참모로 기용되는 경우는 흔하지 않아 그럴 만 하기는 했지만 내 경우에는 최선의 선택인 육군대학 교관을 미루고 차선책인 보직을 받 게되는 것이기 때문에 조금도 기쁜 일이 될 수가 없었다. 단지 요즘 말로 스카우트 당했다 는 것 자체를 스스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내 귀에는 기갑장교를 과소평가 하 는 것으로 들려서 몹시 자존심이 상했다. 나는 보병사단에 근무하는 동안에 기갑병과를 생각해서라도 각별히 내 처신에 주의하여야 하겠고 최선의 노력으로 능력을 발휘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참모장 천 주원 대령(중장)의 인품과 능력에 감동을 받아 그 를 존경하게 되었다. 그는 육사 9기를 졸업한 아주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겸손하면서 강직 하고 건전한 사고방식으로 빈틈없는 성실한 근무태도와 생활방식에 매료되어 나도 저 분과 같이 예수를 잘 믿어서 본을 받아야하겠다고 다짐하게 될 정도였다. 그 후 그는 3성 장군으 로 예편하고 지금도 깊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천 대령을 만나게 된 것을 내가 8사단에 근무하면서 얻은 가장 큰 소득으로 꼽을 수 있다. 나는 제일 먼저 작전계획에 따르는 군수지원 사항부터 검토하여 수정되어야할 부분을 찾 아냈다. 그리고 그 부분을 전술교리의 원칙을 적용하여 결과를 명확하게 사단장에게 보고해 서 결재를 얻은 후 군수분야 특별참모(병기, 병참, 공병, 통신, 의무, 화학, 수송)들을 소집해 서 군수회의를 개최하여 군수지원의 원칙과 방침을 명시하고 지원의 통일을 기함으로서 업 무를 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두 번째로 전차중대의 창설에 착수하였다. 전차중대장과 대대장의 경험과 군수분야 특별참 모들의 집중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나로서는 전혀 어려울 것이 없었다. 우연치 않게도 나의 중학교 2년 후배인 L대위가 전차중대장으로 부임해왔다. 나는 부임한지 2개월만에 작전계획상의 중대의 위치, 각개 전차에 대한 성능점검, 정비장비 및 공구 그리고 보급품의 확보 등을 완비하여 사단장을 모시고 사단전차중대의 창설 식을 멋지게 거행했다. 나는 다음 단계로 예하부대를 직접 방문하여 군수분야의 어려운 문제점들을 파악하여 해결 책을 마련하여 사단장에게 보고하고 지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최대로 지원하였다. 많은 예 하부대 지휘관 및 참모들로부터도 좋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 부임하여 1년이 다 되어 가는 1968년 7월에 2명의 공비(간첩)가 8사단 지역에 침투하여 10연대의 초병에게 발견되자 초병을 살해하고 북쪽으로 도주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사단이 발칵 뒤집혀 야전지휘소를 연평에 설치하고 공비소탕작전을 개시하였다. 참모회의에서 나는 일단 공비들이 북으로 복귀하기 위해서 한탄강을 도강하지 못하도록 심 리전을 전개하는 방법을 건의하였다. 즉 한탄강 북쪽에 첫 날과 둘째 날 밤에 병력을 배치 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하여 헤드라이트를 킨 트럭들을 횡으로 이동시키는 위장술을 사용하 여 간첩들을 묶어놓자는 방안이었다. 날이 밝자 최대의 병력을 동원하여 연대별로 지역별 수색작전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1주일 이 지나고 작전이 답보상태에 빠지게 되자 독전을 위하여 1군사령부에서는 부사령관이 나오 게 되자, 사단장을 비롯한 우리 참모들은 그야말로 피가 마르는 고민에 휩싸이게 되고 모든 사람들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1주일이나 전 사단 병력이 최선을 다했는데도 공비들의 흔적을 발견할 수가 없게되자 공비 들이 이미 우리 지역에서 빠져나간 것으로 판단한 사단장은 자기가 책임을 지고 작전을 종 결할 것을 최종적으로 군단에 건의하려고 하였다. 나는 사단장 같은 고급 지휘관이 사실상 작전의 실패를 자인하면서 작전을 종결해야하는 일로 고민하는 모습을 처음으로 가까운 거 리에서 보게 되면서 몹시 안타까웠다. 나는 천막으로 돌아와 혼자서 오랜 시간 동안 작전지역 지도를 살펴보고 또 보았다. '한탄 강 북쪽을 가장 잘 바라볼 수 있는 지역은 어디일까? 혹시, 이 지역이 아닐까?'하고 생각하 다가 무엇인가 직감적인 예감이 떠올랐다. 나는 작전참모를 찾아가서 아직까지 도강한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공비들이 한탄강을 도강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되니 마지막으로 한번 만 더 내일 일찍부터 심증이 가는 이 지역 을 정밀수색 해볼 것을 사단장에게 건의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조언했다. 사단장은 작전참 모의 건의를 받아들여 새벽 5시부터 넓지 않은 그 지역을 모든 인원이 한팔 간격으로 벌려 서 작대기로 땅바닥을 헤쳐 보는 중복 정밀수색작전을 개시하였다. 1시간이 조금 지났을 무렵 앞에서 소총소리와 수류탄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2명 의 공비들이 땅굴을 파고 들어가 있는 것을 발견하여 사살하는 개가를 올린 것이다. 사단장은 아무 말도 없이 나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작전참모 김 중령이 성공적인 작전 의 판단이 군수참모의 판단임을 사단장에게 사실대로 보고한 것이었다. 사단장은 나를 다음 작전참모에 기용하기로 결심하고 나에게 8사단에 남으라고 권유하였 다. 그러나 나는 사단장의 제의를 극구 사양하고 처음 약속대로 1968년 8월 15일부로 육군 대학 교관으로 복귀하였다. 또 다시 진해로 이사를 와야 했음은 물론이어서 아이들이 한 학 년은 전방, 그 다음 학년은 후방, 다음 학년은 전방, 다음은 후방 하는 식으로 1년마다 학교 를 옮겨 다닌 셈이었다. 9. 짧은 효도 나는 이미 대위와 소령 시절에 기갑학교에서 5년 간이나 교관생활을 한 경험이 있었다. 내가 담당한 과목은 "지휘관 및 참모"와 "군수업무"의 2개 과목이었는데 그중 "지휘관 및 참 모" 라는 과목은 학생들이 육군대학에 입교한 첫날 첫 시간의 강의로 육군대학의 강의가 어 떤 것인가를 선보이는 과목이었다. 그러므로 대학 측에서도 신경을 많이 쓰고 강의를 하는 교관도 개인적으로 주목을 받는 과목이었다. 한편 군수업무 과목은 특히 보병사단 군수참모 를 마친 경험을 가지고 강의를 하다 보니 자연히 강의에 권위가 붙게 되었다. 육군대학에서의 강의를 잘 하면 자연스럽게 전 육군에 알려지게 되어 임기가 끝나기 전부 터 전입요청을 받게되어 다음 보직에 유리한 이점을 얻게 되어 있었다. 또한 육군대학 교관 생활은 전략 전술적인 폭 넓은 군사지식을 쌓을 수 있어서 나의 발언은 자연히 권위를 가지 게 되고, 많은 우수 장교들을 알게 되어 나의 군 생활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육군대학 교관생활은 나 자신 뿐만 아니라 당시 한참 자라는 아이들에게 모처럼 안정적인 환경 속에서 활발하게 자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아울러 지금까지의 군대 생활에 비해서 비교적 시간 여유가 있어서 많은 시간을 독서와 운동에 할애할 수가 있었고, 가족들과 같이 지나는 시간도 같게되었다. 주말에는 모처럼 아이들과 함께 외식으로 메밀국수나 자장면을 먹고 우리 부부는 영화를 가끔 보러 가기도 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다 보니, 중국음식점 에 갔을 경우는 아이들에게 일단 자장면을 한 그릇씩 시켜서 배를 불린 다음에 탕수육 한접 시를 시켜주는 방법을 썼다. 우리 집 아이들은 전부 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운동을 좋아했는데 정민이는 아랫동네 아 이들과 야구시합을 할 때는 윗동네의 야구 주장으로서 활약했다. 그 때 같은 울타리 내 관 사에 살고 있는 부모(주로 교관)들이 나와서 자기 아이들 편을 들어 응원하는 모습들은 마치 미국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 같았다. 어려서부터 막내인 상학이는 형에게 지기를 싫어해서 형이 다이빙을 하면 자기도 다이빙을 한다고 깊이가 얕은 곳에서 뛰어 내려 바닥에 머리를 부딪쳐 응급처치로 머리를 꿰매는 소 동을 벌리기도 했다. 진숙이는 진해여중의 배구선수로 활약해서 시합출전 때문에 내가 전방 부대로 전출할 때 함께 가지 못하고 나중에 혼자 와야 하는 상황에 이르기도 할 정도였다. 정민이와 상학이도 보통 아이들처럼 만화를 매우 좋아했었다. 어느 날 알고 보니 어디에서 그렇게 많은 만화를 빌려왔는지 만화방을 차려놓고 육군대학 관사 내의 아이들을 상대로 돈 을 받고 만화대여 장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아이들이 돈 버는 재미에 빠질까 보 아 몇 차례 좋은 말로 만화방을 치우라고 주의를 주었다. 그러나 아이들이 돈 버는 재미 때 문인지 만화가 좋아서인지 몰라도 만화방을 없애지 않고 만화 대여 업을 계속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 번 혼을 내주어야겠다는 마음으로 옆에 있는 마당 쓰는 빗자루로 등을 때린다는 것이 그만 정민이가 피하려고 움직이는 바람에 눈에 맞아 피 가 흐르는 상처를 입히게 되었다. '아차!' 하는 순간에 일이 저질러지고 말았다. 혹시라도 실 명한다면 어떻게 저 자식을 보면서 살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약 반년 이상을 고민을 했 었다. 육군대학에서 교관생활로 모처럼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는데 서울 어머님에게서 전보가 왔 다. 아버님이 허리가 몹시 아프셔서 몸져누워 꼼 짝을 못하신다는 것이었다. 나는 마음은 급 했지만 수업 때문에 서울로 올라 갈 수가 없어서 먼저 아내를 야간열차로 보냈다. 그 때 부모님께서는 조그마한 쌀가게를 하고 계셨는데 비록 아버님은 눕게 되었어도 어머 니 혼자서라도 장사는 계속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어머님이 장사를 하면서 아버님을 돌보실 수는 없는 형편이라서 우선 서울에서 교회 전도사로 있는 동생 집에 아버님을 모시게 되었 다. 그러나 병세가 대소변을 받아 내야할 처지이다 보니 나이 어린 며느리에게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버님께서 몹시도 불편하셨던 모양이었다. 아내는 아무래도 아버님을 우리가 진해로 모셔 와야 할 것 같다는 기별을 해왔다. 나는 1 주간의 휴가를 얻어서 상경하여 먼저 아버님을 서울 대학병원과 육군병원에서 진찰을 받아 보게 하였다. 그러나 노환이기 때문에 수술을 할 수도 없으니 집에서 편안히 모시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 이었다. 하는 수 없이 아내의 권유대로 우리가 모시기로 결정하고 그 당시 서울-진해간을 운항했던 10인 승 경비행기로 아버님을 진해로 모셔왔다. 아버님의 병간호 중 가장 힘든 일은 소 대변을 받아 내고 욕창이 생기지 않도록 목욕을 시 키는 일이었다. 더욱이 변비가 생기거나 소변이 막힐 때는 응급처치를 해야 해서 집안은 항 상 악취로 가득했다. 문을 자주 열어 환기를 시킬 수 없는 겨울철에는 정도가 훨씬 심해서 정말로 견디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아내는 눈 한번 찌푸리지 않고 참으로 성심 성의껏 아버님을 간호해 드렸고 아버님 도 친딸보다도 더 아내에게 의지를 했다. 몸은 편찮으셔도 식욕이 비교적 좋으신 아버님을 위하여 아내는 새벽 장과 저녁 장을 매일같이 보아가며 싱싱한 생선을 사서 조리해 드렸다. 나는 거의 50여 년 간을 아내와 같이 살아오면서 그 때차럼 아내에게 고마워해 본적이 없었 다. 하루는 아버님께서 아내에게 "저기! 소 그거 있지!? 그걸 먹으면 일어날 것 같아" 라고 말 씀 하셨다. 차마 며느리에게 "소불알과 신"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서 '그거'라고 표현을 하신 모양이다. 그러나 아내가 막상 '그것'을 장만하여 잡수시게 해드렸더니 오히려 갑자기 소변 이 막혀 응급처치를 하는 등 혼이 난적이 있었다. 또 한번은 아버님께서 나에게 노루 뼈를 고아 먹으면 병이 나으실 것 같다고 하셨다. 내가 동료 교관들에게 이야기를 하였더니 사냥총을 가지고 있는 교관이 자기가 한 번 잡아 보겠 다고 나서서 부지런히 사냥을 다녔지만 좀처럼 노루가 잡히질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참모학부에 근무하는 권영욱 중령(장군)의 동생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 해서 경상북도의 김촌을 갔는데 우연히 총포상회에 노루 뼈를 발라 묶어서 상품으로 진열해 놓은 것을 발견했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아버지를 살릴 길을 주시는 구나.' 생각하 고 노루 뼈를 사 가지고 기쁜 마음으로 돌아왔다. 야간열차로 진해로 돌아오자마자 푹 끓여서 드시게 했더니 웬걸 하루가 다 지나기도 전에 몸이 퉁퉁 붓기 시작하고 척추에 견딜 수 없을 정도의 통증을 느끼시게 되어 구급차로 진해 해군병원 응급실로 옮겼다. 해군병원에서는 척추 암으로 진단을 내리고 만약에 수술을 한다 해도 아주 어렵고 위험하기도 하지만 수술이 잘 되어야 3년 정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진단 이었다. 더욱이 난처한 문제는 군의관들이 환자가 현역군인이 아니기 때문에 수술이 잘못되 었을 경우의 책임을 우려해서 수술을 기피하려고 하는 것이 몹시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 러나 내 능력으로는 민간병원으로 아버님을 모시고 갈 수 있는 형편이 못되었다. 나는 서울 어머님의 결심을 얻어 모든 책임을 내가 지겠으니 수술을 해달라고 군의관들에게 간청하여 결국 수술을 받게 되었다. 천만다행으로 결과가 아주 좋아 2주만에 퇴원을 하시고 집에서 요양하다가 약 두 달 후부 터는 지팡이를 짚고 걸어 다니실 수 있게 되었다. 일단 스스로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 아버님은 서울 어머님 곁으로 돌아가시기를 원하여 모셔 다 드렸다. 그 후 어머님은 아버님을 위하여 가게를 정리하시고 바닷가인 충청남도 서 천에 내려가셔서 요양을 하셨다. 그 덕분으로 아버님은 수술을 받으신 후 5 년을 더 사시다 세상을 떠나셨다. 1969년이 다 저물어 갈 무렵 예년과 같이 1970년도 대령 진급예정자 발표가 있었다. 2년 간의 육군대학 교관생활도 성공적으로 마쳐 가는 나는 당연히 진급이 되리라고 기대했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중령으로 진급하여 5년 차나 되었고 육군대학 정규과정을 수료한 중령 계급으로 3대 보직인 지휘관 직책인 대대장, 참모 직책인 사단일반참모, 교관 직책인 육군대 학 교관을 모두 역임하여 완벽한 경력관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속한 기갑병과와 육군대학에서도 모두 내가 진급된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인정하고 있 었다. 그러나 막상 발표된 대령 진급 대상자 명단에는 '대령 한 인수'라는 이름은 없었다. 한 잠도 자지 못하고 밤을 새워 고민을 하고 난 다음 나는 아내와 상의도 하지 않고 출근하자 마자 예편서(사직서)를 작성해서 제출하였다. 그 시점까지 혼신의 힘을 다 기울여 최선을 다 했는데도 진급이 안 되는 군대에 더 이상 남아 있어야할 필요를 느낄 수가 없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한참 붐을 이루 고 있던 중동에 노무자로 나가서 노동을 해도 군에서 내가 노력한 만큼 한다면 지금 보다 나을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나를 참을 수 없게 만든 것은 나의 진급탈락 확인과 동시에 제 1 및 2기갑 여단장 들에게서 각기 자기 여단 작전참모로 전입을 요청한다는 전문이었다. 나는 이미 2년 전에 여단보다 큰 보병 사단의 일반참모를 역임하였음에도 지금에 와서 기갑여단 작전참모를 해 야 진급이 된다고 하는 것은 직책상 강등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으로 도저히 군대의 상식으 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모두들 억울하지만 1년만 더 참으면 틀림없이 내년에는 진급이 될 것이라고 위로하면서 예 편서를 철회하라고 권고했지만 나는 마음을 좀처럼 바꾸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의 후견자 역할을 해 주신 S 장군의 말만은 인간적인 측면에서 거역할 수 없는 처지여서 그 분의 권유대로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제2기갑여단 작전참모로 부임 하게 되었다. 10. 돌아앉은 한신 장군 1970년 2월 5일 육군대학을 떠나 내키지 않는 제2기갑여단 작전참모로 부임하게 되었다. 나는 2기갑여단에 부임하기 전에 제1기갑여단장을 찾아가서 양해를 구했지만 A장군은 좀처 럼 오해가 풀리지 않는 듯했다. 사실 나를 먼저 요청한 것은 A장군이었고 또한 내가 기갑학 교 교무과장 직에 있을 때 A장군은 교수부장으로서 나의 직속상관이었음으로 그가 필요할 때 부름에 응하지 못하는 것은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육군에서 가장 생활여건이 좋은 육군대학에서 가장 여건이 열악한 전방지역에서 창설 된지 얼마 안 된 부대로 전출되는 과정에서 겪어야하는 어려움은 이루 말로는 다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별로 쓸만한 이삿짐은 없었지만 그래도 밥을 끓여 먹는 부엌살림과 옷가지 그리고 서책들 을 가지고 이사를 해야 하는데 부대에서 이사를 해주는 것도 아니고 개인의 힘으로 이사를 해야 했고 전방에 도착해도 거주할 주택이 마련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혼자서 먼저 부임하여 업무를 보면서 부대로부터 약4km 떨어진 부락에 있는 민가에 방 두 칸을 얻어놓고 가족을 불렀다. 두 칸 짜리 방은 칸이 막혀져 있지 않아 한가운데 줄 을 치고 모포로 칸을 막아 썼고, 나무 옷장 대신에 비닐 옷장을 설치하고 사용했다. 또한 부 엌이 없어 찬장을 대신한 사과궤짝을 방에 놓고, 비 오는 날에는 우산을 받치고 밥을 끓였 다. 그리고 아이들은 경기도 덕정중학과 덕정초등학교에 전학시켰다. 생활환경과 여건이 어느 때 보다도 어려운데다 엎친대 덮친 격으로 부대 안에서는 최악의 근무여건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참모장인 L 대령과의 악연이었다. 그는 사사건건 내가 하는 일에 트집을 잡고 불필요한 일을 시키고 마땅히 지원을 필요로 하는 사항들을 거절하여 골탕을 먹이는 바람에 나는 참으로 어려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러던 그해 4월 제1군사령관 한신 장군은 제1 및 제2기갑여단에 각기 자기의 작전지역에 대한 대전차장애물 설치계획을 포함한 대전차방어계획을 작성해서 2개월 후 군사령부에 출 두하여 여단장이 직접 보고하라는 중대한 지시를 하달함으로서 양 개 여단은 대 작업을 실 시해야 하는 과제를 부여받게되었다. 그 당시 육군의 전략적인 핵심과제의 하나는 적에 비하여 기갑부대의 편성, 장비 및 수적 인 면에서 절대적으로 열세에 놓여 있는 아군이 어떻게 하면 적의 기갑부대의 공격을 서울 이북지역에서 저지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 해결해야할 최우선의 전략 전술적인 과제였 다. 실로 이 작업은 예상되는 적의 기갑부대의 배치와 전술에 따라 투입되는 접근로를 분석하 여 그 접근로에 따르는 적의 전차 수와 아군의 작전계획을 대입시킨 War Game(모의 전투) 을 실시한 결과로 어느 곳에 어떤 장애물을 설치해야하며 그렇게 했을 때 적에게 입힐 수 있는 피해를 산정(算定)하여 완전하게 적 기갑부대를 섬멸할 수 있는 대전차방어계획을 세워 야 하는 참으로 방대한 작업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전 휴전선 155 마일을 그려놓은 대형 상황판을 설치하여 접근로 별로 세밀하게 적군 과 아군의 전투력을 대입시켜 놓고, 우리 여단이 담당한 작전지역에 대한 충분한 도상연구 를 한 후, 약 1개월 이상 현지정찰을 실시하였으며 그리고 나서 War Game을 해 보고 다시 현지에 나가 그 지형에 맞는 장애물을 결정하여 계획을 완성시켰다. 드디어 군사령관에게 보고해야 하는 날자가 다가왔다. 한신 사령관은 대한민국에서 군대를 갔다 온 사람은 누구나 인정하는 군사지식에 정통하며, 강직하고 존경받는 무서운 장군이었 다. 두 여단장이 1군사령부에서 사령관과 많은 장군 참모들 앞에서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각각 보고를 해야 하니 자연 비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먼저 제 1기갑여단장 A장군이 보고를 시작했는데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서 한신 사령관이 점점 옆으로 돌아앉기 시작했다. 원래 한신 사령관은 보고내용이 마땅치 않거나 잘못된 것 같으면 점점 옆으로 돌아앉는 습관이 있었다. 결국 한신 장군은 "다시 해!"라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방안의 분위기는 삽시간에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나는 보고도 못해 보고 돌아오게 되나 싶어 그만 가슴이 철렁했다. 만일에 그 날 보고를 못한다면 두 달 이상 밤잠을 설치면서 준 비해 왔던 것이 마므리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신 장군이 노기 띤 목소리였지만 의 외로 "다음!"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신속하게 준비해간 상황판을 설치하여 브리핑할 준비를 완료하고 브리핑 대 앞에 섰다. 그러나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가 '아니 여단장이 직접 보고를 하기로 되어 있는데 2기갑여단에서는 왜 작전참모가 그 자리에 서 있나?' 하고 의아한 눈초 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우리 여단장 S장군은 자리에서 일어나, 한신 장군에게 매우 송구스런 표정을 지으 며 목에다 손을 대고 마치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 것처럼 억지로 쉰 소리를 내면서 "소관 이 감기가 걸려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저희 작전참모로 하여금 대신 보고를 드리도록 하 겠습니다."라고 했다. 이것이 연극인지 전혀 알 리가 없는 사령관은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 고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여단장과 나는 어떻게 하던 여단장 대신 계획을 직 접 작성한 내가 브리핑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미리 작전을 짜놓았던 것이다. 드디어 나는 천신만고 끝에 여단장 대신 야전군의 최고 지휘관인 육군대장 한신 장군 앞에 서 브리핑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제 1기갑여단에서 여단장이 직접 보고를 하다가 단 칼에 중단된 판에 2기갑여단에서 중령인 작전참모가 보고를 하는 것에 무게가 실릴 분위기 가 아니었다. 사령관은 처음부터 옆으로 않은 채로 내가 브리핑을 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나는 자다 가 잠꼬대를 할 정도로 수없이 연습한 대로 차분하게 적군의 기갑부대에 대한 정보판단으로 부터 육군대학에서 사용하는 War Game의 방법을 적용하여 피, 아의 손실을 도출해서 산정 한 부분까지 설명했을 때, 돌연 사령관은 "잠깐, 손실기준에 대한 근거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닌가? 나는 즉각 주저 없이 "넷! 최근 미 국방성에서 발행한 미국 전차와 소련 전차의 종류에 따 른 War Game용 전투능력 손실률을 근거로 했습니다."라고 답변했다. 한신 장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 때부터 똑바로 앉아 뚫어지게 상황판을 바라보기 시작 했다. 사령관은 브리핑 도중에 자주 질문을 던졌지만 나는 막힘이 없이 답변을 했다. 사령관 의 뒤 좌석에 앉아 있던 참모들로부터 잘 되어간다는 수신호가 보내졌다. 나는 장장 1시간 반에 걸쳐 준비해 간 상황판에 Overlay를 붙여가며 브리핑을 해나갔다. 나는 내 앞에 많은 장군들이 앉아 있다는 자체도 잊어버리고 원고도 없이 마치 육군대학에서 학생들을 대상으 로 강의하듯 브리핑을 해 나갔다. 브리핑이 끝나자 한신 사령관은 뜻밖에도 "수고했어!" 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분명 이 한 마디는 한신 사령관에게서 좀처럼 듣기 힘든 칭찬이었다. 나는 너무나 기뻤다. 이어서 사령관은 "1기갑여단도 2기갑여단에서 작성된 보고서와 동일한 절차에 의해 자기 지역의 대전차방어계획을 다시 작성하라. 그리고 군사령부에서는 2기갑여단이 중심이 되어 계획을 통합하고 군사령부 공병과 협조시켜 계획을 완성한 후 참모총장에게 보고할 준비를 하라"라고 지시했다. 사령관이 퇴장하자 나와 우리 여단장은 군사령부 장군참모들을 비롯한 많은 참석자들로부 터 축하를 받았다. 그 동안 온 힘을 다 기울여 노력한 것이 헛되지 않아 대성공을 거둔것이 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다보니 상대적으로 제 1기갑여단장인 A장군은 아주 비참하게 되어버렸다. 나로서는 미안하기가 짝이 없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나 이 일로 인하여 A장군과 그 부 인은 후일까지 나에 대하여 몹시도 서운한 감정을 품었다고 한다. 우리 여단장은 귀대한 다음날 6군단장에게 전날 있었던 사령부 브리핑 결과를 보고했다. 군단장은 군단 산하 연대장 급 이상 및 사단 작전 및 정보참모를 대상으로 군단 지역의 대 전차방어계획을 브리핑하도록 지시를 하였다. 나는 6군단은 물론 군사령부에까지 얼굴이 꽤 나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힘 센 머슴에게는 일복도 많은 것처럼 군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앞으로 내가 직접 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었다. 11. 지옥의 나락에서 내 앞에 떨어진 과제를 가지고 씨름을 하고 있던 중 무더위가 한참인 8월의 어느 토요일 위기의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군단 및 사단 작전참모 회식이 2개월마다 한번 씩 부대별 로 돌아가면서 열렸는데 우리여단의 차례가 되어 여단사령부의 뒷산 골짜기에서 회식이 있 었다. 이날은 군단 참모장인 K장군, 나와 육군대학 동기생인 군단작전참모인 우태명 대령 그 리고 군단 예하 4개 사단 작전참모들과 평소에는 참여할 수 없었던 우리여단 참모장인 L대 령이 손님 접대 자격으로 참석했다. 기분 좋게 술이 취해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노래도 한 곡조씩 뽑으면서 이런 저런 담소를 하고 있는데 00사단 작전 참모인 박 중령이 나에게 "한 형! 한 형은 지난번 대전차방어계획 의 보고로 이번 진급은 따 놓은 당상이 아닙니까?" 라고 한 말이 도화선이 되었다. 그 말을 받아서 우 태명 대령이 "그렇지 않아도 되겠지만 이번은 틀림없지 뭐 !" 하고 응답을 하길 레 "어디 진급이라는 것이 예측한 대로 된 답디까?"라고 나는 자조 섞인 말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 때 우리여단 참모장인 L대령이 비웃는 듯한 어조로 "한 인수가 똑똑은 한데 인 생을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지요"하는 것이 아닌가?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는 온몸의 피 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내가 제일 경멸하는 인간으로부터 공개적으로 조소를 당하다니 그렇지 않아도 감정이 쌓이고 쌓여 있었는데 그 순간 나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 었다. 내가 "야! 이 OO 너!"하자 L 대령은 벌떡 일어나더니 "이 자식이?" 하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너 같이 살아야 인생을 잘사는 거냐? 그래 그 야비한 인생살이 수법을 가지고 내 인 생살이를 운운해? 이 더러운 자식아!"라고 내 뱉으면서 있는 힘을 다해 L대령의 얼굴에 주먹 을 한방 날렸다. 불시에 기습을 당한 L 대령은 맥없이 뒤로 나가떨어지고 일동은 모두 한 순간에 술이 확 깨어 버려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정지된 '동작 그만!' 현상이 되고만 것이었다. 모두가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있는데 군단참모장은 "이게 무슨 짓들이야? 한 인수! 너 군 법회의 대기해!" 하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이지만 분명 군에서 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하극상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물론 L 대령이나 나나 두 사람 다 술이 취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의 인사불성의 상태는 아 니었기 때문에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비록 취중이었지만 마음속에 쌓였던 것이 폭발되다보 니 그 자리에 있는 K장군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아무 할 말이 없었다. 아니, 할 말은 많았지만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20년 간의 군대 생활이 한 순간에 끝나는 지금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군인으로서 내가 저지 른 일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군법회의에 회부될 각오를 했다. 그 날 저녁 아내에게 낮에 있 었던 자초지종을 모두 이야기를 하고 우리 부부는 아무 말 없이 짐을 꾸렸다. 영문을 모르 는 아이들은 "아버지 우리 진해로 돌아가는 거예요?"라고 물었지만 나는 "아니, 서울로 간단 다."라고 밖에 대답할 수 없었다. 다음 날부터 군단작전참모인 우 대령은 나의 구명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발 벗고 나서기 시 작했다. 그는 우선 군단참모장 K장군에게 그 동안 나와 L 대령과의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소상히 설명했다. 그래도 K 장군이 마음을 돌리지 않자 우 대령은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일 에 대하여 설명하고 이번에 내가 군법회의에 회부된다면 한신 사령관이 참모총장에게 보고 하기 위한 대전차방어계획의 완성은 중단될 수밖에 없다는 것으로 은근히 압박(?)하면서 이 번만은 나를 용서해 줄 것을 간청했다. 한편 그 날 현장에 참석했던 각 사단작전참모들도 연이어 군단 참모장에게 나를 한 번만 용서해 주도록 진정을 함으로서 K장군은 마지못해서 술좌석에서 있었던 일로 처리하기로 결정지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당사자인 L대령이 가만히 있지 않고 나를 직접 군법회의에 회부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내 편에서 보면 그것은 그렇게 겁낼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보았을 때 L대령 은 군단참모장이 철회한 문제를 자기의 군 생명을 내걸고 참모장과 맞서는 모험을 할 위인 도 못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기갑병과 내에서도 큰 문제로 대두되어 여단장이나 S 장군 도 L 대령에게 더 이상 문제가 확대되면 두 사람이 같이 옷을 벗게 될 것이라는 점을 강조 하여 입을 봉하도록 만들었다. 수천 길 되는 벼랑 끝에서 떨어지기 직전의 아찔한 상황에서 그야말로 저승의 문턱까지 갔 다가 살아날 수 있도록 나를 위하여 구명운동을 해준 우 태명 대령을 비롯한 여러분들의 은 혜를 조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당시 내가 담당하고 있었던 대전차방어계획이 아니었다면 내가 그 엄청난 사건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하는 의심을 갖게 한다. 결국 적의 전차를 방어하 기 위한 대전차방어계획이 적의 전차를 방어하기 전에 내 목숨부터 구해준 셈이었다. 운명의 사건이 있은지 3개월 후인, 12월 초 어느 날 새벽, 나는 군용전화 벨소리에 깊은 잠에서 깨어 수화기를 들었다. " 한 인수! 축하한다." 2군사령부 작전참모인 S장군으로부터 걸려온 진급 소식이었다. 결국 나는 중령 6년째인 마지막 해를 눈물겹게 보내고 나서 드디어 1971년도 대령 진급자 명단 에 끼게 된 것이다. 군단 참모장 앞에서 L 대령의 면상을 때린 하극상 사건으로 군법회의에서 실형을 받고 군 복을 벗을 뻔한 사건이 있은 지 5개월만에 나는 대령으로 진급이 되어, L 대령에게서 여단 참모장 직책을 인계 받았으니, L 대령과 나는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만 나지 말아야할 악연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참모장 직책을 수행하면서도 155miles 휴전선으로부터 서울에 이르는 종심지대의 대 전차방어계획의 일환인 대전차장애물 설치계획을 작성하는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 부어야했다. 나는 지금도 전방지역에 설치된 대전차장애물의 95%까지가 나의 연필자국이 간 것이라고 생각하면 자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고 이것은 나의 군 생활에서 찾을 수 있는 큰 보람 중에 하나일 것이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남북회담에서 북쪽이 "평화를 정착시키려면 남쪽에 설치한 대전차장애 물부터 철거해야하지 않겠는가?"라고 제의를 했다고 하는데, 앞으로 이 땅에서 다시는 전쟁 이 일어나지 않아 내가 계획했던 대전차 장애물이 정말로 불필요한 장애물이 되어서 하루 속히 철거되기를 나도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란다. 그러나 분명히 그 당시로서는 대전차 장애물이 적 기갑부대를 방어할 수 있었던 전쟁억제 역할을 충분히 해 냈다고 확신한다. 1971년 10월말, 참모장 직에 보임된지 6개월만에 나는 월남파병 명령을 받게되었다. 재4부: 사이공 그리고 테헤란에서 1. 비서실장 1971년 11월 12일 가족들과 많은 군 친지들의 전송을 받으며 사이공행 군용여객기에 올 랐다. 전쟁터로 떠나는 것은 틀림이 없었지만 전송을 나온 사람들은 마치 10년 전 내가 도 미유학을 떠날 때 장도를 축하했던 분위기와 다를 바 없었다. 군용여객기에 오른 나는 해외 원정군의 일원으로서 부임하게 되는 새로운 임지에 대한 기 대와 호기심으로 가득 차있었다. 나와 같이 주월사 의무참모로 부임하게 되는 L대령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사이공의 탄산누트 공항에 도착하여 트랩을 내리자 후끈한 열기 가 월남 땅임을 실감케 해주었다. 우리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이해 주는 참모장 P 장군, 나와 교대할 김 세진 대령, 의전과장 윤 희선 중령을 비롯해 비서실 요원들이 출영을 나와 있었다. 우리는 참모장의 승용차에 동 승하여 사령부로 향했다. 나는 나 보다 윗분인 참모장의 마중에 너무나 황송하여 당황스럽 기까지 하였다. 사령부에 도착하자마자 사령관 L 중장(대장)에게 부임신고를 했다. 내가 주 월남한국군사령부 비서실장으로 부임하게 된 데에는 김 세진 대령의 추천에 의해 서였다. 그는 비서실장직을 마치고 보병 제3사단 18연대장으로 부임하게 되면서, 후임 비서 실장직을 나에게 꼭 인계하겠다는 뜻에서 사령관에게 나를 추천한 것이었다. 김 대령은 나와 전시사관학교 동기생이고 육군대학에서도 같이 교관생활을 하면서 어느 동 기생보다 절친해서 우리는 서로 간에 정직성과 능력을 인정하고 믿는 사이었다. 사실 나는 비서실장이라는 보직을 받기까지 사령관 L 장군을 한번도 모신 적이 없었다. 아 무리 신임이 두터운 김 대령의 추천이라 해도 한번도 대리고 써 본적이 없는 나를 비서실장 이라는 자리에 받아들이는 사령관의 넓은 도량에 대하여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착한 날 저녁 김 대령과 나는 사령관공관의 만찬에 초대되었다. 사령관께서는 떠나보내 는 김 대령에게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시고, 나에게는 열심히 해 줄 것을 당부하셨다. 만찬이 끝난 후 김 대령과 나는 숙소로 곧바로 돌아와 거의 밤을 지새우며 정담으로 회포를 풀었 다. 그런데 이것이 김 대령과 내가 정담을 나눌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일줄 은 꿈에서도 상 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의 숙소는 주 월남미군사령부가 사이공시내 중앙지대에 있는 특급호텔을 인수하여 대령 급을 위한 군용호텔로 운영하는 곳으로서, 미군 대령들과 같이 기숙하였는데 모든 면에서 편리하고 풍부하여 별천지에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육군대학에서 같이 교관생활을 한 작전참모 오 태한 대령과 Room mate가 되었다. 다음 날부터 김 대령과 3일간 업무 인수인계를 했는데 김 대령이 귀국준비에 쫓겨서 별로 상세하게 인계를 받지 못한 점이 다소 염려스러웠다. 주월사 비서실장이란 직책은 군 편제상 공식직함으로는 참모장 보좌관 일반참모 비서실장 이었지만 한편 실질적으로는 사령관의 개인비서 역할을 담당해야 함은 물론이다. 해외 주둔군의 특성으로 보아 주 월남미군사령부를 비롯한 월남군부, 한국대사관, 등 관계 기관과의 연락유지와 사령관의 일정계획의 수립 및 관리, 각 참모부의 업무협조 및 조정, 각 종 회의의 준비, 외부 방문객의 영접, 각종 연회 및 만찬의 준비, 공관의 살림살이 이외에도 선물준비와 같은 잡다한 일들이 많았다. 이 직책은 나에게 과분한 중책이며 새로이 접하게 되는 업무이다 보니 나는 단단한 각오로 직무에 임했다. 업무를 파악하는 과정에서 비서실의 공식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데는 별로 문제가 없었으나 개인비서 역할을 담당하는 부분에서는 어려움이 꽤나 있었다. 전임자인 김 대령은 사령관이 사단장 및 군단장을 역임할 당시 가깝게 모셨던 처지이어서 사령관을 개인적으로 보좌하는 일에 부족함이 없었으나 나는 사령관이나 가족을 한번도 가 까이에서 모신 적이 없다보니 부족하고 서툰 점이 많아서 조심스러웠다. 나는 비서실장이란 직을 수행하면서 나름대로 꼭 지켜야할 점 두 가지를 마음속에 깊이 담 고 직무를 수행했다. 그 첫째는 사령관의 명예가 조금이라도 손상되지 않도록 나 자신을 통 제하는 것이었고, 둘째로는 정확한 금전관리를 하는 것이었다. 아침 7시에 출근하여 밤 11-12시가 되어야 숙소에 돌아올 수 있는 것이 다반사였고 경우 에 따라서는 시간제한 없이 움직여야 했기 때문에 내 개인의 시간이란 거의 없었다. 특히 본국으로부터 쉴 틈 없이 방문하는 인사들에 대한 공항영접에 시간을 많이 빼앗겨서 하루에 열 번도 더 비행장에 나갔던 적도 있었다. 그래도 당시 39세의 건강한 체력을 가지고 있던 나는 직무가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견디어 내는 데는 문제가 별로 없었다. 그러나 나로서는 새로이 접해 보는 비서실장이란 직무가 서툴러서 업무상 실수를 종종하게 되었고, 그때마다 참모장 P 장군(대장)은 나에게 구세주가 되어주었다. 참모장은 많은 경륜 을 쌓아 해외 원정군사령부의 참모장으로 이미 1년 이상 근무하면서 그 능력을 십분 발휘하 고 있었다. 참모장은 내가 서툰 업무처리로 실수하면 질책을 하기보다는 다시 잘못되지 않도록 가르쳐 주었고 나의 실수를 윗분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감싸주는 따뜻한 인간미를 지닌 분이었다. 나는 모르는 것은 모두 물어 보았고 공, 사적인 모든 업무를 의논드리면서 처리해 나갔다. 솔직히 말하면 6개월 동안 나는 참모장으로부터 비서실장 직무교육을 받으면서 직무를 수 행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어서 지금까지도 감사함을 잊을 수가 없다. 이분은 30년이 넘는 나 의 군 생활을 통하여 내가 진심으로 존경할 수 있는 몇 분 중 한 분으로서 나의 삶에 지대 한 영향을 끼친 분이시다. 또한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는 추억거리의 하나는 누구의 제의에서 시작되었는지는 모르겠 으나 참모장과 나는 남들이 다 시아스타(낮잠)를 즐기는 35도c가 넘는 대낮에 단둘이서 테 니스를 하고 오후 근무를 하는 방법으로 건강관리를 하였으니, 두 사람 모두 기운이 넘쳐흘 렀던 것 같았다. 나는 1년 반 동안 사령관님을 모시면서 그분의 부대지휘 방법, 특히 안케패스 작전지휘를 통하여 그분의 끈기와 신중한 성품을 보고 대부대 지휘관상에 대한 감명을 받았다. 나는 믿고 존경하는 상관을 모시는데 있어서 나의 언행은 나 개인보다 내가 모시는 분에게 영향이 미친다는 사실에서 각별한 처신이 따라야 했다. 또 한편 남들이 모르는 고충을 혼자 삭여야 하는 어렵고 힘든 직무였기에 나는 수도하는 수도승과 같은 심정으로 나에게 맡겨진 이 직무를 묵묵히 수행했다. 나는 이 직책을 통하여 남달리 얻은 지식도 많았지만 가치 있 고 보람된 귀중한 체험도 했다. 이것은 내가 한 단계 높이 도약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음 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월남에서 근무하는 1년 반이란 기간에 나에게는 즐거웠고 보람되었던 일, 그런가 하면 괴 로웠고 입맛이 씁쓸했던 일들이 꽤나 많이 있었다. 지금에 와서는 하나의 추억거리에 지나 지 않게 되었지만, 그중 몇 가지를 여기에 담아본다. 월남에 와서 6개월이 되던 무렵, 처음으로 면세냉장고 티켓 한 장을 얻어 집에 보냈다. 아 이들은 처음 보는 냉장고가 얼음을 얼리는 것이 신기한지 아이들 넷이 각각 사발에 설탕물 을 타서 냉동실에 넣어 얼음 과자를 만들어 먹는 재미로 밖에 나갔다 들어올 때마다 냉장고 문을 열고 드려다 보는 통에 냉장고가 불이 날 지경이라는 아내의 편지를 받고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까지도 나는 집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월남으로 떠나 올 때 가족들을 전세 값이 싼 서울의 변두리인 상계동에 두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두 딸아이들이 서울의 이태원 근처에 있는 학교를 다니다 보니 통학거리가 멀어 너무나 고생스러웠다고 한다. 서울시내로 나와야겠다고 판단한 아내는 중앙경리단장을 찾아가서 우리 집 사정을 이야기하고 매월 나 오는 봉급 1년 분을 한몫 지급해 줄 것을 간청하여 그 돈으로 용산동의 15평짜리 전세 아파 트를 얻어 다섯 식구가 살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을 사령관께서 어떻게 아셨는지 철군준비로 한 참 바쁜 73년 2월말, 나를 공관 으로 부르시더니 나에게 두툼한 봉투를 하나 주시면서 "자네는 대령이 될 때까지 집 한 칸 이 없다니 즛! 즛! 이 돈은 월남에서 절대 쓰면 안돼, 돌아가서 집을 사는데 보태라"라고 하 면서 주시는 것이 아닌 가! 외면적으로 무뚝뚝하게만 보이는 사령관의 내면에서 풍기는 이런 정감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덕분에 나는 처음 내 집으로 18평 아파트를 마련할 수 있었다. 나는 진심으로 감사 드렸다. 당시 나는 월남전에 참전한 기갑병과 장교 중 최 상위 계급 자였다. 나는 전방사단에 예속 된 장갑중대를 방문하여 기갑장병들을 격려해 주고 싶었으나, 나의 직책 때문에 나는 사이 공에 위치한 사령부를 쉽게 떠날 수가 없었다. 결국 전방사단에서 개최되는 지휘관회의 시, 회의준비 명분으로 단 두 번 전방부대를 방문 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고, 이 때 기갑장병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그들은 나를 기갑병과의 선임 장교로서 자랑스럽게 여기며 맞아주었다. 72년 말, 나는 무엇인가 병과에 기여할 일이 없을 가 생각하던 중에, 월남전에서 노획한 소련제 T-54전차와 SU-76장갑차 각각 1대식을 본국의 기갑학교에 보내주면, 북한군이 보 유하고 있는 적 전차의 실물을 한번도 보지 못한 상태에서 교육을 받는 기갑장병들에게 적 전차에 대한 실질적인 교육효과가 클 것으로 생각되었다. 나는 사령관의 승인을 얻어 각 1대식의 전차와 장갑차가 움직일 수 있는 상태로 완전하게 정비하여 우리의 해군 LST에 실려 보냈다. 기갑학교에서는 한동안 좋은 교보재로 활용하였 고, 현재 이 전차와 장갑차는 태능 육군사관학교에 전시되어 있다. 장교들이 월남전에 참전하기 어려웠던 이 당시 상황에서도 특히 기갑장교들의 참전기회는 하늘의 별 따기 정도였다. 내가 주 월사에 부임하였을 때 비서실 행정과장인 이 준 중령은 1년의 임기가 만료되어 귀국 직전에 있었으나, 귀국을 추가로 1년 반이나 연장시켰다. 또한 의전과장으로 천00 중령을 그리고 8사단에서 같이 근무한 부관참모였던 조00 중령을 비서 실 의전과장과 참모장 보좌관으로 특별요청 하여 보임시켰다. 가능하면 한 사람의 기갑장교 라도 월남전에 참전할 수 있도록 노력해 보았다. 나로 인해 그 기회를 갖게 된 사람들 중 지금까지도 고마움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인간적인 서운함을 느끼게 하는 사람도 있었다. 72년 중순의 어느 날, 사령부 인사참모가 기갑병과 L대령의 백마사단 참모장 보임 발령확 인이 육군본부로부터 접수되었는데 알고 있느냐고 전문을 나에게 내 보이는 것이었다. 나는 인사참모에게 결재를 당분간 보류하도록 하고, 이 문제를 놓고 곰곰이 생각했다. 아무리 생 각해도 L대령의 수법에 대하여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주 월남한국군을 위해서나 기 갑병과를 위해서도 어떻게든 L대령의 월남전입을 막아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령 관을 비롯한 지휘부에 직접 L대령의 주 월남한국군 전입자체를 막아야하는 이유를 조심스럽 게 건의함으로서 이 문제를 종결지울 수 있었다. 주 월남한국군사령부에는 20여명이 넘는 월남아가씨들이 각 부처에서 근무하고 있었으며 비서실에도 2명이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이 대학을 졸업한 재원들로 선발되었으며, 타자와 통역 그리고 월남정부나 군과의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사령부는 이들이 한국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2개 팀으로 나누어 한국을 견학시켰다. 이들 중 5-6명이 한국인과 결혼하였는데 비서실에 근무하는 아가씨(이름이 기억나지 않음) 도 내 밑에서 근무하다 현지 제대로 미국회사에 취업한 박 하사와 결혼하였다. 내가 1982년 광주 제1군관구 부사령관으로 근무할 당시 광주시내 충장로 근처에 월남식당 이 생겼다는 소문을 듣고 월남음식의 향수가 느껴져서 물어물어 찾아갔다. 나는 뜻밖에도 그곳에서 식당주인인 바로 박 하사 부부를 만나게 되었다. 앳되고 가날프게만 보였던 월남 아가씨가 인제는 아줌마 티를 풍기면서 나를 보자 "실장님!" 하면서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은 다시 사이공의 주 월남한국군사령부 비서실의 시절을 연상케 하였다. 또한 1996년 내가 호주의 시드니에 도착하여 어느 한국교회에 나갔더니 나와 종씨인 한 00 집사가 주 월사 비서실장이었던 한 대령인 나를 자기의 부인이 안다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그녀의 이름은 레티풍유로서 사령부 공병참모부에 근무하였으며, 사이공 대학 법대를 나와 이미 변호사 자격증을 소지한 재원이었다. 이 부부 역시 사이공 한국인교회 김00목사 의 주례로 결혼하였다. 사이공이 함락되기 직전 호주로 왔다고 한다. 이 이외 내 사무실을 관리하던 남00병장이 현지제대를 원하여 그렇게 조치해 주었다. 월남 패망 후 그의 소식을 몰라 궁금했었는데 시드니에 와서 만나게 되었다. 그도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을 볼 때 마음이 흐뭇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것을 우연이라고 해야 할 지? 사람의 인연이란 참으로 끈질긴 것인가 보다. 철군하기 약6개원 전 아내에게서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져왔다. 나에게 비서실장 직을 인계 하고 18연대장으로 나가 있던 김 세진 대령이 머리를 다처 위독한 상태로 국군통합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것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상태를 보고 싶고 무언가 라도 도움이 되어주고 싶었지 만 내 입장은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김 대령을 위해 기도하는 것 이외 할 수 있는 일이라 고는 아내를 보내 가족들을 위로해 주는 일이 고작이었다. 나는 내가 귀국할 때까지 만이라 도 살아 있어 달라고 하느님께 또 기도 드렸다. 그는 나를 기다렸는지 나의 기도대로 내가 귀국하여 내 손으로 장례를 치러줄 수 있었다. 지금은 내가 호주에 거주하고 있어서 1년에 한 번 일시 귀국할 때, 그 가족을 찾아볼 수밖 에 없는 처지여서 그 가족을 돌봐주지 못하는 내 자신이 안쓰러울 따름이다. 최종적인 마지막 제대로 철군하는 73년3월23일을 약2개월여를 남겨놓은 어느 날, 주 월사 대령 급 참모들은 비공식적으로 모여 철군 후 한국에서 각자가 받는 보직은 가급적이면 사 령관의 인근에서 멀리 떨어진 보직을 받도록 하자고 합의하였으며, 아울러 사령관을 수행하 는 필수요원은 보좌관, 전속부관, 그리고 관사담당 하사관으로 한정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 으로 일치되었다. 나는 다행히 육군본부 정보참모부장 양 봉직 장군(전 8사단장)이 정보참모부 국외전략정보 과장으로 요청하여 보임되었다. 그 당시 정보참모부의 과장으로 북한과장 노태우 대령, 보안 과장 김 희오 대령, 기보과장에 김 기석 대령, 그리고 내가 국외전략정보과장으로 같이 근무 할 기회를 갖게 되었고, 후일 4명 모두 장군으로 승진하였다. 나는 보직을 받고도 사령관의 국회귀국보고를 위시하여 수다한 보고와 각 요로의 방문일정 때문에 1개월 이상 비서실장으로서 잔여업무를 마무리지어야 했다. 2. 월남전 에피소드 내가 월남에서 근무하면서 겪고 보아온 여러 가지 일들 가운데 이 시점에 이르러 공개해도 무방한 현재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몇 가지 에피소드들을 소개해 본다. 첫 번째 이야기는 1970년 주 월남미군사령부가 돌연 군표(해외 주둔군이 사용하는 특수지 패)개혁을 단행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실제로 한국군이 보유하고 있던 군표가 미군이 주 월남한국군에게 할당한 군표의 액수보다 엄청나게 많은 액수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사실 이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기업과 기술자들이 보유한 군표액수도 엄청났고 또한 미 군표를 이용하여 미국 본토 달러와 교환하는 돈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꽤나 되었으니 그 액수도 무 시할 수 없는 액수였다. 당연히 우리정부의 지시는 어떻게 해서든지 미군과 협상하여 군은 물론 민간인이 가지고 있는 군표까지도 전액을 교환하라는 지시였다. 부사령관이 협상대표로 나서서 앞으로 한국 군은 미 군표를 사용할 때 주 월남한국군이 발행하는 쿠폰을 같이 사용하겠다는 조건을 제 시하여 우여곡절을 겪고 한국인이 보유한 막대한 미 군표를 전액 교환하여 휴지조각이 될 번한 한국인의 돈을 살려내는데 성공하였다. 두 번째 이야기는 군수물자를 수송하는 한진의 사업과 관련된 일이었다. 하루는 조 중훈 사장이 나에게 전화로 사령관을 방문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했다. 이튿날 조 사장은 사령관 을 만나 수송물동량이 감소되어 수송능력이 남아도는 실정이라며 수송물동량을 증가시킬 수 있는 방안을 건의했다. 그런데 그 방법이란 것이 지금 생각하면 아주 원시적인 것이었다. 사 령부가 전방부대에 야간 요란사격을 최대로 실시하라는 작전지시를 하달함으로서 포탄의 수 송량과 탄피의 반송 량을 증가시켜 수송물동량을 증가시키는 결과를 만드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수송용역을 맡은 한진이 더 많은 달러를 벌 수 있도록 포탄을 많이 운반하기 위하여 포탄을 많이 쏘아 없애는 방법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 이런 경우는 실제로 주 월남한국군이 많은 한국기업들을 도와 준 예 중 한 예에 불과하다. 세 번째 이야기는 귀국 Box에 얽힌 미군과의 신경전이었다. 파병된 한국군 장병들이 귀국 할 때 사방 1m 되는 나무상자에 자기가 사용하던 사물이나 구입한 물품을 담아 갈 수 있는 귀국 Box라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사병들은 받는 급여가 적고 PX에서 구입할 수 있는 물 품이 한정되다보니 사실상 자기에게 할당된 Box에 물건을 채워가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그 래서 가급적이면 부대에서 도와주어 미군의 휴대식량인 C-Ration 등을 넣어 주고 포탄의 탄 피를 넣어 채워주었다. 당시 우리의 입장에서는 무엇이던 간에 하나라도 더 한국으로 가져 가면 개인이나 국가적인 측면에서 경제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72년의 어느 날 주 월남미군 항만사령부는 귀국 Box를 실고 퀴논 항을 출항하여 항해중 인 수송선을 돌연 귀항시켰다. 그 이유는 수송화물의 적제착오로 재점검을 실시하기 위해서 란 핑계였다. 그리고 한국군의 귀국 Box를 다시 하역하면서 기중기로 Box를 들어 옮기다가 실수한 것처럼 3개를 떨어트려 Box에 담긴 물건들을 쏟아 트렷다. 두 말할 것도 없이 탄피 들이 흩어져 쏟아졌고 그들의 행동은 분명히 의도적이었기 때문에 보고를 받은 우리는 몹시 도 모욕감을 느꼈다. 우리사령부는 대책회의를 개최하였고 참모장이 미군사령부를 방문해서 정식으로 항의하고 문제를 종결지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미군측은 한국군이 주 월남한국군에게 지급한 미군의 최신무기와 장비를 귀국Box속에 담아서 한국으로 운반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증거를 확보하기 위한 공 작이었던 것이다. 다행히 무기와 장비 등은 노출이 되지 않았지만 미군의 정보는 잘못된 것 만도 아니었다. 네 번째 이야기는 허위 전과보고(戰果報告) 문제였다. 종종 허위 전과보고가 나타나자 전과 는 노획한 무기의 종류와 수를 확인하고 인정하기로 하였다. 그랬더니 일부 몰지작한 지휘 관은 군수품을 팔아 그 돈으로 월남군이나 민병대로부터 소총 등 각종무기를 구입, 노획무 기라 하여 전투상황을 꾸며 허위전공으로 진급의 명예까지 누리는 또 다른 병폐가 생겨났 다. 전쟁터에서 공명심의 지나친 경쟁으로 극히 일부 지휘관들의 허위전과보고는 사령부를 골치 아프게 하였다. 할 수 없이 사령부에서는 허위전과보고를 예방하기 위하여 항상 전과 보고에 대한 감찰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섯 번째 이야기는 담배 컨테이너 도둑 사건이었다. 주 월남미군사령부로부터 퀴논지역에 서 담배가 가득히 적재되어 있는 미군 PX 대형 컨테이너 1대가 통째로 실종되었는데 컨테 이너가 한국군 부대의 영내로 들어갔으니 조사하여 주기를 바란다는 공식요청이 들어왔다. 우리 사령부에서 현지부대에 나가 조사할 때는 이미 컨테이너 자체를 통째로 땅에 파묻어 버린 후였다. 이 사건은 엄청나게 큰 사건이었기에 사령부의 입장에서는 내부적으로 조사 하여 조치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미군 측에 사실무근이라고 통보한 것은 물론이다. 이러한 비화들은 월남에 파병된 한국군이 애국적 견지에서 조국의 어려운 경제에 보탬을 하고자 노력하였던 단면과 어느 전쟁 속에서도 있는 극히 부분적인 병폐에 대하여 고심하고 번뇌했던 일들을 사실대로 표현한 것이다 미국이 주도한 월남전쟁은 1975년 4월30일 사이공이 월맹군에 함락됨으로서 11년 1개월이 란 장기간의 전쟁을 치루고 종식되었다. 월남전쟁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미국의 오만과 섣부른 판단으로 시작된 정의롭지 못한 전쟁으 로 평가되는 추세이다. 그러나 이 전쟁에 우리가 참전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월남에 파병하는 대신 주한 미군을 묶어 두는 방책으로서, 그 당시 우리나라로서는 선택의 여지 가 없었고 약소민족의 뼈아픈 국가의 생존전략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군은 1964년 9월, 제1이동외과병원을 시작으로 전투병력을 파병함으로 서 5만명 수준의 파월 한국군이 1973년 3월, 철군하기까지 8년 6개월 동안 32만5천명의장병이 참전하여 4,960명의 장병이 전사했고 10,962명의 전상자를 냈을 뿐만이 아니라 고엽제 피해자 만도 만여명을 내는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 희생의 대가로 우리는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우리의 안보를 확고히 하고 경제개발 의 기틀과 세계진출의 발판을 마련하였으며 "하면 된다"는 진취적인 민족적 자신감을 얻게 된 것은 월남전에서 챙긴 귀중하고 막대한 국가 이익이라 하겠다. 이제 우리는 조국의 국익을 위해 희생된 그들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군인의 한 사람으로 월남 전에 참전했던 나는 모든 희생자들에게 한 없는 위로를 들인다. 3. 무관의 길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국외전략정보과장으로 근무하는 어느 날 무관을 선발하는 시험이 있 다는 정보를 얻게 되었다. 사실은 도미 유학을 끝마칠 무렵부터 막연하나마 군인 외교관이 라고 할 수 있는 무관의 직책에 매력을 느껴왔었다. 더 멀리 생각한다면 외교관이 되고 싶 었던 중학교 3학년 때부터의 소원을 이룰 기회가 온 셈이었다. 그러나 무관으로 나간다는 것은 나의 군 생애는 물론 전 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결정 을 내려야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 때가 '무관으로 군 생애를 끝맺을 것인가? 아니면 장 군으로 진급할 것인가' 하는 갈림길에 선 순간이기 때문이다. 군의 인사법에 대령 계급의 정년이 7년이고 그 동안에 장성 진급을 하지 못하면 전역을 하 게 되어 있었다. 당시 나는 이미 대령이 된지 3년이 지났고 만일 무관으로 나가게 되면 교 육기간 대략 1년에 임기 3 년을 합한 4 년을 마치고 귀국하게 되어 있었다. 그렇게 되면 계 급 정년 7년 중에 몇 개월밖에 남지 않아서 진급 심사를 받을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번밖에 없게 되어 단 한 번의 심사에서 장군진급이 되기를 바란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 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당시만 해도 육군은 해군이나 공군에 비하여 완고한 편이여서 처자식까지 데리 고 해외에 나가서 호강하고 돌아온 처지에 장군 진급을 기대 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분위기 였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무관 출신이 장군으로 진급을 하기는 드문 일이었다. 결국 무관을 택한다면 장군 진급을 포기해야만 하고 군인의 영광인 장군으로 승진하려면 무관을 포기해야만 하는 실로 선택하기 어려운 양자택일의 기로에 처하게 되었다. 대령이 될 때까지 내가 속한 기갑병과에서는 비교적 완벽한 경력을 쌓아 장군진급 대상자 로서의 조건이 갖추어진 상태를 포기한다는 것은 손에 쥐어준 떡을 스스로 내던지는 것이라 고 군의 친지와 동료들은 당연히 무관을 포기해야 한다고 만류하였다. 그러나 나는 출세도 중요하지만 아이들에게 일찍 넓은 바깥세상을 구경시키고 공부시킬 수 있는 기회 또한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 때 효숙이 19세, 진숙이 18세, 정민이 16세, 상학이 가 14세이어서 외국에서 공부하기에 가장 적당한 나이였다. 또 한편 내 인생의 목표였던 외 교관이 되는 그 목표의 일부나마 달성해 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되어 무관의 길을 택하기 로 결심했다. 결단을 내리고 나니 아쉽기도 했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는 "무관을 끝내고 돌아와서 장 군진급이 되지 말라는 법이 있나?" 라는 터무니없는 배짱도 생겼지만 사실상 확률은 거의 없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장군으로 진급이 되지 못해도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을 스 스로 다짐하였다. 1974년 1월 이란에 파견될 나를 비롯하여 일본 해군무관에 L대령, 비율빈에 H대령, 인도 네시아에 Y대령, 캄보디아에 K대령, 이태리에 K대령, 서독에 K대령, 사우디아라비아에 P대 령이 합동 참모본부 정보국에 소속되어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우리는 먼저 2개월 간 육군정보학교와 중앙정보부에서 정보장교로서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지식과 기술을 습득했다. 그 후 3개월 간 국방대학원에서 세계와 주재국정세 및 활동무대의 배경에 대한 분석과정을 수료하고 외교연구원에서 부부가 같이 2주간 외교관이 갖추어야할 에티켓과 프로토골(의전) 및 외교의 관례 등을 교육받았다. 또한 우리부부는 물론 두 딸까지 보고서 작성에 필요한 한글 및 영문 타자 교육을 여군훈련소에서 함께 받았다. 이 외에도 주재국 언어는 각자가 주재국 대사관의 협조를 받아 개인교수를 통하여 공부하 고 낮에는 연습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외교계에서는 필수적이라 할 수 있는 댄스, 골프 등 은 개별적으로 야간에 연습하는 것으로 보충하였다. 마치 수험생이 대학입시 준비하듯이 빡 빡한 스케줄에 맞추어 외교관으로서 갖추어야할 것들을 교육받는데 대략 8개월이 걸렸다. 그런데 알고 보니 외교관이 되기 위해서는 사람만 준비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물건으로도 준비해야할 것이 엄청나게 많았다. 같이 파견될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내 경우에는 현 지에 가서 입어야할 옷을 장만해야 하는 것부터가 큰 문제였다. 내 군복은 각기 춘추 정복, 예복, 야회복까지 전부 군에서 새로 맞추어 주어 별 문제가 없 었지만 사복 4벌과 아내가 계절에 맞추어 입어야할 한복은 완전히 개인의 힘으로 마련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더 나가서 부임지에 가서 집안을 한국적 분위기가 나도록 꾸미기 위해서 집안 장식품들도 장만해야 했다. 예를 들어 그때까지 만져 보지도 못했던 수를 놓아 만든 병풍, 자개 꽃병, 문갑 등이 필요했다. 거기에다 덧붙여 부임해서 사용할 선물로 자수정 및 연수정의 귀걸이 목걸이 아리랑 지갑 등을 준비해야 했다. 이런 모든 것들을 개인이 알아서 능력 것 준비해야 했기 때문에 당시 나의 경제 사정으로 는 보통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개인적인 일이라면 얼마든지 절약해서 검소하게 살면 될 일이지만 무관이란 직책이 국가를 대표하는 외교관이다 보니 최소한 국가의 체면이 손상이 되지 않을 정도로는 준비를 해야 했다. 한 마디로 과부 달라 돈을 얻어서라도 갖출 것들을 개인이 알아서 준비해야하는 상황이었다. 어렵게 조금씩 준비가 되어가고 있었지만, 출국할 날자가 가까워올수록 아버님의 건강 때 문에 마음은 점점 무거워졌다. 74세이셨던 아버님께서 척추 암으로 언제 돌아 가실지 모르 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태의 부친을 두고서 장남인 내가 자칫하면 부친의 임종 을 지켜볼 수 없을지도 모를 먼 길을 떠나야하니 마음이 어찌 편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군대 일이란 것이 개인 사정으로 연기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고민 끝에 만일을 대비하여 할 수 있는 일부터 하기로 하였다. 먼저 묘지를 구입하고 장례 때 필요한 물품들 을 준비해 놓았다. 가장 큰 일인 묘지를 경기도 송추에 있는 신세계 공원묘지로 정하고 아 버님을 모시고가서 보여드렸더니 다행히도 무척 좋아하셨다. 그렇게라도 준비를 해놓고 떠 나게 되니 그래도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은 덜어진 느낌이었다. 드디어 1974년 9월 10일 친지들의 전송을 받으며 우리 가족은 방콕행 비행기에 올랐다. 방콕에서 이란의 수도 테헤란으로 가는 비행기로 갈아타기 위해서는 이틀을 머물게 되어 있 었다. 나로서는 외국에 나가는 것은 이번이 세 번째이지만 이번 여행은 외국 여행을 할 때 마다 "언제나 가족들과 함께 해외여행을 해보나"하고 항상 꿈꾸어 왔던 것이 드디어 실현되 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여행이었다. 비행기를 처음 타보는 아내와 아이들은 비행기가 이륙할 때는 불안한지 입을 꼭 다물고 아 무 말도 하지 않더니 안전벨트를 풀어도 된다는 신호가 켜지자 아이들은 서로 창가를 차지 하여 밖을 내려다보려고 야단들이었다. 아내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아무 말이 없었지만 아내의 표정에서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충분히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도 무어라고 분위기에 어울리는 말을 해 야겠다고 생각해서 무언가 할 말을 찾았지만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서 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만 꼭 잡고 있었다. 지금까지 나를 위해 집 한 칸 없이 살아온 아내가 행복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고 장군이 되지 못하더라도 후회하지 않겠다는 결단을 내 리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그 때가 우리의 결혼생활 중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 아니었는가 싶다. 비행기가 태국 영공에 들어오자 밑을 내려다 본 아이들은 처음 보는 야자수들을 보고 소 리를 질러댔다. 방콕관광에서 아이들은 코끼리도 타고 큰 구렁이를 목에 감아 보기도 하면 서 즐거워했고 아내는 이색적인 각종 먹거리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이렇게 가족들이 즐거움에 흠뻑 젖어 있는 모습을 보고서 나는 처음으로 아이들에게 아버 지 노릇을 한번 해 보는구나하는 뿌듯한 생각이 들었다. 첫날 관광을 끝내고 호텔로 돌아와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방에 돌아왔을 때 아내가 보따리 하나를 풀었다. 무엇인가 했더니 아주 작은 몽키 바나나를 위시하여 여러 가지 종류의 바나 나가 5kg이나 들어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식구들은 저녁밥을 먹고 난 다음인데도 그것을 거의 반을 먹어치웠다. 사실상 그 당시 한국에서 바나나는 흔한 과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식 구들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때까지 바나나 한 번 제대로 먹여 보지 못한 것에 대하 여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4. 주이란 국방무관 이틀 동안 방콕에서 관광을 한 우리는 독일의 루프탄자 항공기로 9월14일 새벽 테헤란공 항에 도착했다. 전임자인 강 신구 대령 부부가 우리를 맞아 주었다. 업무의 인수인계는 15일간의 범위 내에서 주재국에 이임 및 부임신고를 비롯해서 10월1일 국군의 날 경축 Reception에 각국의 외교관들을 초청하여 신구임 무관부부가 합동으로 Reception Line에 서서 인사함으로서 완료됐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사항은 지금까지 접촉해 왔거나 앞으로 꼭 접촉해야 할 인물에 대한 인수 인계였다. 전임자가 떠나고 본격적으로 무관생활이 시작되자 이란 군부에서 발송한 공문이 모두 이란 어(페르샤어)로 오고 가는 것에 제일 먼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외교 문서인 만큼 국제 공용어인 영어가 어느 정도 쓰일 줄 알았는데 완전히 페르샤어였다. 물론 공문을 번역하는 이란인 여직원이 있기는 했지만 군대나 외교에 대한 감각이 전혀 있 을 수 없는 여대생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번역을 하고 있는 것인지 불안하고 답답했다. 또 한편으로 난감했던 일은 주택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주택이 단지 우리 가족이 살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각국의 외교관들을 초청하여 만찬을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 이었다. 집이 내 개인의 체면이 아닌 국가의 체면을 고려할 만한 집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정부가 지급하는 주택비로서는 도저히 그런 정도의 수준을 맞출 수가 없었다. 더욱이 당시의 이란은 팔레비 왕이 철저한 독재정치를 펴면서 국민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하여 그 동안 석유 값을 올려서 외국으로부터 벌어들인 달러로 일반 생필품은 생산 원가 보다도 더 싸게 공급했지만 나머지 물가는 오히려 구라파보다도 더 비싼 형편이었다. 궁여지책으로 처음에는 운전기사를 쓰다가 내가 지리를 어느 정도 익힌 다음에는 기사를 그만두게 하고 내가 직접 운전함으로서 기사의 월급을 주택비에 충당해서 집 문제를 해결하 기로 했다. 여하간에 재정 운영계획을 융통성 있게 잘 세우지 않으면 본격적으로 업무를 시 작하기도 전에 낭패를 당할 판이었다. 가난한 나라의 외교관으로 타국의 외교관들에게 궁색함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은 나의 첫 번 째 과제였다. 그러나 한편 외교관에게 주어진 면세특혜를 이용해서 가전용품, 식품, 주류 그리고 승용차를 살 수 있었던 것은 도움이 되었다. 대사관에는 외무부 직원인 대사를 비롯한 공사, 참사관, 영사, 통신사와 중앙정보부 요원 2 명과 나를 합하여 8명이 근무를 했다. 1년 후 중동 붐이 불면서 참사관 1명, 노동부에서 파 견된 노무관 2명과 문화공보부에서 파견된 공보관 1명이 증원되어 대한민국 해외 공관 중에 서 손꼽을 수 있을만한 큰 공관이 되었다. 무관부 사무실에는 나와 현지에서 고용한 여비서 와 운전기사가 있었다. 당시 이란에는 우리나라와 북한을 포함한 세계 각국에서 85개국이 대사관을 설치하고 한 국을 비롯한 24개국에서 40명의 무관이 파견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미국, 소련, 중공, 영국, 서독, 동독, 불란서, 이태리, 캐나다, 인도,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필리핀, 에짚트, 이락, 사우디아라비아, 수단, 북예멘, 터키, 루마니아, 유고, 이스라엘, 남아 프리카) 소련 무관은 육군소장이었는데 당시에 우리의 가상 적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상 당히 우호적인데 반해 중공무관은 내가 말을 걸어도 일체 응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악수 를 청해도 응하지 않다가 이임할 때 마지막 악수를 한 번할 정도로 적대적이었다. 군복은 입었지만 중공군은 당시 계급이 없었기 때문에 계급 없는 장군 급이었던 그를 우리는 Mr, Wang이라고 불렀다. 그는 어디를 가나 항상 통역관을 대동하고 다녔다. 무관 가운데 누구보다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사람은 서독 무관이었다. 2차 대전에 참전하여 부상으로 왼쪽 팔을 잃어버린 대령이었는데 의수를 하고도 오히려 군인으로서의 명예와 자 부심을 갖고 활동하는 것이 내게는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군인으로서 근무 하는데 부적격자로 분류되어 당장에 전역 조치되었을 장애자를 독일은 오히려 전쟁에 참여 했던 경험과 연윤을 살려서 전투업무가 아닌 외교업무에 인재를 유효하게 활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업무를 본격적으로 시작해보니 외교계의 일상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 만찬 및 리셉션은 흔 히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화려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외교관들은 항상 격식을 갖추어 품 위가 있게 행동하고 최대한 부드러운 언어를 사용하지만 외교계라는 곳은 절대 실수가 용납 될 수 없는 냉정한 세계인 것이다. 외교계에서 적용되는 제1의 기본원칙은 철저한 'Give and Take' 이기 때문에 비록 이해관 계가 걸린 일이 아니더라도 상대방이 한 행동에 대하여 정확하게 대응을 하는 것이 외교계 의 상식이다. 작은 예로 행사에 초청을 받고서 이유 없이 참석하지 않으면 그 이후 상대방 의 초청에 절대로 참석치 않을 뿐만 아니라 비록 초청에 응했을 지라도 상대방이 초청장에 명시된 복장을 갖추지 않고 왔을 경우에는 그 다음 상대방이 초청할 때 역시 이 쪽에서도 초청장에 기록된 복장을 갖추지 않고 참석하는 정도이다. 외교계에서 무관의 복장 즉, 군복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녀서 다른 옷처럼 아무 때나 기분에 따라 입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주재국의 군 행사 때 각국의 무관이 자기 나라 고유의 군복을 입고 참석하는 것은 물론 초청하는 국가의 국경일과 국군의 날 그 리고 국가원수가 주최하는 행사에만 군복을 입고 참석한다. 사실상 파티에 각국의 무관이 각기 자기 나라의 고유한 군복에 울긋불긋한 계급장과 훈장을 달고 참석하면 파티의 분위기 를 화려하게 살려 주는 셈이 된다. 보통 외교계에서 파티를 열게 되는 경우 각 나라를 대표하는 대사들을 초청하는 것은 당연 한 것이지만 그 다음 순위는 무관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항상 개인적으로 초청하는 파티가 아닌 공식초청은 대사와 무관이 국가를 대표하여 함께 초청되는 것이 통상적인 관례 로 되어 있다.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달력에는 참석해야할 파티들이 마치 유명 연예인의 공연 스케줄 같이 항상 빼곡히 기록되어 있었다. 금요일과 토요일(회교국의 주말은 금요일과 토요일임)을 제외한 날은 거의 저녁시간에 리셉숀이나 만찬이 1건 이상이었고 어느 때는 파티참석 스케 줄이 2중 3중으로 겹치는 경우도 많았다. 부득이한 경우가 아닌 이상 초청을 해온 파티에는 반듯이 참석을 하는 것이 관례이지만 리셉숀이 겹칠 때는 시간을 잘 배정하여 잠깐 참석한 다음에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겹치기 참석을 해야 했다. 그런데 무관의 경우는 초청장에 요청된 복장을 입어 주어야 하는 것이 외교상의 예의라서 당사자들에게는 이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초청하는 측의 요구하는 복장이 서로 다른 경우에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승용차 안에서 군복과 사복을 번 갈라 갈아입고 참 석해야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또한 외교관례에 있어서 시간을 엄수하는 것은 절대적 원칙이지만 시간 지키는 것에도 상 식과 기준이 있어 보통 리셉숀의 경우는 참석시간이 조금 늦거나 빨라도 문제가 안 되지만 만찬인 경우는 시간을 꼭 지켜야하는 것이 기본 예의이다. 즉, 10분 정도 늦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그 이상 늦는 것은 물론, 반대로 초청된 시간 이전에 도착하는 것은 큰 결례가 된다. 왜냐하면 내가 일찍 도착함으로서 주최측은 나 때문에 필요 없는 신경을 쓰게 되어 정작 만 찬을 준비하는 것에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통이 혼잡한 저녁시간에 시간을 지키기 위하여 조금 일찍 만찬 장소 근처에 가서 빙빙 돌다가 시간을 맞추어 들어가야 하는 해프닝도 많았다. 외교관의 파티는 표면상으로는 사교지만 내면적으로는 서로 간에 필요한 정보를 교환하는 기회이기 때문에 치열한 정보수집 공작이 물밑에서 진행되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파티에 나가면 '누구에게 무엇을 물어 볼 것인가?', 또는 '무엇을 알려 주고 무엇을 얻을 것인가?', '누구와 언제어디에서 무슨 건으로 만날 약속을 할 것인가?' 등에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했다. 무관이 해야 할 업무 가운데 주기적으로 해야 할 중요한 일의 하나는 격주마다 파우치(외 교행낭)편으로 수집된 정보와 정보 물 등을 포함한 정기보고서를 합동참모본부 정보국으로 보내고 본국에서 보내는 첩보수집 지시 및 행정지시 등을 담은 파우치를 받는 것이었다. 그 런데 이 파우치를 묶고 뜯는 것은 물론 발송하고 수령하는 것을 누구에게도 대행시킬 수 없 고 무관이 직접 공항에 나가서 해야만 했다. 물론 긴급하고 보안을 요하는 업무는 수시로 무전을 통하여 암호로 보고하고 지시를 받았다. 전임자가 떠나고 혼자서 겨우 정상적으로 업무를 진행할 수 있게 되었을 때쯤인 11월 30일 국방부로부터 무전으로 전보 한 장을 받았다. 혹시나 하고 걱정을 하고 있던 대로 아버님의 운명 소식이었다. 그러나 내 처지는 부임한지 2개월밖에 안되어서 당장에 귀국할 수도 없는 일이고 또 귀국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당시의 항공편으로는 시간적으로 장례식 기간에 도착 할 수도 없어서 사실상 참석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더욱이 부친의 상을 당했으면 귀국을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 임에도 불구하고 합참본부에서 온 전보에도 귀국하라는 내용이 없었다. 결국 전문 내용을 해석해 본다면 사실상 귀국불가와 다름이 없었다. 집안의 장남으로서 아버님의 임종을 지키지 못함은 고사하고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는 심정 은 참으로 괴롭고 통탄스러운 일이었다. 평생을 자식을 위해 희생하신 아버님의 장례도 치 르지 못하는 불효자식이 된 자책감은 아무리 가슴을 치고 땅 바닥을 두드려도 풀릴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국제전화 사정이 어려운 실정이기는 했지만 그 동안 전화라도 자주 드리지 못했던 일이 가장 가슴 저리게 후회가 되었다. 나는 우리 집에 빈소를 차리고 몇몇 교인들과 함께 예배를 드림으로 그나마 조금이라도 위 안을 받았다. 나는 지금도 아버님의 장례에 대하여 나의 형제 부부들에게 늘 미안하게 생각 하고 있다 5. 몰려오는 피난민들 내가 부임했을 당시 테헤란에는 우리 공관직원의 가족들을 비롯하여 이란 왕실의 초청으 로 잠업을 자문하기 위하여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교수이신 김 문협 박사와 나환자치료 및 관리를 위하여 피부과 의사 고영훈 박사 그리고 KOTRA 요원들이 주재하고 있었고 개별적으 로 삼성에서 나온 무역 상사요원, 미국 및 영국기업에 취업하고 있는 약간명의 기술자와 병 아리 감별사 등이 거주하고 있어서 교민의 수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후 이란의 경제규모가 급격히 확장되고 소위 이란 붐이 불자 우리나라에서 의 사들이 추가로 초청되고 연이어 무역상사들이 주재하게 되고, 신원개발이 최초로 이란의 서 남쪽 페루샤 만에 접해 있는 Khorramshar항구(테헤란에서 1,100km 떨어져 있으며 쿠웨이트 와 접경지임) 부두공사를 맡은 것을 필두로 하여 Shiraz 비료공장에 신화건설이 진출하는 등 한국회사들이 속속 진출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수도인 테헤란에 거주하는 우리 교민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내가 부임한지 약 6개월 후 전혀 예기치 못했던 급작스런 상황이 벌어졌다.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이 함락되어 공산화되자 월남에 살던 우리 교민들이 허둥지둥 월남을 떠나야 하 게 되었다. 월남에 살던 우리교민들은 월남에서 해외진출의 경험으로 자신감을 얻어 한국에 돌아가기 보다 중동지역을 비롯하여 호주와 미국 등 여러 곳으로 새로이 진출할 곳을 찾았다. 때 마 침 중동 붐이 분 때이고 중동에서는 이란이 제일 살기 좋다는 소문이 떠돌아 그 중 많은 인 원이 이란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밀려오는 월남교민들의 실상은 비록 6.25 때와 비교한다 면 훨씬 형편이 나았지만 당장 일 할 곳도, 머물 곳도 없이 보따리를 들고 오는 것이 피난 민과 다름이 없는 형편이었다. 급기야는 대부분의 피난민이 거의 맨주먹으로 도착하여 집단 으로 대사관을 찾아와서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더욱이 내 개인적으로 매우 곤란했던 것은 사람들이 내가 주 월남한국군사령부 비서실장으 로 근무했다는 소문을 듣고서 나를 잘 안다면서 찾아오는 사람들이었다. 사실은 나를 찾아 오는 사람들 중,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내가 전혀 기억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해서 찾아 온 사람들을 차마 모른다고 할 수는 없어서 거짓으로라도 아는 척을 해주어야 했다. 급작스럽게 닥친 상황에 대사관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고 대사는 급기야 긴급 대책회의 를 소집하였다. 그러나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일이라서 별 뾰족한 대책이 있을 수가 없었 다. 더욱이 대사관이라는 곳이 말과 문서로 일하는 곳이지 예산을 가지고 움직이는 곳이 아 니다 보니 애당초 대책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어 회의는 알맹이가 없이 겉 돌 수밖에 없 었고 분위기는 자연히 어떻게 하면 문제가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소극적인 방법 만 찾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러다가 결론은 많은 한국인들이 경제적 능력이 없이 그대로 이란에 남아 있게 된다면 우리나라의 위신이 손상되는 일이 발생할 우려가 큰 만큼 본국에 전세비행기를 요청하여 강제로 귀국조치 시켜 버리자는 쪽으로 모아졌다. 그러나 나는 그런 해결 방법에는 전혀 공감할 수 없어서 내 의견을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해외공관의 첫 번째 임무가 주재국에서 자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아닙니까? 또 그렇지 않아 도 우리나라는 땅덩어리가 좁아서 가능하면 많은 국민을 해외로 내보내는 것이 국가시책인 데 자기발로 걸어들어 온 우리국민을 강제 송환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 합니다. 먼저 우리가 이곳에서 소화시켜 볼 수 있도록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해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됩니다." 내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대사가 큰 소리로 "그러면 한 대령이 책임을 질 수 있소?" 라고 역 정을 내었다. 나로서는 대책을 강구하기 위한 회의이기 때문에 나의 생각을 발언했을 뿐인 데 대사의 반응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어째서 제가 책임을 져야합니까? 공관의 일이야 당연히 대사님이 책임지셔야지요. 그러나 우리 앞에 떨어진 일은 공관직원 모두가 책임감을 느끼고 노력해 보아야 하는 것 아닙니 까?" 라고 응수했다. 외무부 직원들은 아무 소리가 없는데 국방부 소속인 내가 이렇게 나오자 당연히 대사도 기 분이 언짢았을 터이었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회의는 아무 결론도 내리지 못하고 끝나서 차라리 회의를 하지 않은 것만도 못하게 되었다. 나는 3년간 대사관에서 근무하면서 외무부 전문외교관들의 에리트 의식으로 가득찬 그들의 능력보다도 외교관으로서 국익을 먼저 생각하고 자국민을 보호하고자 하는 애국봉사 의식의 결여가 문제라고 생각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나는 내가 뱉어 놓은 말 때문에라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민 끝에 이란 공군본부 인사참모부장인 Barambagie 중장을 찾아갔다. 당시 파라비왕은 옛 폐르샤 왕국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무기를 대량으로 사 들여 중동 제1의 군사대국의 꿈을 꾸고 있었다. 이란은 군비를 확충하는 정책으로 어느 한 강대국에서 모든 무기를 도입하는 것을 지양하고 무기 구입 다변화정책을 사용했다. 예를 들면 육군의 무기는 주로 소련 제품으로, 공군의 항공기는 주로 미국제품으로 그리고 해군 의 군함은 영국과 불란서 제품으로 나눠서 구입하고, 그 범주 내에서도 또 다시 분류해서 즉 전차를 구입 할 때도 소련과 미국의 2가지 종류로 나누어 구입했다. 군사전문가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히 무기체계는 하나로 통일되는 것이 원칙이지만, 파라비 왕은 언제 변할지 모르는 국제사회에서 이란에 무기를 판매한 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될 경우 를 고려하는 안목에서 여러 나라로부터 무기를 구입한 것이었다. 비록 팔라비왕이 호메이니 의 혁명으로 쫓겨난 다음의 일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팔라비왕이 염려하던 상황이 현실이 되 어 이란은 미국과 적대적인 나라가 되어 버렸다. 세계의 강대국들은 이란에 무기를 판매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던 상황이기 때문에 미국의 국방장관은 이란을 방문하여 파라비왕에게 무기체계가 서로 다르면 전쟁수행에 큰 차질이 초래할 수 있다고 직접적으로 조언을 하기까지 했다. 팔레비왕은 미국의 무기 일변도 무기구입 요구를 거부했지만 결국 미국은 막대한 항공기를 이란에 판매하는데 성공했다. 미국은 이란 공군이 자체적으로 항공기를 관리 유지할 능력이 생기기 이전에 가능한 한도에서 많은 미국기술자들을 이란에 파견시켜 높은 임금을 받아냈 을 뿐만이 아니라 항공기 부속품과 소모품들을 실제로 필요한 량보다 훨씬 많이 떠 안겼다. 그러나 이란공군 측도 이러한 사실을 모를 리가 없는 일이기 때문에 은밀하게 미국 의존도 를 축소시키는 대책을 찾고 있었다. 그들이 찾는 대상은 이란과 같이 미국제 항공기를 사용 하면서도 미국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체적으로 보급과 정비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나라였 다. 이런 과정에서, 이란 공군은 한국 공군을 주목하게 되었고 그들이 찾는 조건에 만족하는 대상이 된다고 판단해서 한국공군의 기술요원을 파견해 주기를 요청해 왔다. 나는 Barambegie 중장으로부터 이런 요청을 받고 본국에 긴급히 전문을 띄워 전격적으로 2개월만에 우수한 현역기술요원 5명을 제대시켜 이란 공군에 취업시켰다. 물론 이 작업은 미국이 모르게 해야 하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일이지만 해외 취업이 하늘의 별 따기 같았던 당시로서는 정말로 드문 쾌거가 아닐 수 없었다. 당연히 한국공군에서 오랫동안 잘 훈련받은 우수한 기술자들은 이란공군 관계자들을 놀래게 만들 충분한 능력이 있었다. 결과 가 예상보다도 좋게 나타나자 이란공군의 인사참모부장은 나에게 감사의 서신을 보내면서 앞으로도 계속 우수한 기술요원을 추천해 줄 것을 요청하여 왔던 것이다. 나는 Barambegie 장군에게 항공기 정비요원과 부품 관리전문요원을 추천하겠다고 했더니 두말 없이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내가 신분을 보증하여 최초로 1주일만에 10명 이 취업되었다. 때마침 그 당시 이란공군은 많은 인원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기술만 있다면 계속해서 취업 을 시킬 수가 있는 여건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이란 당국이 내가 보증하는 사람을 받아준다 했더라도 기술이 전혀 없는 사람들을 추천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취업 작전을 성공적으로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직업훈련 과정이 필요하게 되었다. 나는 이미 취업되어 근무하고 있는 우수 기술자로 하여금 특기가 없는 교민들에게 항공기 정비부품 관리방법을 가르치도록 했다. 그러나 학교도 교재도 시간도 없어서 급한 대로 교 민들을 우리 집에 모아 야간에 2주간씩 교육을 시켜서 구술시험에 합격할 수 있는 최소한의 취업 교육을 실시했다. 그러나 당장에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 절박한 때인 만큼 가르치는 사 람도 배우는 사람도 최선을 다해서 진지하게 교육에 임했다. 이렇게 임시교육을 받아 해당 분야의 기술자로 급조되어 취업이 된 사람이 항공기 부품보급 외에도 통신, 용접 기타 직종 등으로 확산되어 약 1년여에 걸쳐 380 여명이나 되었다. 결국 그 때 대사가 역정을 내면서 "한 대령이 책임을 질 수 있느냐?"고 나를 코너로 몰지 않았더라면 나 역시 다른 공관직원들처럼 꼭 내가 해야 할 업무가 아닌 일에 발 벗고 나서 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 시기에 나의 사무실은 인생복덕방이 되었고 우리 집은 밤에는 직업학교 주일에는 교회 로 이용되어서 비싼 집세가 아깝지 않게 쓰이고 있었다. 6. 군사외교와 세일즈맨 군인외교관이라는 특수한 신분으로서 무관의 역할은 당연히 국익을 위한 실리를 챙기는 일이었다. 무관의 역할은 대부분이 인내와 세심하게 주의가 집중되어야 하는 어려운 문제이 어서 문제가 잘 해결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문제가 잘 해결이 되지 않아 난처한 입장에 처 해 질 때면 정신적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하기도 했다. 부임하고 4개월 후 우리나라 해군사관생도 실습함대의 첫 번째 이란 방문을 준비하는 일이 당면한 과제였다. 주재국의 군부는 물론이고 여러 관계기관들과 3개월 간에 거친 교섭이 필 요했다. 그러나 이란군의 과잉 보안조치와 업무를 신속하게 처리하지 않는 특유의 회교권의 기질 때문에 함대가 본국을 출항하기 2주전까지도 방문승인이 나지 않아 본국으로부터는 계 속 독촉을 받게 되어 그야 말로 피가 마를 지경이었다. 다행히도 신원개발이 부두공사를 하고 있는 이란의 서남쪽 페루샤만에 접해 있는 Khorramshar 항구(테헤란으로부터 1,100km)로 함대가 입항하게 되어, 회사를 통하여 환영 행사 준비를 대대적으로 할 수 있어 별도로 우리 교민을 멀리서 동원하지 않아도 되었다. 나와 우리 가족은 비행기로 2일 전에 환영행사 준비를 위해 현지에 내려가서 이란 해군과 협조사항을 교섭하고 행사준비를 했다. 태극기를 바닷바람에 휘날리며 코람샤 항에 입항하는 2척의 우리 해군 구축함을 맞이하는 감격은 어찌 말로 다 형용할 수 있으랴! 내 나라 밖에서 태극기를 바라보는 엄숙한 마음의 자세는 조국에 대한 애국심과 존엄성으로 나에게 더욱 뜨겁게 느껴졌다. 본국에서 기름 값이 싼 이란에서 군함에 기름을 넣도록 하라는 지시가 있었는데 이란 코람 샤 해군기지 사령관인 Alley소장을 예방할 때 자개꽃병을 선물했더니 환영행사를 성대하게 해주었음은 물론 2척의 군함에 기름을 무상으로 가득 채워 넣어 주었다. 국방대학원 졸업반의 한 팀이 이란의 국방현황을 시찰하는 목적으로 정00 장군을 단장으로 12명이 5박6일 일정으로 이란을 공식 방문하였다. 나는 이란 국방장관이나 차관과 합참의장 을 예방하고 국방대학원을 방문하며, 우리 집에서 리셉숀을 열어 주재국 군부요인과 외국무 관들을 초청하여 교제토록 하고 관광을 계획하여 안내해야 했다. 이 행사과정에서 이란군 측은 우리가 요구한 모든 사항을 의의 없이 받아들임은 물론 예상 외로 요청하지도 않은 옛 페르샤의 고도인 Isfahan(우리나라의 경주에 해당되며, 테헤란에서 425km)을 관광하는데 특별항공기와 안내장교까지 내 주는 호의를 베풀어주었다. 이 여행에 나와 큰딸 효숙이가 같이 수행하여 페르샤어 통역을 맡았다. 그러나 알고 보니 이란군의 환대는 6개월 후 이란 국방대학원생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를 대비한 사전 대책이 었다. 또 한번은 합참의장 한 신 대장과 정보국장 일행이 유럽과 중동국가를 순방하는데 이란도 포함시키려는 계획이 있었다. 본국의 지시에 따라 이란의 국방장관과 합참의장을 예방하는 공식방문을 요청하였으나, 때 마침 이란의 합참의장이 소련을 방문하기 때문에 다음 기회로 연기하자는 회신이 왔다. 이란군의 회신을 본국에 보고하였으나 본국에서는 그 시기에 방문이 꼭 이루어지도록 성사 시키라는 지시가 다시 떨어졌다. 한번 거론되었던 사안에 대하여 다시 거론을 한다는 것은 외교의 관례를 무시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란에 다시 요청하였으나, 결국 성사시키지 못 하였다. 무관의 소속이 합참 정보국 소속이기 때문에 나의 직속상관인 정보국장과 합참의장 의 방문을 성사시키지 못하여 애가 타서 죽을 지경인 나의 심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정보수집이란 것이 혼자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외롭고 힘든 일이어서 아무리 애를 써도 얻어야할 정보를 수집할 수 없을 때는 정말 난감했다. 더욱이 본국에서 특별히 요청하는 정보 및 첩보를 수집하는 것은 정말로 긴장되는 일이었다. 한번은 2차 중동전 당시 북한의 전투기 조종사가 아랍국가의 전투기를 탑승하고 참전하였 다는 첩보가 있으니 몇 명이 어떤 나라에 참전했으며 어떤 전투기에 탑승했는지 현재도 북 한 조종사가 남아 있는지 여부를 수집 보고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나는 일단 비교적 친하게 지나던 아랍국가인 이집트 국방무관 공군대령 A. Raman Nasr부 부와 이락 국방무관인 육군준장 M.A.A Jummah부부를 집으로 초청하여 만찬을 베풀고 한국 산 연수정으로 깎은 목걸이 귀걸이 및 반지 세트를 아리랑 주머니에 넣어 선물로 주었다. 이락 무관도 선물로 이락 산 18금으로 세팅한 루비반지를 가지고 와서 아내에게 주었는데 지금까지도 아내는 그 반지를 애용하고 있다. 일단 분위기를 조성한 다음 약 10여일 후 나는 수집해야할 첩보사항을 탐색하기 위해서 두 사람을 개별적으로 만났다. 이락무관은 본국에 확인하여 알려주겠다고 했는데 전투기 조종 사 출신인 이집트 무관은 바로 자기가 있던 비행장에서 북한 조종사들을 보았다는 것이다. 결국 나는 이집트와 시리아에서 북한 조종사가 7-8명이 활동하였고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는 신빙성이 있는 첩보를 수집 보고하는 개가를 올렸다. 또 한번은 김일성이 혹을 수술하기 위하여 비밀리에 동구라파 어느 나라에 체류 중이라는 첩보가 있으니 어느 국가에서 체류했는지? 수술하였다면 상태는 어떤지? 를 수집 보고 하라 는 지시가 떨어졌는데 이것은 참으로 수집하기 힘든 첩보사항들이었다. 그 당시 이란에는 공식적인 무관활동은 할 수 없는 이스라엘과 남아프리카의 무관들도 외 무부 외교관 신분으로 위장하여 나와 있어 비밀리에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국가 무관들과 접촉하고 있어서 그들로부터 얻어지는 첩보는 값진 것이 꽤나 많았다. 특히 이들을 통하여 인도양을 통과하여 중동과 동구권 국가를 왕래하는 북한의 선박이동 사항에 대한 첩보사진 과 시간이 담긴 정보를 정기적으로 본국에 보고할 수가 있었다. 나는 김일성이 수술할 가능성이 있는 나라로 당시 동독을 생각해서 서독 무관인 A. V. weithershim 대령과 이스라엘과 남아프리카의 무관들에게 탐색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아무 런 소득이 없었다. 하는 수없이 보다 대담하게 직접적인 방법으로 루마니아 무관 Vessile Olaru대령과 유고 무관인 D. Medic대령에게 조건부로 탐색하였으나 결국은 허사였다. 이 이외도 이란군의 군비증강 상황, 이란과 인접국과의 전쟁 가능성, 이란 소련 간의 국경 선 수비상태 등이 중요한 첩보 수집사항들이었다. 1977년도 초의 어느 날, 북예멘의 무관 A. M. Riad중령이 약속시간에 내 사무실로 찾아왔 다. 그는 한국이 사우디에 군수물자를 많이 판매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자기 나라는 돈이 없어 구매할 수는 없고 전투복, 군화, 철모, 수통, 탄띠, 배낭, 철조망, 천막 등의 군수 물자를 무상으로 지원해 줄 수 없겠는가? 하고 물어오는 것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소련의 후원을 받는 공산세력이 중동지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예멘은 북예멘과 남예멘으로 갈라져 있었고 북예멘이 핑크 색의 사회주의이라면 남예멘은 적색이라 할 수 있는 공산주의 국가체제였으며 남북예멘은 사실상 교전 중에 있었다. 북한은 남북 2개 예멘에 대사관을 설치하고 있었고 북예멘은 미국을 위시한 서방국가는 물 론 공산국과도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다. 한편 그 당시 우리나라는 외교의 세를 북한에 비하 여 월등하게 넓이기 위하여 심지어 북한의 공관이 먼저 설치된 나라일지라도 수교를 맺고자 맹렬한 외교공세를 가하는 시점이었다. 나는 본국에 문의하여 결과를 알려주겠다고 하고 즉각 암호로 본국에 이 사실을 타전하였 다. 1주일 후 암호로 온 답신은 북예멘 무관과 계속 접촉하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언질을 주되 그 대가로 한국과의 외교관계 수립 가능성을 탐색해 보라는 지시였다. 나는 다시 Riad중령을 만나 '본국의 뜻은 귀국이 요청한 군수물자를 지원할 의사가 있으나 먼저 두 나라의 외교관계를 설정하고 지원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라고 설명하면서 탐색해 보았다. 그는 1주일도 안되어 사정이 급하니 우선 소량이라도 지원해 주면 좋겠으며 필요하 다면 비공식적으로 북예멘을 방문하여 상호 비공식 논의를 할 수도 있다고 전해왔다. 이 정 도라면 적극적인 의사 표시로서 일이 급진전될 가능성이 보여 급히 암호전문을 전송했다. 신변의 안전에 대한 보장을 받을 수 있으면, 북예멘에 입국하여 그곳의 실정과 북예멘의 책 임자의 의사를 타진하고 돌아오는 방법을 채택하라는 지시전문을 받았다. 나는 즉각 비밀리에 북예멘 출장계획을 준비하면서 Riad중령에게 신변의 안전 이외 북한 대사관의 세부현황 및 북한의 군사지원현황에 대한 정보의 제공과 아울러 보병여단 및 기갑 부대 그리고 군수부대 방문을 허용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내가 출발하기 1주 전 급작스럽게 Riad중령이 본국의 체신부장관으로 임명받고 귀 국하게 되었다. 드디어 1977년 5월 초. 나는 사우디를 거처 1주일에 한번밖에 운항되지 않는 미국 TWA여 객기로 북예멘의 수도 사나로 향했다. 100여명 이상이 탈수 있는 좌석은 10명도 안 되는 승 객으로 텅텅 비어 있어서 젊은 여승무원들의 서비스는 귀찮을 정도로 좋았다. 나는 비행기 안에서 혼자 눈을 감고 25년 전 미국의 군사원조를 받던 나라의 군인으로서 이제 남의 나라 군사원조를 하기 위하여 내가 그 대표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니 감개가 무량 했다. 사나 공항에 착륙하면서 공항을 내려다보니 소련제 MIG-17인 듯싶은 전투기 10여대가 계 류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것이 북예멘 공군력의 전부인 듯싶었다. Riad장관의 영접을 받 고 경호원 2명의 호위를 받으며 특별출구로 빠져나와 지정된 숙소에 도착하였다. 짐을 풀자 마자 테헤란을 떠날 때 이미 미국육군무관 C. L. Daschle대령으로 하여금 주 북예멘 미국무 관에게 연락하도록 협조해 놓았기 때문에 미 대사관부 무관 Hacck대령부터 찾아가 만일의 사태를 위해 내가 묵고 있는 숙소와 연락방법을 강구했다. 다음 날부터 부대를 방문해보니 북예멘군의 상태는 마치 1950년 6.25당시 한국군의 군장 상태와 비슷한 것 같았다. 각 부대에는 소련군 고문관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나를 보고 당연 히 북한에서 온 사람으로 알고 반겨주었다. 셋째 날 오전 사우디를 통해 탁송한 약 1천여 명분의 개인군장 품을 확인하여 북예멘 군사 령관에게 인계하는 인계식을 거행하였는데 그들은 군수품들을 보고 "made in korea"를 연발 하면서 무척이나 좋아하며 감사해 했다. 남의 나라를 돕게 된 입장에 서게 된 나는 우리나 라 국력의 신장을 실감하면서 마음의 흐뭇함과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오후의 시간계획에 따라 인근지역을 관광하는데 길거리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동양 사람을 만나 서로 의아해 하면서 처다 보는데 머리를 깎은 모양새가 아무래도 이북사람 같지가 않 았다. 그가 먼저 나에게 "혹시?"하고 말을 걸어왔다. 나는 혹시라도 '내 신분이 노출되는 것 을 우려해서 모른 척 할까 하다가 이 외진 곳에 한국 사람이 웬 일인가 싶어서 "네, 한국 사 람인 데요" 했다. 그는 내 손을 텁석 잡더니 반갑다고 손을 놓지 않았다. 알고 보니 그는 삼 성에서 만든 전자 손목시계(적색 수자가 표시되는)를 판매하기 위해 온 세일즈맨이었다. 국 교가 수립되지 않은 이 오지의 나라라도 세일즈맨은 민간외교관으로 먼저 입국해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니 놀랍기도 했지만 가슴이 뭉클해 졌다. 넷째 날 예상하지 못한 대통령을 예방하는 기회를 갖게 되어 Hammidi대통령으로부터 아랍 인 남자들이 남자의 상징을 표시하기 위하여 차고 다니는 아라비안 단도를 선물로 받고 나 는 한국의 자개꽃병을 선사했다. 나는 북예멘을 방문하는 동안 계획했던 수교의 언질을 받아내고 북한대사관 현황과 북한의 군사지원현황 등을 입수하는 등 목적을 충분히 달성하고 외부로 나오는 비행기가 있는 6일 만에 북예멘을 무사히 빠져나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약6 개월 후 Hammidi대통령이 암살 당했고 그 무렵 나는 무관임기를 마치고 귀국하여 그 후속조치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없었다. 목적하였던 두 나라의 수교관 계는 당연히 외무부로 인계되었을 것이고, 그로부터 약 3년 후 우리나라는 북예멘과 수교되 었는데 아마도 수교가 늦어진 이유가 Hammidi대통령의 암살 사건과 무관하지 안았을 것이 다. 1970년 중반부터 우리나라 무관들도 군사외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국에서 생산하는 무기 나 군수물품 또는 비 군수물품도 판매하는 국제 세일즈맨 역할도 담당하기 시작하였다. 이란의 군비확충으로 군수물품의 시장이 크다는 소문으로 초반에는 민간인 판매업자를 무 관이 협조하고 지원해 주라는 국방부의 지시가 있었으나, 후반에는 국방부 군수국에서 직접 판매단을 구성하여 내방하기에 이르렀고 그 판매실적으로 무관업무성과에 반영한다고 했다. 1975년도 한국타이어 한 상무가 내방했을 때, 이란 육군에만 1차적으로 각종 타이어 5,000개, 2차에 7,000개를 판매할 수 있도록 알선하고 지원했다. 또한 1976년도 국방부 군 수국 판매단이 왔을 때는 24인용 대형 천막과 개인 우의를 비롯하여 각종 군수물품 약 90만 불의 액수를 판매하는 실적을 올리기도 하였다. 나는 3년 간이라는 무관생활을 통해서 화려하면서도 냉혹한 국제사교장에서 소기의 목적달 성을 위해 밖으로는 웃어야하지만 속으로는 긴장 속에서 살았고 어떤 때는 일부러 속아주는 인내심을 지니고 지나야 했다. 7. 한국인 교회와 학교 내가 부임하고 약 1개월이 되었을 무렵 독실한 장로인 김 문협 박사가 사무실로 인사차 찾아왔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KOTRA(한국 무역관 )관장인 김 기락씨 댁에서 김 장로의 인도로 금요일마다 예배를 드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반가운 마음으로 그 다음 주일에 참 석을 해보니 십여 명이 모여 있었다. 이란은 회교국이라 금요일부터 종교적 휴일이고 오히려 일요일은 정상적인 근무일이라 교 회의 예배도 금요일 오전에 드렸다. 약 3개월 후 김 문협 장로가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였고 교인 수도 약30-40여명으로 늘어 나 예배를 보기 위해서는 더 넓은 장소가 필요했다. 장소를 물색해보았지만 별 뾰족한 대안 을 찾을 수가 없어서 결국 우리 집 응접실이 제일 넓기 때문에 주일마다 우리 집에서 모이 게 되었다. 그런데 6-7개월 후 월남의 패망으로 월남에 살던 교민들이 이란으로 몰려들면서 교민의 수 가 늘어나다 보니 자연히 교인수도 증가하게 되어 100여명이 넘어 더 이상 우리 집에서 예 배를 보는 것도 불가능해져 또 다시 예배장소를 물색해야만 했다. 그러던 중 회교도국가인 이란에도 기독교 교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중의 하나인 Tehran시의 Nader-shah st에 위치한 알메리안 교회를 빌려서 사용하게 되었다. 한국 교회가 테헤란에 하나밖에 없기도 했지만 생활이 안정되지 못한 교민들이 상호 정보 를 교환하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기대 때문에라 도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왔다. 그 중에는 가장 중요한 취업문제의 지름길인 이란공군에 취 업하기 위하여 무관인 나를 만나기 위해서 교회를 찾았을 것이다. 다행히도 교민들의 취업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자 다음으로 급한 것이 교민 자녀들의 교 육 문제였다. 외국인학교로는 미국계 American Community School이 있지만 워낙 학비가 비싸서 대부분의 교민들은 자녀를 보낼 엄두를 낼 수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자녀들을 이란 학교에 보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왜냐하면 교민의 대부분이 이민을 온 것이 아니고 단지 돈을 벌어서 언제인가는 고국으로 돌아갈 계획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한국학교 에서 자녀 교육을 시켜야할 필요성이 있었다. 대사관이 이런 문제에 대하여 당연히 관심을 가져야 하지만 교민자녀의 교육업무를 담당할 직원도 없었고 다른 직원들은 아예 신경을 쓸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교민들의 실제적인 구심체인 교회가 발 벗고 나서야할 입장이 되어서 교회를 중심으로 '테헤란 한국인학교 설립 추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위원회에서는 학교를 설립하기 위해서는 실제적으로 해결해야할 일이 너무나 많아서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보아 공관직원으로 있는 내가 일을 추진해 주어야 한다며 나를 위원장으로 내세웠다. 나는 이 일이 내가 맡아야 할 의무는 아니지만 어려운 가운데 있는 우리교민들을 돕기 위한 봉사차원에서 그리고 교회가 중심이 되어 추진하는 일이다 보니 하나님의 뜻이 담긴 일이라고 생각되어 추진위원장을 수락하였다 먼저 학교 창립에 필수적인 문제를 조사하고 계획하여 일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다행히 교민 부인들과 공관직원 부인들 중에 8명이 교사자격증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서 무보수로 봉사하기로 하고 교과서는 본국의 문교부에 지원을 요청하여 받아오기로 하였으며, 교실은 교회가 예배를 보는 알메리안 교회의 부속학교 건물을 같이 이용하기로 하였다. 드디어 1975년 10월에 테헤란 한국인학교라는 명칭으로 1-4학년의 120명의 학생과 류 화 자, 엄 영자, 정 정애, 이 재선, 김 영신 등 8명의 교사들과 초대 학교장에 정 순경 장노, 초 대 이사장에 내가 선임되어 교민들의 박수를 받으며 감격스런 개교식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 안 지나 교민 수가 더욱 불어나면서 교인 수와 학생수가 늘게 되자 교회나 학 교를 운영할 전문요원이 절실하게 필요로 하게 되었다. 교회의 지도자들인 정 순경, 탁 대신, 이 정열, 김 기락, 김 봉섭, 윤 상현 정 원조 집사등 과 나는 대책회의를 갖고 한국에서 목사님을 청빙하여 교회를 담임할 목사와 학교장을 겸임 하는 방안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목사신분으로는 여행목적이 뚜렷한 근거가 없 는 한 한국에서 여권을 발급받을 수도 없었거니와 이란에 입국할 수도 없다보니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아울러 어느 목사를 청빙할 것인가도 나에게 전부 위임되었다. 나는 모교회인 남대문교회 배 명준 목사님에게 편지로 이란의 상황을 설명하고 사례비의 절반 정도는 선교차원으로 한국에서 지원할 수 있도록 해서 교회와 학교를 맡을 젊은 목사 를 추천해 줄 것을 요청한 결과 영동교회 부목사로 시무하던 강 동수 목사를 추천받게 되었 다. 편법이긴 하지만 목사를 이란의 남단 코람샤 항구의 부두공사로 진출한 신원개발의 직원으 로 이란에 입국할 수 있도록 개인적으로 부탁하여, 1976년 6월 초에 강 동수 목사가 테헤란 에 도착하게 되어 테헤란한인기독교회 담임목사 겸 테헤란한국인학교 교장으로 부임하게 되 었다. 조금이라도 귀찮은 일이나 문제가 될만한 일은 피해가는 것이 공관직원들의 속성인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혹시라도 대사의 반대가 있을지 몰라서 나는 이 사실을 대사에게 사후 보 고했다. 우리들에게 교회는 물론 학교 건물까지 사용할 수 있게 해준 Khashar Khadolin 알메리안 교회 목사님에게 감사하기는 했지만 교인 수와 학교가 커지다 보니 사용공간이 좁아 서로 불편해 져서 또 다시 장소를 찾아야할 입장에 놓여 고민하게 되었다. 그런데 1961년에 내가 미국 군사유학으로 Kentucky주의 Fort Knox에 가 있을 때 Louisville에서 주말마다 만나 같이 지나던 이승만 목사가 때 마침 북미 장로교총회 중동선교 담당으로 이란을 방문하여 15년 만에 우연하게 만나게 되어 나는 우리의 사정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승만 목사의 소개로 Poul Seto목사와 Kenneth Tomas목사를 알게 되었고 쉽게 미국 선교회가 사용하지 않고 있는 소련대사관에서 남쪽으로 15분 거리에 있는 Qavarr-ez-Saltanh St에 위치한 학교건물을 쉽게 얻어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비록 학교 건물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많이 낡았고 책상과 걸상은 부서진 것들이 많았 지만 우리가 단독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데 대하여 교민들은 너무 기뻐했다. 거의 모든 교민들이 각기 연장과 청소도구들을 들고 나와서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쓰면서 학교교실을 쓸고 닦는 청소하는 사람, 마루와 문짝 그리고 창문을 수리보수 하는 사람, 부서 진 책상과 의자를 고치는 사람 등 각자 할 수 있는 일을 자발적으로 찾아서 하였는데 돈을 한 푼도 받지 않고 하는 일이면서도 이렇게 신명나게 힘이 드는 줄을 모르고 몇 일간을 해 댔다. 아마 이 때처럼 우리 교민들이 합심되어 신이 나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 후 우리나라 문교부로부터 초등학교 학력인정과 정부지원금 8만 불도 받게 되었고 9대 의 통학버스를 운영하는 학교로 발전되기까지 학교장인 강 동수 목사의 노력과 이화여대 김 옥길 총장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정성스런 후원이 뒷받침되었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로 어려운 여건에서 학교를 창립할 당시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수수방 관하던 우리 대사관 외무부 직원들은 학교가 정상적인 운영이 된 1년 반 후인 77년 중순경 정부의 지원금을 받게 되자 학교의 운영권을 교회로부터 인수하고 이사장을 대사가 겸임하 도록 했던 일은 별로 유쾌하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계산이 아직 덜 끝났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감히 죽음의 고비마다 나를 살려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이 때처럼 교회 일에 열심을 내 본적이 없었다. 또한 나 나름대로는 우리 교민들을 위해 직접적으로 적은 힘이나 마 보태게 된 것을 지금까지도 보람을 느끼며 살아간다. 8. 인샬라 아랍어나 페르샤어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인샬라"(하느님의 뜻)라는 종교적으로 쓰이 는 이 단어는 참으로 편리한 단어인 것 같다. 즉 잘 되어도 "인샬라" 자기가 잘못해 놓고도 "인샬라" 이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편리함에 따라 사용하고 있었다. 한 예를 들면, 약속을 철썩 같이 해 놓고도 지키지 못하면 "인샬라" 이다. '나는 너와의 약 속을 지키려고 애썼지만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지키게 안 하셨으니 어찌하랴?' 아마도 잘 되었을 때보다도 잘 못되었을 경우 십중팔구는 "인샬라" 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관습에서도 우리들보다 여유롭게 살아가고 있었다.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기가 막히고 환장할 일이 아닐 수 없었지만, 이것이 중동에 위치한 이란(옛 페루샤)이었다. 이곳에서 살면서 보고 겪은 추억들을 다시 회상해 보기로 한다. 이란에 도착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 테헤란 시내의 남쪽 바자가 있는 가장 복잡한 거리에 서 교통사고가 일어난 것을 목격하였다. 나는 자동차를 주차시키고 바자 안으로 걸어들어 가려는 길이었기에 흥미롭게 구경할 수 있었다. 그들은 그 복잡한 거리의 복판에서 2대의 사고차량을 치울 생각조차 하지 않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너는 마누라가 몇 명이냐? 나는 셋이다. 너는? 나는 다섯이다. 그럼 너는 부 자구나?"라는 담소를 나누면서 경찰관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피차간에 오늘의 교통사고 를 "인샬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마침내 순경이 도착하였다. 그러나 교통사고는 처리되지 못했다. 또 한 시간을 기다려 경찰장교가 도착하여 비로소 처리되었다. 순경은 글을 쓸 줄 몰랐던 것이다. 이란의 사막을 통과해 보기 위해 테헤란 동북부 Afgahanistan국경 인접도시인 Mashad(테 헤란에서 910km)로 자동차 여행을 떠났다. 이란의 사막은 모래만의 사막이 아니라 흙이 섞 인 사막이었고 한없이 광활했다. 사막 복판으로 곧게 뻗은 도로 위로 200km의 속도로 질주 해 보았으나 끄덕 없었다. 나는 도중에 차를 정차시키고 사막을 찍기 위해 카메라 셔터를 눌러 댔다. 그런데 이게 왼 일인가? 지나가는 모든 차량들이 내 차가 정차해 있는 곳으로 몰려들어 차를 이리저리 들여 다보는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너 괜찮으냐?"(쇼마 고막쾌?)라고 물어 보고 다시 지나가는 데 신기한 것은 그냥 지나치는 차가 단 한 대도 없어 오히려 귀찮을 지경이었다. 알고 보니 사막을 통과할 때 나무가 있는 곳 즉, 물이 있는 곳이 아니면 고장 난 차가 아 닌 이상 정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내 차를 고장 난 차로 알고 지나는 차마다 정차 하였던 것이다. 또한 사막에서 고장 난 차를 보고도 그냥 지나가는 것은 종교적으로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고장 난 차를 고처 줄 능력이 없으면서도 일단은 정차하여 살펴 야 하는 것이 면죄부를 얻는 행위였다. 또 마침 이 여행기간이 라마단(금식기간)이라는 것을 알기는 했으나 대수롭게 생각지 않고 먹을 것을 준비하지 않았다가 우리 식구들은 고스란히 굶어야 했고 여관의 잠자리도 구하지 못해 자동차에서 자야만 했다. 우리 집에는 많은 교민들이 왕래했지만 교회를 중심으로 가까운 분들의 부인들이 우리 집 에서 자주 있는 외교파티인 만찬이나 리셉숀의 음식준비를 위해 많이 도와주었다. 또한 생 활여건이 열악한 오지에서 고생하는 고 영훈 박사와 주기선 박사가 테헤란에 오면 우리 집 에서 술잔을 나누곤 하였다. 한번은 강 동수 목사와 같이 고 박사가 있는 오지를 방문하였을 때, 고 박사 내외가 양 한 마리를 통째로 잡아 이란 식으로 대접받았다, 한편 이란의 유목민들의 실 생활상을 직접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는데 그들은 일정한 주거지가 없이 양을 몰고 다니다가 잘 때 추우면 양을 껴안고 자기 때문에 피부병이 많이 발생한다고 했다. 또 한편 문맹을 퇴치 하기 위하여 정부가 학교와 주택을 지어주고 공무원들이 유목민들을 찾아다니며 공부해야 할 적령기의 아동들을 학교에 보내라고 계몽하면 유목민들이 공무원들을 양치는 막대기로 때려 쫓아버린다고 이야기를 들었다. 외국생활에 있어서 아이들의 교육문제는 중요한 문제 거리의 하나이다. 아이들 넷을 모두 정규학교에서 영어로 교육시키고자 하였으나 테헤란에 있는 American Community School 은 학비가 너무나 비싸서 감당할 수가 없어 우선 사내들인 정민이와 상학이만 입학시키고 효숙이와 진숙이는 어학(영어)학교에 입학시켰다. 6개월이 지나자 아이들 넷 모두가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해졌다. 특히 큰딸 효숙이는 어학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어 6개월만에 상당 한 수준의 영어를 구사했다. 더 이상 언어학교에 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외교관 자녀의 신분으로 테헤란 국립대학 교의 화시(페르샤어)어학과의 입학을 시도했더니 국비보조와 장학금까지 보태져 거의 부담이 안 될 정도의 저렴한 학비로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큰딸은 6개월만에 거짓말처럼 화 시로 의사소통을 잘 할 뿐만이 아니라 라면을 부스러트려 놓은 것과 같은 글을 읽기와 쓰기 까지 잘하였다. 1년 후 둘째 딸 진숙이도 테헤란 국립대학교 화시어학과에 입학시킴으로서 아이들 교육문제를 전부 만족스럽게 해결하였다. 정민이와 상학이도 American school 중고등부에서 잘 적응하고 한국에서 미리 태권도 유 단증을 따가지고 온 것을 이용하여 학생들을 가르치며 여러 나라 아이들과 같이 어울리며 활기 있게 잘 자라 주었다. 두 딸들은 대학의 수업이 끝나면 곧바로 대사관의 내 사무실로 와서 타자를 치는 등 모든 행정정리를 맡아 처리해 줌으로서 나는 잡무에 시달리지 않고 시간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부임한지 1년 반이 되었을 무렵, 우리는 가끔 큰딸 효숙이를 리셉숀 파티에 데리고 나갔다. 외교관례상 18세 이상인 딸의 동반이 허용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내가 아내 곁에 서서 통역으로 소비하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하여 아내의 통역을 담당시키기 위해서 이기도 했다. 영어와 페르샤어를 꽤나 잘 하는 큰딸은 테헤란의 국제사교계에서 대단한 인기를 얻기 시 작했다. 특히 이란의 고위층 인사들은 큰딸의 페르샤어의 구사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무척이나 좋아하게 된 것은 예상치 못한 성과였다. 우리 가족들은 별 어려움 없이 이국인 이란에서의 생활에 잘 적응해서 오히려 국내에 있을 때보다도 전 가족이 더 활기차게 생활해 나갔다. 종종 한국에서 우리나라 운동선수단이 테헤란에서 개최되는 국제시합에 참가하였다. 시합 결과가 아주 좋았을 경우는 대사관저에서 밥이라도 먹이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어린 운동선 수들은 찬밥신세로 이국 땅에서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우리 가족과 몇몇 교민들은 시합을 해서 패하고 어깨가 축 느려져 시름에 빠져 있는 이들 을 우리 집으로 불러 고기와 과일 밥을 실컷 먹게 해 주고 오락프로로 한국의 노래를 불러 패배한 울분을 풀어버릴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1976년도 신승기업 사장인 김 시중 씨가 인솔하고 온 레슬링 팀이 완패를 하자 대사관에서 는 오히려 창피하다는 태도여서 레슬링 팀은 몸 둘 바를 몰라했다. 우리는 이들을 집으로 초청하여 위로하고 즐겁고 풍성한 파티를 열어주었다. 감동한 김 사장은 귀국하자마자 외교 하는데 선물로 사용하라며 한국의 자수병풍과 자개꽃병을 항공편으로 보내주었다. 약 3-4개월 후 김 사장이 구라파로 사업차 출장을 가면서 일부러 테헤란에 다시 들려 우리 부부의 구라파 여행 항공권을 오픈으로 구입하여 주면서 가능하면 2주 후 그리스 아테네서 만나자고 하였다. 나는 처음에 지나친 김 사장의 호의에 혹시나 무슨 청탁이 있지 않나 의 심을 하였으나 나중에 오히려 순수한 호의에 대한 의심을 한 것이 미안했다. 나는 2주간의 구라파 휴가를 상신하여 승인을 받고 약속된 일자에 아테네에서 김 사장과 만남은 물론 당시 그리스 대사로 있던 채 명신 장군을 만나서 3일간 즐겁게 지내고 구라파 여행을 시작하여 그리스, 이태리, 불란서, 영국, 터키를 처음으로 관광하게 되었다. 후일 김 사장은 내가 장군으로 승진되었을 때, 우리 집을 방문하여 장군이 되었으니 승용 차가 필요할 것이라면서 자동차 1대 값인 300만원을 내놓고 갔다. 나는 고마워서 우리가 사 용하려고 이사 짐에 넣어 가져온 페르샨 카펫 1매를 그에게 선물함으로서 감사의 뜻을 표하 고 조금이라도 마음의 부담을 덜었다. 어느 여름 날 테헤란으로부터 약 200km이상 떨어진 카스피안 해의 Bandar-Shar 해수욕장 에 4박5일간 휴양을 하러 갔었다. 카스피안 해는 사실상 호수이나 크기가 하도 커서 바다로 불리어지고 있으며 민물과 짠물 의 중간쯤의 염도이고 여기서 잡히는 철갑상어 알은 세계최고의 식품중 하나이어서 희귀한 향으로 미식가의 미각을 자극하는데 생김새는 한국의 도루묵어의 알과 형태와 색깔이 비슷 하다. 외교관들의 파티에서도 이란의 캬비야(철갑상어 알)가 나오면 다른 음식을 제치고 최 고로 잘 차린 음식상으로 인정할 정도였다. 그 당시 캬비야 100g에 미국 달러로 100불정도 로 금값이었고 정부의 전매품이었다. 천혜의 해수욕장으로 알려진Bandar-Shar 해수욕장은 걸어서 200m를 들어 갈 수 있는 곳 이여서 안전하며 기온이 좋아 이란 최상의 휴양지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얼굴과 체격 피부색이 우리와 꼭 닮은 사람들을 만났다. 신기해서 따라가 보았더니 그들도 벼농사를 짓고 여자는 아이를 우리와 같이 뒤로 업고 머리에 광주리를 이 고 다녔다. 그들이 사는 마을로 찾아가 집안을 들여다보았더니 집은 옛날 우리의 초가집이 고 싸리나무 울타리에 마루가 있고 맷돌과 키가 있었다. 마치 조선시대 우리민족의 삶을 보 는 듯 했다. 얼마 후, 온 마을 사람들이 몰려나와 오히려 구경하러 온 우리를 구경하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살고 있었다. 아마도 그들은 '자기들과 꼭 같이 닮은 사람이 어 떻게 Benz 승용차를 타고 왔을까?' 하는 눈치였다. 그들은 진기스칸이 옛 페르샤를 침공했 을 때, 페루샤 땅에서 가장 살기 좋은 이곳에 정착한 진기스칸의 후예들이라 한다. 지금도 이란에서는 어린아이가 보채면서 울어대면 우리처럼 '호랑이가 온다.'고 하지를 않고 '진기스 칸이 온다.'고 한다. 진기스칸이 얼마나 무서웠으면 그랬을까? 1976년 초겨울의 어느 토요일 오전, 시내에 나왔다가 승용차 위에 Ski를 매달고 지나가는 것을 보고 스키장이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가보지를 못했기 때문에 무작정 뒤따라갔다. 테 헤란 북동쪽으로 Shmshek계곡을 꼬불꼬불 통과하여 약3시간 후에 스키장의 정상에 도착하 였다. 알고 보니 이 스키장은 이란에서 유명한 Damaband산의 산록에 만들어진 Dizan스키장이었 다. Damaband산은 천년설의 산으로서 정상의 설경은 장관이었다. 또한 까마득하게 내려다 보이는 밑에는 호텔을 비롯한 많은 건물들이 보였다. 약 8km의 긴 스키스러프를 위시하여 많은 스러프로 형성된 스키장을 생전 처음으로 구경하는 우리들은 호기심이 일어 일단 스키 리프트를 타고 밑으로 내려가 보기로 했다. 그런데 리프트가 오픈 된 의자였고 우리들의 복장은 스키장에 오는 차림이 아니었다. 그 좋던 날씨가 갑자기 흐리더니 눈발이 휘날리고 공교롭게도 리프트는 정전으로 내려가는 도 중에 정지되어 하늘에 매달려 흔들거렸다. 우리 모두다 장갑조차 끼지 않았으니 완전히 죽 다 살아났다. 그 다음부터 우리는 스키복장을 단단히 하고 삼부자가 2년 동안 주말마다 스 키를 무척 즐겨 두 아들은 스키를 무척 잘 탄다. 나는 오른 발의 아킬레스가 늘어져 결국 끊어져서 수술을 받고 말았다. 역시 76년의 한 겨울 눈이 무척이나 많이 오는 날 새벽 4시경 아내가 걱정스런 얼굴로 나 를 깨워 일어나 보니 현관문 입구 탁자에 놓아두는 자동차 키가 없어졌고 막내인 상학이가 없는 것으로 보아 차를 몰고 나간 것이 틀림없었다. 하필이면 이렇게 눈이 많이 내려 노련한 운전자도 운전하기 어려운 상황에 16살밖에 안된 녀석이 차를 몰고 나갔으니 무척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깜깜한 밤에 찾으러 나설 수도 없 는 일이어서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도했다. 아침 6시반경 어둠이 걷혀가기 시작하여 나가서 찾아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나가려는데 밖 에서 자동차 소리가 나는 것이 아닌가? 뛰어나가 보니 어디에 부딪쳤는지 자동차 앞이 찌그 러졌고 라디에이터는 터져 물이 다 새 나가 엔진이 과열된 상태로 차를 집까지 몰고 온 것 이었다. 한 눈에 살펴보아도 사람이 다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 녀석이 다쳤으면 어찌하나 하는 마음 조렸던 걱정이 사라지자, 무사하여 다행하다는 마 음속의 기쁨은 순간적일 뿐 노기로 표출시키고 말았다. 나는 허리띠를 풀러 몇 대 때렸다. 나는 그 때 아버지로서 자식을 걱정하고 사랑하는 속마음을 왜 사실대로 들어내지 못하였 을 까? 요즈음의 아버지들처럼 자식들을 사랑하는 표현방법을 몰랐던 것이 몹시도 후회스러 움을 숨길 수가 없으며, 나의 자식들에게 미안한 감을 지울 수가 없다. 나의 막내 동생인 성수는 중앙대학 연극영화과를 나와서 그쪽 방면으로 나갔어야할 인물이 었는데 어머니의 극단적인 반대로 자기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영업을 하는 처지가 되어버 렸는데 그 업마저 신통치 않아 친척의 도움으로 사우디의 건설현장에 나가 있었다. 나는 동생이 근무하는 사우디 건설 현장을 방문하여 상황을 들러 보고 고생이 너무 심하다 는 것을 알고 동생을 이란으로 데려와 이란공군에 취업시켰다. 그리고 한국에 있는 제수와 두 조카 진영과 창우를 이란으로 오게 해서 한 가족이 모여 살게 했다. 그러나 이 시점에 나의 임기만료로 귀국하게 되어, 객지에서 생활이 정착되는 것을 돌보아 주지 못하고 떠나 온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러나 두 조카들이 다 미국에서 학위를 받고 건실하게 성장하여 지금은 미국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을 볼 때 내 마음은 흐뭇하기 한이 없으며, 특별히 어려운 여건에서 오로지 가족과 남편에 헌신한 제수씨의 부덕에 대한 존경하는 마음을 잊을 수가 없다. 1976년 가을 맡딸 효숙이는 테헤란 한국인기독교회에서 우리대사관 직원과 교민 그리고 외 교관들의 축하 속에서, 말 그대로 국제결혼식을 치렀다. 사위가 되는 이와다 히로시(岩佃 博)는 그 당시 일본과 이란이 합작으로 만든 세계최대의 석유종합공장인 I.J.P.C(Iran Japan Petrolium Cooperation)라는 사업의 장기근무요원으로 일본 미쯔이(三?)회사 이란지점의 사 원(화학 전공)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회사에서 테헤란대학에 입학시켜 페르샤어 어학공부를 시키는 과정에서 효숙이와 만나게 된 것이다. 우리부부는 일본에 대한 선입견으로 결혼을 반대하였지만 둘이서 결사적으로 결혼을 원하 여 부모의 입장에서는 내키지 않는 결혼을 승낙하고 말았다. 나는 장남인 정민이를 미국에 보내 공부시켜 볼까하는 생각으로 먼저 구라파를 돌아보고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탐색해 오라고 배낭여행으로 혼자 내 보냈다. 물론 영어로 언어 소통은 할 수 있는 상태였으나 17세의 어린 나이라 만일 아주 어려운 사 정이 생기면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각 국 주재 우리 무관에게 내 개인 명의의 서신을 써 주어 휴대시켰으나 다행히 편지를 사용할 일은 생기지 않았다. 정민이는 혼자 배낭여행을 하면서 돈을 아끼느라고 그 나라의 특산품을 사서 다음에 입국 하는 나라에서 좌판을 벌려 판매하고, 공항에서 잠을 자며, 네덜란드에서 미국으로 건너가는 비행기는 $100짜리 화물운송 비행기를 타고 가는 등 꽤나 고생하면서 지구를 일주하고 이 란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또 한편 내가 구라파를 돌아본 후 다른 아이들에게도 필히 구라파를 보여주어 이 세상을 더 넓게 볼 수 있는 시야를 키워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귀국 항공권에 추가하여 구라파를 경우 한국으로 귀국할 수 있도록 계획하여 신혼여행으로 구라파 여행을 한 효숙이를 제외한 진숙이와 정민이 상학이를 같이 출발시켰다. 그 당시 19세도 안 된 한국 아이들이 구라파 배낭여행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을 때였다. 당초에 목적했던 대로 무관생활은 아이들에게 일찍 바깥세상을 구경시키고 공부시킬 수 있 는 기회가 되어, 자신감과 독립심을 갖고 살 수 있도록 키울 수가 있었다. 이 모두가 "인샬라"였기에 나는 지금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다. 제5부: 영광의 별을 달고 1. 마침내 장군으로 1977년 10월 중순, 만3년의 무관임기를 끝마치고 귀국하고 보니 들려오는 이야기는 온통 장군진급에 관한 것이었다. 진급 대상자인 내가 태평스러운 것을 보고 오히려 나와 가까운 주변의 군 친지들은 "보직을 어떻게 받을 것이냐?" "누구누구를 찾아뵈었는가?" 등등 걱정을 많이 해주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무관으로 나갈 때 사실상 진급을 포기했고 대령 계급정년 의 마지막해인 7년 차이고보니 희망을 가질 수도 없었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그 때까지 4년 제 육사출신 중에서도 다른 병과에서는 장군 진급자가 이미 많이 나왔지만 기갑 병과에서는 아직 한 사람의 장군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육사출신이 아닌 나 같은 일반장교에게 진급 이 할당되기란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귀국인사를 드리러 육군참모총장 L 장군을 찾아갔을 때, 총장은 나에게 "지금 육군본부에 전력증강연구위원회가 가동되고 있는데 그곳에 가서 일을 좀 해주어야겠다. 그리고 2주 후 육군본부 전체참모회의에서 무관 귀국보고를 하도록 하라" 라고 했다. 사실 대령이 육군본부 수뇌부 장군들이 참석하는 전체참모회의에서 무관 귀국보고를 하는 일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총장은 나를 육군의 수뇌부 장군들에게 자연스럽게 소개할 기회 를 주는 셈이었다. 그러나 나는 보직이 진급에 거의 절대적인 영향을 미칠 판에 하필이면 임시로 조직 편성된 전력증강연구위원회 요원이란 말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런데 다음 날 기갑병과의 S 장군과의 만난 자리에서 '아마도 전력증강연구위원회 요원으 로 보직을 받을 것 같다'라고 했더니 의외로 '그러면 됐다'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무슨 이 야기인가 했더니 전력증강연구위원회는 육군의 엘리트들을 모아놓은 곳이라 진급 할당 자체 가 없기 때문에 진급에 유리할 수도 있고 불리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S 장군은 나 에 대한 여론이 좋은 상태이니 일단 유리하다고 생각하고 남은 기간 최선을 다 해보라는 것 이었다. 그 때서야 나는 다시 한번 총장의 사려 깊은 배려에 대해서 감사하게 생각하지 않 을 수 없었다. 그 동안 3년 간을 외국에 나가 있다보니 그만큼 국내 사정에 어두워서 나에게 좋은 기회를 주었는데도 그것을 모르고 잘못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2개월밖에 남지 않은 짧은 기간에 최선을 다 해 볼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오로지 무관 귀국보고를 잘 하는 것뿐 이었다. 나는 막대한 석유자원으로 수입된 오일 달러로 옛 페르샤 왕국의 영광을 되찾기 위하여 주 력하는 이란의 전력증강을 중심으로 이란군의 무기도입의 다변화 정책, 이란군의 보안조치 방법 그리고 월남의 패망으로 한국 피난민이 이란에 유입된 상황에서 우리의 인력을 이란 공군의 기술인력으로 보충시킨 실적과 한국 군수물자의 판매실적 등 슬라이드를 작성하여 보고했다. 노력한 보람이 있어 나의 귀국보고는 육군본부의 참모들에게 큰 관심을 불러 일 으켜서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었다. 사실상 나에게 있어서 단 한번의 기회인 그 해의 장군진급심사는 내가 군인으로서 최고의 영예인 장군으로 진급해서 군 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이냐 아니면 즉시 군복을 벗고 27 년간의 군 생활을 마감해야 하는 것인지를 결정하는 갈림길이었다. 일단 포기하였던 장군진 급에 다시 희망을 걸고 보니 태평스러웠던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해지기 시작하였다. 나의 군사경력으로는 6.25전쟁기간에 총알받이 소모품 소위로 임관해서 그 이후 27년여 동 안 전투병과 장교로 필요한 모든 보직을 골고루 거쳐서 나 스스로 장군심사기준에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이루어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내가 답답한 마음에서 "우리는 전연 희망이 없는 건가요?" 라고 나에게 물었을 때 나는 짐짓 퉁명스럽게 "아니? 우리는 무관을 나갈 때 이미 진급은 완전히 포기한 것 아니오? 이 제 와서 그것까지 바란다는 것은 욕심이 지나친 것 아니오" 라고 전혀 마음에도 없는 대꾸 를 했다. 드디어 12월 중순 일곱 명의 장군심사위원들의 명단이 나왔을 때 나는 다시 희망이 사라지 는 것 같았다. 불행히도 일곱 명중에 나와 인연이 있었던 위원은 한 사람도 없었던 까닭이 었다. 나는 다시 한번 무관을 지원했을 때 장군진급을 포기했던 결단을 되새기면서 진급이 안 되 어도 절대로 후회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한결 평온해져서 태연해 질 수 가 있었다. 그러나 심사가 진행되는 동안 다시 조바심이 생겨서 빨리 양단 간에 결판이 났 으면 속이 후련할 것 같았다. 심사가 시작되고 1주일 정도 지난 어느 날 새벽 1시경 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 아직 잠에 서 덜 깬 목소리로 수화기를 들었더니 S 장군의 목소리였다. "한 장군! 축하해요" 나는 정신이 버쩍 들어 "네? 제가 진급됐습니까?" 라고 되물었다. "잘 자요 한 장군! 내일 만납시다." "네! 감사합니다." 꿈을 꾼 것도 같아서 전화기를 내려놓고 한참동안 넋이 나간 사람처럼 아무 말도 못했다. 아내가 나에게 "진급됐대요?" 하고 물었을 때야 정신이 좀 나서 "그런가 봐"라고 대답했다. 다시 자리에 누서 아내의 손을 꼭 잡고 생각에 잠겼다. 아이들의 교육을 위하여 무관을 택할 것인가 장군진급을 위하여 무관을 포기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했던 결단이 헛되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날 이후 장군으로서 대령 때와 달라진 36개 조항의 대우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장군 진급이 오직 국가가 나에게 막중한 사명을 맡긴 것이지 장군이 되었다고 해서 인격 그 자체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되새김하였다. 1978년 1월 1일 이른 아침 국방부에서 있었던 장군 진급신고식을 마치고 만난 아내는 나 를 처다 보면서 "당신이 정말 장군이 되었네요." 라고 했다. 귀가하자 나를 기다리고 있던 어머니는 "우리 장군 오시네." 라는 말로 기쁨을 표현했다. 온 가족들이 내 어깨에 붙은 별 을 손으로 만져보면서 기뻐들 했다. 그날은 우리들 생애에 최고의 날이었다. 2. 지휘관 1978년 1월 26일 오전에 군단장 및 인접 사단장, 가족과 친척, 군 친지 그리고 학교동창 들과 친구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1기갑여단장 취임식이 거행되었다. 취 임 사 존경하는 군단장님, 사단장님, 내외귀빈, 그리고 친애하는 제 1기갑여단 장병 여러분! 오늘 본인이 명에 의하여 명예와 전통에 빛나는 제 1기갑여단의 지휘권을 인수하게 된 것을 더 없는 영광으로 생각하는 동시에 그 책임의 막중함을 새삼 통감하는 바입니다. 전임 여단장이신 이00 장군께서는 그 동안 당 여단을 막강한 전투부대로 육성하고 특히 부 대 이동에 따르는 부대정비에 온갖 심혈을 기울여오신 바 이 장군의 업적과 노고에 경의를 표하며 그 업적이 길이 빛날 것으로 확신합니다. 우리가 다 잘 알고 있는 것과 같이 "내 나라는 내가 지켜야한다"는 자주국방체제의 구축을 위하여, 금년도 우리 육군은 시한부 독자적 지상전투태세완비라는 지상과제(至上課題)를 달 성하고자 하는 이 시점에, 무력통일의 목표에 따라 전쟁준비를 이미 완료한 북괴는 언제든 지 전쟁을 일으킬 위험성을 증대시키고 있는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상황아래 전 전선에서도 수도 서울에 이르는 가장 중요한 접근로요, 그 때문에 지 난 6.25당시도 그러했거니와 장차 북괴가 도전해 올 때도 북괴는 예외 없이 기갑부대를 주 축으로 한 주공(主攻)을 지향할 것으로 예상되는 5군단지역에서 본인이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된 것을 본인은 조국이 내리는 엄숙한 소명으로 알고 출진(出陣)을 앞둔 장수의 결의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장병 여러분! 우리는 어떠한 형태의 북괴도발에도 싸워 이겨야하며, 이길 수 있다는 필승의 신념을 가지 는 기갑여단이 되어야하겠습니다. 싸워서 이기기 위해서는 여단장 나 자신부터 개개 병사에 이르기까지 맞먹는 적 기갑부대 보다 항시 우월한 상태로 기갑의 특징인 공격정신을 바탕으로 잘 훈련되어 유사시 죽음을 무릅쓰고 책임을 완수하는 숭고한 애국애족의 군인정신을 발휘하여 맡은 바 소임을 다하는 데 온갖 정성과 노력을 경주해 줄 것을 강력히 촉구하는 바입니다. 오늘 당 여단의 지휘권을 인수하는 이 엄숙한 자리를 통하여 본인은 앞으로 소신과 신념을 가지고 힘이 다할 때까지 상사의 의도를 충실히 받들어 맡겨진 소임을 다할 각오이며, 아울 러 이 시간부터 본인의 부하가 된 여단장병 여러분들을 제 친 자식과 같이 돌볼 것을 약속 합니다. 끝으로 군단장님의 각별하고 아낌없는 지도편달을 바라면서, 공사다망하심에도 왕림해주신 내외귀빈 여러분의 성원에 재삼 감사드리며 취임사에 가름하고 저 합니다. 감사합니다! 1978년 1월 26일 제1기갑여단장 준장 한 인 수 1978년도 그 당시 한국군에 2개밖에 없었던 기갑여단의 편성은 4개 전차대대, 1개 기계화 보병대대, 1개자주화 포병대대 및 군수지원 대대로 편성된 막강한 전투기동부대로서 1개 기 갑여단은 서부전선 접근로를 우리여단은 중부전선인 철의 삼각지대의 적기갑부대접근로를 담당하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고 있었다. 나는 제 1기갑여단장으로 부임하기 전에 '과연 나는 어떤 유형(Style)의 장군이 되어야 할 까?' 하는 것과 내가 부임할 부대에 대한 지휘통솔을 위한 기본 구상에 깊이 잠기게 되었다. 나는 군인으로서 필사즉생(必死則生) 필생즉사(必生則死)의 사생관으로 명예로운 죽음은 있 어도 수치스러운 삶이란 있을 수 없다는 신념을 가지며, 아울러 문무(文武)를 겸한 정의로운 장군상(將軍像)으로 인정받을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을 품었다. 내가 부임할 부대에 대한 지휘통솔을 위한 기본구상 과정에서 먼저 부대의 실태를 파악하 고 보니 예상했던 대로 이미 지휘권이 마비되고 훈련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나는 최단시간 내에 부대의 생명인 지휘권을 확립하고 전투부대의 기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철저한 훈 련을 실시하여 전투태세를 완비하는 조치를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부임하여 1주일만에 작전계획상의 여단임무와 예하 부대의 상태 파악을 마치고 두 번 째로 열리는 전체 지휘관(중대장 이상 지휘관) 및 참모회의에서 우리여단의 목표를 확실히 설정하고, 나의 지휘방침을 제시하여 명확한 지휘지침 하에 부대를 지휘하기 위한 여단장 지시 제 1호로 다음과 같은 여단목표 및 지휘방침을 하달하였다. 여단장 지시 제 1호 제목: 여단목표 및 지휘방침 수신: 전 장병 1. 여단목표 적 기갑부대와 싸워 이기는 기갑여단으로 육성 2. 지휘방침 가. 완벽한 전투태세 준비 나. 철저한 교육훈련 실시 * 군대의 본질적 존재의의는 전투에 있다. 더욱이 전투장에 직접 투입되는 전투기동부 대인 기갑부대는 이점에 있어서 그 성격이 뚜렷하여야 한다. * 따라서 제 1기갑여단은 만사를 모두 전투에 그 기본을 두어야한다. * 전투 장에서 적 기갑부대와 싸우면 이겨야하며, 이길 수 있다는 필승의 신념을 가져 야한다. * 필승의 신념은 모든 면에서 적보다 우월하다는 자신감에서 우러나온다. * 그 자신감은 오직 전투 장에서 흘리는 피와 바꿀 수 있는 땀의 결정체인 고도의 훈련 을 통하여 얻어 진다. * 그럼으로 전투에 기본을 둔 당 여단은 마땅히 완벽한 전투태세 준비와 철저한 교육훈 련으로, 적 기갑부대와 싸워 이길 수 있는 여단으로 육성하는데 중점을 두어, 여단목 표를 달성해야 한다. 나는 전체 참모회의에서 여단의 구호를 여단목표와 지휘방침과 일치되게 "충성" 을 "필승"으 로 바꾸었다. 나는 여단의 최고 지휘관으로서 목적의식과 신념을 분명히 하면서 모든 업무를 전투와 직 결되는 사항을 최우선으로 하여 처리하고 조치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또 한편 내 스스로 솔 선수범 함으로서 마비된 지휘권의 확립과 부조리 제거에 대한 의지를 밝혔다 "군대조직의 중심은 곧 그 부대의 지휘관임으로 지휘권을 침해해서도 안 되고 침해당하여 부대기능이 마비되어서는 안 된다. 지휘권의 침해현상은 지휘관과 부하의 부정한 관계로부 터 발생한다. 이 시간 이후, 이유 여하나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조그마한 부조리라도 용서할 수 없다. 그럼으로 부정한 생각을 버릴 수 없는 자가 있다면 처벌을 받기 전에 스스로 이 부대를 떠나라"고 엄명을 내렸다. 그 후, 실제로 그간 여단 내에서 일어났던 부조리를 하나하나 제거해 나가면서 한편으로는 부대의 효율적인 운영을 위하여 "모든 지휘관 및 참모들은 부대를 쓸데없이 피로하게 하지 말라, 만일 불필요 한 일로 부대를 피로하게 만든다면 전투력을 낭비케 하는 것이다. 따라서 꼭 해야 할 일은 반드시 하되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은 하지 말아야한다" 라고 지시하 였다. 한편 예하 지휘관과 참모들에게 최대한의 권한을 위임하여 소신 것 자기가 맡은 임무를 수 행할 수 있게 여건을 만들어 주기 위하여 잘못된 일에 대한 책임추궁보다는 과정과 원인을 더 중요하게 취급하겠다는 것을 밝혔다. 더불어 최선을 다 하고 모든 조치를 취한 이후에 발생한 잘못된 일은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1개월 후, 나는 여단의 작전임무 수행과 효과적인 교육훈련에 주력하기 위하여 참모장인 허순 대령에게 전투부대 중대장 이상의 인사권을 제외한 인사 및 군수업무의 전결권을 위임 하고 세부 지휘통솔을 위한 지침을 여단장 지시 제2호를 하달하였다. 여단장 지시 제2호 제목: 지휘지침 수신: 각급 지휘관 1.소신(所信) 있는 지휘를 하라 * 박력 있는 지휘를 하라 지휘관의 박력은 부대의 생명이다. * 지휘권을 확립하라 군대조직의 중심은 곧 그 부대의 지휘관이다. * 최대한의 권한부여 최소한의 규제를 하라 * 신상필벌의 지휘를 하라 2. 책임(責任) 있는 지휘를 하라 * 부대성패의 모든 책임은 지휘관에게 있으며, 이를 누구에게도 전가할 수는 없다. * 무능한 부대지휘로 부대를 퇴보하게 만든다면, 유능한 지휘관으로 과감히 선별 교체할 것이다. 3. 계획성(計劃性) 있는 지휘를 하라 * 중점적이고 우선순위를 결정 실질적(특히, 전투 및 훈련)으로 지휘하라. * 즉흥적이고 편중된 지휘는 금물이다. * 주기적이고 전반적인 부대기능을 살리는 지휘를 하라. 4. 공명정대(公明正大)한 지휘를 하라 * 군대의 명맥인 군기, 단결 및 사기 등은 공명정대한 지휘에서 비롯된다. * 공사를 엄격히 구분할 때 공명정대해 진다. * 만인의 상관 만인의 지휘관이 될 줄 알아야 한다. 5. 강력한 실천력(實踐力) 있는 지휘를 하라 * 군대조직은 무장을 갖춘 강력한 실천 집단이다. * 군대는 공리공론(空理空論)을 일삼아서는 안 된다. * 실천력이 왕성한 부대는 그 부대의 지휘관이 이미 부대지휘에 성공한 것을 뜻한다. 6. 지휘사각(指揮死角)에 대한 관심을 가져라 * 특히, 전술적 사각 및 행정적 사각을 구분 관찰하라 7. 솔선수범(率先垂範) 하라 * 군대조직에 있어서 상급 지휘관이나 상급자의 솔선수범 같이 설득력이 있는 방법은 없 다. * 용장 밑에 약졸(弱卒)이 있을 수 없으며, 청렴결백한(淸廉潔白)한 지휘관 밑에 부정한 부 하가 오래 머무를 수 없다. 8. 부하를 진심(眞心)으로 사랑하는 지휘관이 되라 * 귀관의 부하를 진심으로 사랑하였다면 귀관의 부하는 귀관을 위하여 목숨을 바칠 것이 다. 명확한 여단목표 및 지휘방침과 업무수행에 필요한 지휘지침을 하달하고 난 후, 부대는 정 상적인 기능으로 가동되기 시작하는 듯 보였다. 나는 6.25 전장에서 소대장, 중대장으로 전투를 하면서 지휘관이 진정으로 부하를 사랑할 때 부하들이 자기를 사랑하는 지휘관을 위하여 목숨을 바칠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 다. 부하사랑의 전제조건은 청렴이며, 청렴하지 않은 지휘관이 부하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것 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청렴하지 못한 지휘관이 부대의 지휘권을 확립하는 것을 보지 못 했으며 지휘권이 확립되지 않은 부대가 전투력을 발휘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여단장에 취임한 첫 날 관사에서 나는 아내에게 부대지휘와 관련해서 나의 생각을 설명하 면서 간곡하게 부탁했다. "지금 나는 장군이 되어 부대를 지휘하고 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설사 이 직위가 나 에게 마지막 직위가 될지라도 소신껏 지휘를 해 보고 싶소. 당신도 알다시피 현재 이 부대 는 부조리 때문에 부대의 기능이 마비될 정도요. 아무리 내가 깨끗한 것을 강조해도 언제 어디서 부정의 싹이 움틀지 모르는 상태이니 부정의 뿌리를 파내기 위해서 내 스스로 먼저 청렴한 지휘관 상을 보여야만 하겠소. 아마도 나는 당신에게 봉급과 개인수당이외에는 한 푼도 더 줄 수 있는 것이 없을 것 같소. 지휘관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항목으로 판공비와 기밀비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도 역시 공금이니 용도에 맞게 사용해야 할 것이오, 당신이 나 를 이해하고 도와주어야겠어." 라고 나의 뜻을 전하였다. 실제로 나는 만 2년 간의 여단장 임기 중, 아내에게 그 이상의 것을 준 것이 없었다. 그러 나 내가 아무리 청렴을 강조해도 그것은 명령과 지시만으로 지켜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살을 깎는 자기희생이 없이는 실천될 수가 없는 일이었다. 78년 5월 2일 나는 생일을 맞아, 부하 지휘관 및 참모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한 달 에 한번 주어지는 지휘관 외박일정에 맞추어 일부러 부대를 떠나 생일을 지나고 돌아왔다. 그런데 그 다음 주말에 관사로 들어온 아내가 주저주저 하면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 다. 아내가 없는 사이에 두 명의 장교 부인이 따로 따로 서울의 우리 사택을 다녀가면서 생일 선물로 금으로 만든 거북이를 놓고 갔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내에게 조용히 소문이 나지 않 게 돌려주라고 했다. 아내는 그 다음 주말에 서울서부터 케-익을 사들고 와서 선물한 장교 부인 집을 방문해서 금 거북이를 돌려주었다. 결국 그들이 쓸데없는 짓을 해서 우리 입장에 서는 비싼 케-익 2개 값만 더 든 셈이 되었다. 나는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심사숙고한 끝에 앞으로도 이런 일이 또 있을 것에 대비하여 여단 참모회의 석상에서 당사자들의 이름은 거명하지 않은 체, 이 사실을 공개하 기로 했다. 동시에 당사자는 3개월 이내에 우리 여단에서 스스로 떠나라고 지시하면서 다시 한번 비리를 척결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4월 초, 우리여단 하사관 5명이 군사령부 하사관진급담당자와 거래하여 부정하게 진급한 사실이 밝혀졌다. 나는 매관매직한다는 소문을 들어보기는 했지만 그런 일이 직접 내 부대 안에서 벌어진 것은 처음이었다. 과연 군대의 계급을 돈으로 살 수 있다면 생명이 요구될 수도 있는 상명하복 관계에 놓여 있는 전쟁터에서 군대의 명령이 먹혀들어 갈 것인가를 생각하니 참담한 마음이 들었다. 사실 나는 전쟁터에서 하사관들이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가를 몸소 체득해서 잘 알기 때문 에 하사관들의 권위와 권리를 존중하여 20년 이상 복무하고 전역하는 하사관이 있을 때마 다, 마치 미국 영화 White Xmas에서 나오는 백발의 하사관(버트랑 카스트 주연)이 전역식전 에서 사열을 받듯이 전역식을 거행하여 보람과 자부심을 느끼면서 군문을 떠날 수 있게 했 다. 또한 우리 여단 하사관 부부 중 7쌍이 아이들을 낳고 살면서도 결혼식을 못 올리고 살 고 있어서 모든 경비를 여단에서 마련하여 79년 5월 합동결혼식을 치러 주기도 했다. 그러나 군대에서 부정하고 불공정한 진급 및 상벌은 부대의 사기를 저하시켜 부대의 단결 을 해침은 물론 지휘권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나 큰 사안인 것이었다. 나는 5명의 하사관을 헌병대 영창에 집어넣고 즉각 여단 중징계위원회에 회부하여 여단장 의 직권으로 2등 병으로 강등시켰다. 그리고 여단 하기식에서 전 장병이 지켜보는 가운데 강등을 명하는 인사명령을 낭독하고 소북(小鼓)을 치면서 양팔에 붙어 있는 중사 또는 상사 의 계급장을 잡아떼고 2등병 계급장을 부착해 주었다. 아마도 그 당시 이런 강등 식을 거행 한 것은 육군창설 이래 우리 부대가 처음 이 아닌가 싶다. 이 사건 이후 일부에서는 '여단장이 너무 심하다'고 비난하는 소리도 들려왔지만 비리 척결 에 대한 나의 의지가 말만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서 여단 장병들이 크게 자극을 받아 부대는 서서히 정상적인 상태로 운영되어 나갔다. 나의 여단장 시절은 다소나마 돈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관 생활을 하면서 다소 저축하였던 비상금마저 다 써버릴 수밖에 없는 시기였는데 설상가상으로 금전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어느 날 아내로부터 옛 부하 김00 중령의 부인이 찾아와 돈을 빌려 달란다는 이야기를 들 었다. 김 중령은 내가 전차중대장이었을 때부터 오랜 동안 인연을 맺어 온 아끼던 부하였다. 내가 주 월남한국군사령부 비서실장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 그가 월남근무를 하고 싶다고 해 서 나로서는 애를 썼지만 본인의 신상관계로 명령이 나지 않아 데려오지 못한 것을 항상 미 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월남에서 귀국하고 보니 그는 벌써 전역 1개월을 앞두고 있는 상태였다. 나는 김 중령의 처지를 안타깝게 생각해서 신승기업 김 사장에게 부탁하여 취직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런 김 중령과 부인이 사업을 하다가 돈이 모자라 사업을 중단하고 있다며 두 달이면 갚 을 수가 있을 터인데 자기들은 더 이상 돈을 구할 수 없다고 아내에게 통사정을 해온 것이 다. 사정을 들어보니 딱하기도 하고 내가 조금만 도와주면 일어 설 수 있을 것 같아 아내에 게 될 수 있는 대로 도와주라고 했다. 도와주는 방법이라야 우리가 가진 돈은 없었기 때문 에 내 신용을 걸고 남에게서 돈을 빌려서 꾸어주는 것이었다. 3년을 국외에 나가 있다가 국내에 들어 온지 아직 6개월도 안 되었을 때라 우리는 국내사 정에 아직 어두웠던 때문에 김 중령과 부인의 말을 그대로 믿은 것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후에도 몇 번이나 돈이 모자라서 조금만 더 하는 식 으로 계속 돈을 꾸어달라는 것이었다. 불안 하기는 했지만 사업이 성공해야만 이미 꾸어준 돈을 받을 수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여기저기서 계속 돈을 빌려다 준 돈이 나중에는 1,000만원이 되었다. 당시 쌀 한 가마가 2만원 안팎을 하던 때에 1,000만원 이라는 돈은 나의 1년 분 봉급을 몽땅 합한 것보다 많은 엄청난 액수였다. 그런데 김 중령부인의 사업은 결국 실패하여 부도를 냈고 부도를 내기 직전 한국의 사업가 들이 통상 사용하는 수법으로 자기의 실속은 미리 빼돌렸다. 그러면서 아내에게서 빌려간 돈도 부도를 핑계로 지금까지 갚지 않는 것이었다. 그 덕분에 그는 기갑병과 내에서 "한 인 수 돈을 떼어먹은 놈'이라는 별명이 붙어 다녔지만 이 사건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아끼고 믿었던 부하에게 배신을 당한 첫 번째 쓰라린 경험이었다. 아내가 빌려다 준 돈은 우리의 신용으로 빌린 돈이니 우리의 체면상 갚지 않을 수 없어서 아내는 밍크 목도리를 비롯한 패물 등 현금화 할 수 있는 귀중품은 모조리 팔고서도 생활비 에서 조금씩 떼어 내어 빚을 갚아 가는 데 약 5년이나 걸렸다. 그 동안 아내가 겪은 심적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사병들의 복지를 위하여 사병들이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내무반의 악습부터 제거하기 로 하고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은 주번 근무자 이외의 영외거주 하사관 및 장교는 부대에 머물지 못하도록 하여 완전한 사병들의 자유시간을 보장해 주었다. "휴식은 내일의 전투력을 축적하는 것이고 축적된 전투력을 결정적인 목표달성에 집중시켜 야함으로 사병들의 휴식시간을 침해하지 말라" 라고 지시하였다. 여단본부 한가운데 있는 약300평이 넘는 창고건물을 개 보수하여 제일 먼서 40명이 동시 에 목욕할 수 있는 온수 목욕탕부터 시설해 주고 다음으로 PX, BAR, 당구장, 미니 골프장 및 기타 오락시설을 포함한 사병복지회관으로 만든 다음 장교 및 하사관 복지시설을 만들어 나갔다. 부임하고 6개월이 지날 무렵부터 부대환경과 긴급히 조치해야 할 시설에 대한 개 보수 및 조성에 손을 대기 시작하였다. 제일 먼저 전차호 주변의 위장을 위해 칡 나무와 상록수인 소나무를 이중으로 식수하도록 계획하고, 근본적으로 부족한 급수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미군부대가 주둔할 당시 사용하던 한탄강의 물을 양수하여 사용하던 방법을 복원시키는 대 공사를 완료하여 시급했던 급수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였다. 또한 미국식으로 되어 있던 여단 정문을 한국식 석축으로 개축하고 연병장에 5단으로 석축을 쌓아 스탠드를 만들었다. 환경의 조성과 공사 등을 효율성 있게 진행하는데는 기계공학에 일가견이 있는 참모장 허 순 대령의 식견과 추진력 그리고 참모들의 능동적인 활동이 크게 도움이 되었으며, 또한 더 근본적인 원동력은 임무수행을 즐겁게 할 수 있는 동기부여와 정당한 명령지시에 따른 신뢰 성에서 얻어지는 사기앙양에 있었다고 보고 싶다. 나는 예하 대대장과 참모들의 인화단결을 위하여 가끔 여단장 관사에서 고기를 굽고 운천 시내의 막국수를 시켜다 먹는 회식을 열었지만 임기 중 시내의 접대부가 있는 술집에서의 회식은 단 한번도 하지 않았다. 어느 날 나는 여단 장교 및 하사관 부부동반 파티를 각각 개최하도록 참모장에게 지시하였 다. 참모장은 "연구 해 보겠습니다."했지만 그의 표정에서는 크게 의아해 하는 것이 역력했 다. 한 마디로 지금까지 불합리한 지시를 내리지 않던 여단장이 '이 무슨 뚱딴지같은 지시를 내리나' 하는 표정이었다. 다음 날 참모장은 아무리 연구해도 200여명이 넘는 장교들을 대 상으로 파티에 사용할 예산이 없어서 불가능하다고 보고를 했다. 나는 그때서야 본부근무대장 윤 영진 소령(대령)을 불러 참모장과 합석시킨 자리에서 아직 부팻(Buffet)식 만찬이 소개되기 전이어서 생소할 때였기 때문에 파티를 열 수 있는 방법으 로 부팻식 방법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구체적인 시행방법으로 여단장의 판공비에서 각 대대에 5만원 식을 재료값으로 지 급할 터이니 각 대대의 장교 부인들이 40여명 분의 음식을 성의껏 만들어 오도록 하자는 것 이었다. 아울러 여단 본부에서는 소주에 기갑병과를 상징하는 노란색의 오랜지쥬스를 적절 한 비율로 혼합하여 설탕과 얼음을 넣어 칵테일을 만들어서 일명 기갑병과 술인 Armor Bunch를 만들어 여자들까지도 맛있게 마실 수 있으면서 약간의 취기가 오르는 음료를 준비 하도록 하였다. 또한 접시와 컵은 시내 그릇을 파는 가게에서 대여하며, 장소는 300명 이상 을 수용할 수 있는 사병구락부를 사용하면 될 것이라고 지침을 주었다. 물론 음악과 오락을 준비하도록 하고 특별히 총각 장교들을 위해 애인들을 참석시키는 것도 권장하였다. 7개 대대의 음식을 대대별로 진열해 놓고 보니 중복된 것도 있었지만 참으로 대단한 성찬 이었다. 나는 각 대대에서 준비된 음식 중 가장 잘 장만한 대대를 선정하여 포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처음으로 개최된 여단장 이하 말단 소대장까지 전 장교가 부부동반으로 한 자 리에서 같이 하는 파티는 지금까지 장교들이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장교의 품격에 맞는 멋 지고 풍성한 즐거운 파티로 성공하기에 충분하였다. 참모장은 아주 적은 예산으로 최대의 효과를 볼 수 있는 방법을 알고서야 "이런 방법도 있 습니다!" 라고 감탄을 했다. 그 후로도 이런 파티를 일년에 2-3회는 열어 사기를 진작하는 데 활용했으니 결국 나는 무관생활에서 배운 파티문화를 한국 군대에 도입해서 효과를 톡톡 히 본 셈이었다 3. 무자비한 훈련 군대의 본질적 존재의 의의는 전투하여 승리하는데 있다. 승리를 얻기 위하여 전장에서 흘리는 피와 바꿀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실전과 같은 철저한 훈련을 실시하면서 흘리는 땀 뿐이다. 특별히 나는 6.25전중에 소, 중대장을 역임하면서 훈련되지 못한 병사들로 편성된 전투부 대를 지휘하면서 패배했던 비참함은 물론, 부하들의 목숨을 값없이 잃어야하는 참담한 고통 도 맛보았고 잘 훈련된 부대를 지휘하여 승리를 쟁취하면 온 세상을 다 얻은 것과 같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우리기갑여단은 전장에 직접 투입되는 전투기동부대이며, 적 기갑부대와 싸우면 반드시 이 겨야한다. 그럼으로 싸우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신념을 가져야하는데, 그 신념은 오로지 실전과 같은 무자비하고 철저한 훈련을 통해서만 얻어진다고 것을 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여단장으로 부임한지 2개월이 지났을 무렵 제105기계화보병대대를 순시하는 도중에 소대장 에게 "장갑차(APC)가 물에 뜨는가? 안 뜨는가?"하고 물어 보았다. 소대장은 '마치 이 무거운 것이 어떻게 뜨겠느냐?'는 듯이 자신 있게 "안 뜹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소 대장의 대답에 아연질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장갑차를 운용해야 할 소대장이 물에 뜰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는 장갑차가 물에 뜨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이런 기가 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그것은 그 소대장의 죄가 아니었다. 비록 그 소대장이 보병학교에서 장갑차가 물에 뜨는 것이라고 배웠어도 한 번도 도강훈련을 해 보지 않았으니 스스로 믿어지지가 않았던 것인 상 싶다. 얼마나 오랜 동안 실질적인 훈련을 하지 않았기에 이러한 현상이 도출되는 것인가, 한 마디로 한심스러운 훈련 상태를 입증해 주는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이 문제를 최대한으로 짧은 시간 안에 해결하기 위해서 대대의 전 장갑차를 산정호수 로 이동시켜 도강훈련을 실시하기로 했다. 사병들은 말할 것도 없이 장갑차를 타고 처음으 로 물 속으로 들어가 보는 대부분의 장교들도 '과연 이 장갑차가 물에 뜰 것인가?'하는 불안 한 표정이 역력했다. 처음 해보는 장교와 사병들이 초긴장 상태에서 마치 실전을 방불케 하 는 도강훈련을 마치고 나서야 비로소 자기들이 타고 있는 장갑차가 물에 뜬다는 것을 확인 했다. 기계화보병대대는 이렇게 한번 홍역을 치렀지만 다른 대대들의 훈련수준도 제일선에 배치 된 전투부대로서는 형편없이 미비해서 나는 먼저 교육훈련회의를 소집하여 각급 지휘관 및 참모들에게 자극을 주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훈시하고 지침을 하달하였다. "형식적인 부대훈련의 결과는 전쟁이 일어난 순간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버린다. 그러므로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귀관들이 여단장인 나를 속일 수는 있어도 김일성을 속일 수는 없을 것 이다. 또한 승리의 필수요건인 진정한 군인의 사기는 실전과 같은 무자비한 훈련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으로서 전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존의 자신감과 부여받은 임무를 완수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부대훈련은 실전과 같이 실시해야하며 훈 련의 강도는 혹독하게 훈련을 시키는 자기의 상관을 쏘아 죽이고 싶다고 할 정도로 훈련을 실시해야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나는 부대훈련을 실시하는 지침으로서 다음의 여섯 가지를 하달하였다. 첫째: 모든 훈련은 실질적이고 실전적으로 실시하라. 둘째: 자기부대는 자기가 자기의 방식으로 훈련시켜라. (중대장은 자기중대를 훈련시킨 다음 대대장이 자기의 예하 중대를 시험하고 그 후 통합 하여 대대훈련을 완성하는 방법으로 하면 여단장은 년 말 대대훈련이 완성된 보고를 받고 대대시험을 실시하겠다) 셋째: 부대훈련 시는 전 병력참가 및 전 장비동원 상태에서 실시하라. 넷째: 훈련 중 발생하는 안전사고는 태만으로 야기되지 않은 이상 지휘책임을 묻지 않겠 다. 따라서 과감한 훈련을 실시하라 다섯째: 장비의 고장 율 감소 보다 전투장에 투입되는 정비회복 율이 더욱 중요하다. (장비는 기계임으로 고장이 나게 마련이다) 여섯째: 자기부대를 훈련시킬 줄 모르는 무능한 지휘관은 과감히 도태시킬 것이다. 사실상 지금까지 여단 전 장병들의 훈련에 대한 개념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무방한 형식적 인 시간 때우기 일과에 불과했으며, 더욱이 시끄럽고 책임추궁이 심한 안전사고의 위험성이 높은 훈련은 가급적 회피하는 태도였던 것이 사실이었다. 여단장인 나의 강력한 부대훈련실 시에 대한 의지를 인식한 각급 지휘관들은 그 때부터 훈련에 주력하기 시작하였다. 막상 이제까지 실시하지 않던 부대 훈련을 실시하려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 니었다. 무엇보다도 전체 부대의 장비가 동원되고 기동하는 훈련을 실시하기 위해서는 추가 로 막대한 연료가 필요한데 이것을 어떻게 조달할 것이냐 하는 것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12월 초순에 부대훈련시험에 필요한 연료를 획득하기 위하여 참모장 허순 대령을 군사령부 로 출장을 보냈다. 결과는 상상외로 계획량 1,000드럼 보다 많은 1,200드럼을 획득할 수 있 었다. 이것은 우리의 훈련계획에 대하여 군사령부에서도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겠다는 의사 로 이해되어 마음놓고 훈련을 실시하게 되었다. 한편 나는 부대훈련시험을 위한 훈련지역으로 제5 및 6군단 전 지역을 사용하기로 하고, 군단장에게 훈련계획의 개요를 설명하고 재가를 얻어냈다. 대대장들에게 시험계획이 누설되지 않도록 작전보좌관인 박 호준 소령(대령)과 전속부관 박 윤성 중위(현재 호주의 시드니에 거주)만을 데리고 1개 대대의 훈련기간을 4박 5일 24시간 주야간 연속 상황으로 시험계획을 작성했다. 여단장의 지휘차량으로 샤프차의 내부를 개조 하여 준비하고, 여단에 1대 있는 OH-23 헬리콥터를 상시 사용할 수 있도록 대기시켰다. 나 는 대대훈련이 완성되어 대대시험을 받을 준비가 완료된 대대부터 보고하라고 하여 제일 먼 저 제 15전차 대대부터 본격적인 대대시험훈련을 실시하기로 하였다. 1일째 새벽 2시 훈련비상을 걸고, 전투 기본 휴대량의 실탄 10%를 적재하도록 하였으며 제105기계화보병대대의 제1중대를 제15전차대대에 배속시켰다. 그리고 작전계획상의 대대의 방어진지를 점령하도록 명령을 하달하였다. 이미 하달한 훈련지침에 따라서 전시 상황 그대로 전체 병력이 참가하고 전체 장비가 동원 되어야 하기 때문에 부대 안에는 트레일러 1대도 남겨 놓을 수 없었다. 물론 한사람의 병력 도 남을 수 없어 훈련기간 중에 막사관리는 본부 근무대에서 맡아주기로 하였다. 문자 그대 로 전투가 벌어져 갑자기 부대가 완전히 이동하는 상황이었다. 비상을 걸기 10분전에 나는 성판(星板)에 불을 밝힌 지프차와 지휘용 샤프차를 타고 이미 대대에 도착해서 출동준비태세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나는 거의 훈련부대와 같이 행동하면서 주간에는 주로 OH-23헬기를 타고 부대의 이동, 집 결, 진지점령상태 등을 공중에서 점검하고, 훈련부대의 전개되는 상황을 보아가면서 다음 명 령을 그때그때 무전을 통하여 단편명령으로 하달했다. 훈련기간 중에는 심지어 참모들의 결제도 훈련장의 샤프차에서 시간이 나는 대로 해 주는 정도였다. 훈련부대의 장병들은 여단장이 밀착해서 자기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있다 는 것을 알게 되자 긴장된 상태에서도 열심히 훈련에 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대가 기본 작전계획상의 방어진지를 점령하고 방어태세를 완료한 후 보통 때 같으면 아 침식사를 하고 습관적으로 용변을 보는 시간인 아침 7시를 기하여 작전계획상의 축차진지로 철수하라는 지연작전명령을 하달하였다. 통상적인 진지점령훈련을 할 때와 상황이 완전히 달라 져, 배식을 하다 말고 부대가 이동하게 되자 순식간에 배식장소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아침은 물론 점심식사를 할 시간도 없이 부대가 계속해서 이동하며 작전을 수행하였다. 전 차에서 하차할 시간조차 없다보니 소변도 빈깡통이나 헬멧에 받아 밖으로 내 버려야 하는 것은 물론 전체 부대병력이 완전히 굶게 되었다. 한참 젊은 병사들이 고된 훈련을 하면서 두 끼를 걸러서 24시간을 굶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배가 고파서 환장을 할 지경이 되었을 것 이다. 대대장은 출동준비시간을 단축시키기 위해서 미리 비상식량의 분배를 하지 않은 자기 의 잘못을 뼈아프게 반성하게 되었고, 대대장은 비로소 전쟁 중에는 밥 먹는 시간, 잠자는 시간, 용변을 보는 시간이 따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상황은 계속되어 명일 새벽 여명에 공격을 개시하기 위해서 저녁6시까지 포천 근처의 한 지역에 집결하도록 도식 명령을 하달하였다. 이번에 대대장은 집결지에서 비상식량부터 분 배하기 시작해서 그 날 처음으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일 아침의 공격준비와 또 언제 어떤 상황변화로 명령이 하달될지 몰라 긴장한 탓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한다. 2일째 아침 7시 공격이 개시되어 전차포 사격장을 통과시켜, 전술상황하에서 각종 표적에 대한 실탄사격을 실시케 하면서 전장에서 일어나는 각종 상황을 부여하였다. 한편 최근에 전입한 신병들을 전날 이 사격장에 배치하여 각자 개인호를 파고 들어가게 해 놓고, 실제 전차와 장갑차들이 실탄사격을 하면서 자기가 파 놓은 호 위를 지나가도록 하여, 실전과 같은 전장상황을 체험하도록 하였다. 연속적인 상황으로 전차들이 계속하여 기동하다 보니 공랭식인 전차의 엔진과 난방을 위한 전차 속의 히터가 과열되어 3대의전차에 화재가 발생하고, 논둑과 울퉁불퉁한 야지를 한없 이 기동하다보니 전차의 토숀바를 비롯한 각종 부품들이 파손되는 등 많은 전차들이 평상시 에 잘 나지 않던 고장을 일으켰다. 나는 평소에도 예방정비를 철저히 하여 고장 율이 적게 발생되도록 해야 함은 당연하지만 기계는 고장이 나게 마련인 것이기에 더욱 중요한 것은 고장 난 장비를 얼마나 신속하게 수리하여 전선에 투입할 수 있느냐 하는 그 부대의 정비능 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해왔다. 이번 훈련을 통하여 전술적인 상황에서 장비의 야전정비능력 과 견인 및 후송방법 등을 어떻게 처리하는가를 점검하면서 훈련시켰다. 목표를 점령하고 방어편성을 완료하였을 때는 이미 오후 3시가 넘어서 일몰까지는 2시간 가까이 남았다. 이 때 다시 단편명령으로 암중 라이트를 이용한 야간 행군으로 6군단 전방 지역으로 밤 12시까지 이동을 완료하라고 작전명령을 하달하였다. 전투차량 및 일반차량을 합하여 약 80여대가 넘는 대대의 첫 차량부터 시작해서 끝 차량이 통과하는데는 무려 1시간 20분이 걸렸다. 행군장경이 무려 5Km가 넘는 대열이 일체의 불빛 없이 산을 넘는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고 위험한 훈련이었다. 나는 대대가 몇 대의 일반차량을 제외한 모든 전투차량들이 밤12시 이전에 무사히 집결지 에 도착하였다는 무전 보고를 받고서야 겨우 안도의 숨을 내 쉬었다. 나는 훈련부대의 맨 후미를 뒤 따라 이동하면서 샤프차 속에서 눈을 잠시 부치곤 하였다. 새벽 6시에 현 집결지 로부터 10km전방에 위치한 대전차 장애물을 극복하라는 공격명령을 하달하였다. 3일째 날이 밝자 대대장이 공격작전을 위한 작전지역 정찰을 마치고 흥분한 상태에서 샤프 차로 나를 찾아 왔다. "여단장님! 현 상황에서는 도저히 저 장애물을 극복하는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훈련계획을 변경해 주시길 바랍니다." 라고 건의해 왔다. "지금은 전쟁 중이야. 전쟁 중에 변경이 어디 있나? 임무를 부여받은 지휘관이 알아서 극복 할 방법을 찾아야지. 그것이 임무완수지. 계획변경은 할 수 없다" 나는 냉정하게 잘라 말했 다. 약 3시간 후 대대가 장애물을 넘어 공격을 개시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장애물 지역으로 나 가 보았더니 통로 3개를 개척하여 전차가 장애물을 타고 넘고 있었다. 전차 앞에 불도져 날 을 붙인 도자전차로 수직 장애물에 흙을 밀어붙여서 반대편으로 흙을 떠서 부운 다음에 도 자전차가 장애물을 넘어가서 반대편에서 흙을 밀어붙여 언덕을 만들어서 통로를 개척한 것 이었다. 나는 즉시 대대장 이 중령에게 무전으로 축하를 해주면서 전장에서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 하게 하고 아울러 상급부대가 가지고 있는 지원수단을 잘 활용하는 것이 유능한 지휘관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일 깨워주었다. 장애물 극복을 위한 공격작전을 완료한 다음에 공격작 전을 위한 작전명령을 사전에 하달하여 부대를 집결시켰다. 나는 대대장 이 중령을 격려해 주기 위해서 샤프차로 불러 C-레이숀 깡통을 뜯어 안주 삼 아 위스키 한잔을 권했다. 그는 꼴깍 꼴깍 받아 마시더니 취기가 올라서 술주정 비슷하게 나에게 대들 듯이 말을 시작했다 "여단장님! 저는 지금까지 여단장님을 존경하고 나름대로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무 엇을 잘못한 게 있습니까? 제가 여단장님에게 섭섭하게 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라고 하 면서 어린애같이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닌가?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이 중령의 행동에 어이가 없어서 "이 사람아! 내가 왜 자네를 미워 하다니? 어린애 같은 소리 말게. 전쟁이란 그런 거야" 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이 중 령은 내가 자기에게 개인적인 감정이 있어서 훈련을 통하여 혹독하게 기합을 넣는 것이라는 오해를 한 것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평상시 나는 대대장들에게 아주 친근하게 대해 주었 지만 이번에 훈련을 실시하면서 냉혹하게 대했으니 오해 할 만도 하다고 생각되었다 4일째 6군단지역에서 동쪽 5군단 최전방지역으로 이동하여 남쪽으로 한탄강을 도하하면서 작전계획상의 대대의 방어진지를 포함한 축차방어진지에 대한 적의 입장과 공격방향에서 약 60km가 넘는 종심 깊은 목표에 대하여 14시간에 거친 공격작전훈련을 실시했다. 이 훈련은 적의 기도를 추출해 내고, 아군의 방어진지와 작전계획의 타당성여부를 재확인 하는 선상에서 효과를 얻을 수 있는 훈련이었다. 5일째 아침 8시를 기하여 상황을 종료하고 10시부터 현지에서 훈련강평시간을 가졌다. 간 부만이 아니라 심지어 대대의 취사병까지 포함해서 전원을 참가시켜서 일방적인 강평이 아 니라 자유로운 토론식 강평으로 유도하여 소대장, 중대장, 대대장 순으로 훈련실시 결과에 대한 자기 평가를 하게 하였다. '너무나 힘이 드는 혹독한 훈련이었으나 보람이 있었다.' '여단장이 계속 따라붙어 긴장된 상태에서 훈련해서 너무나 피로하여 여단장이 원망스러웠다.' '오줌 늘 시간도 없어 전차 속 에 깡통을 준비해 두었다.' '이런 훈련은 처음 받아보았다.' '실전 같아서 실제전투의 양상을 알 것 같다.' 등등의 소감이 발표되었다. 내가 최종적으로 '제15전차대대는 임무수행 가능'으로 판정하자 대대의 전 장병들은 환호 성을 질렀다. 밥을 굶고 잠을 못 자고 대소변을 제대로 못 보는 고생을 하고도 환호성을 질 러대는 것으로 보아 고된 훈련을 하고도 사기가 올랐다고 생각되었다. 제15전차대대는 대대시험훈련을 종료하고 오후 늦게 자기들의 막사로 복귀하였다. 나는 대 대장에게 모든 병력이 훈련으로 극도의 피로감에 쌓여 있으니 장비의 정비는 내일부터 실시 하고 가급적 빨리 휴식시간을 제공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날이 어두워진 후에도 15전차 대대의 각 전차에서는 승무원들이 작업을 하고 있었다. 나는 대대장에게 "왜 휴식을 제공하 지 않는가?"고 책망하였다. 대대장은 자기도 분명히 지시를 했는데 모두가 스스로 내일의 전 투를 위한 출동준비를 완료해 놓고 취침을 하겠다고 하니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고 했다. 다음 날부터 여단 내에서는 15전차대대가 훈련받은 여러 가지 이야기들로 가득 채워졌다. 그 중에서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되겠지만 한번 적 기갑부대와 붙어 보았으면 좋겠다."는 소리도 나왔다. 나는 병사들 입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오리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하였다. 아 마도 고도의 강한 실전과 같은 훈련을 실시한데 대한 자부심에서 나온 신념이라고 생각되었 다. 나는 바로 이것이 적과 싸우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라고 생각하고 이 자신감에 서 진정한 군인의 사기가 우러나오는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어 만족스럽기도 했고 부하들이 자랑스러웠다. 79년 1월초부터 지형과 상황을 변화시켜가면서 3전차대대, 5전차대대, 105기계화 보병대 대 및 628포병대대를 차례로 이러한 훈련방법으로 대대시험훈련을 실시하였다. 특별히 105 기보대대는 전차와의 협동훈련과 도하훈련에 그리고 628포병대대는 전차대대의 신속한 기동 에 뒤따라 직접지원 할 수 있는 기동훈련에 중점을 두어 부대훈련을 실시하였다. 훈련 도중에 크고 작은 안전사고가 4건 발생했지만, 사고의 발생건수는 전 여단이 전 병력 과 전 장비를 동원하여 2개월여의 기간 훈련한 것으로 볼 때, 놀라울 정도로 적은 것이어서 오히려 과감한 훈련을 실시한다면 사고가 감소하는 듯싶었다. 나는 약속대로 훈련 중 술을 마시고 운전하다 교통사고를 낸 트럭 운전병 1건을 제외하고는 예하 지휘관에게 훈련 중 발 생한 안전사고 발생에 대한 지휘책임을 전혀 묻지 않았다. 통상적으로 군대의 훈련차량이 지나가면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민간차량들이 오히려 추월 해서 앞질러 가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이번 훈련의 중반부터는 전차와 장갑차의 조종 수 들이 도로상에서 무서울 정도의 속도로 과감하게 기동함으로서 오히려 민간차량들이 겁이 나서 옆으로 피하거나 정지하는 일이 벌어졌다. 훈련은 점차 더욱 강도 높게 실시되어 나가서 3전차대대장인 박 병균 중령도 15전차대대장 과 같이 항의하듯이 자기의 심정을 토로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5전차대대장인 최 화병 중령은 눈이 퍼붓는 날 밤에 포천의 집결지에서 험준한 수원 산의 여우고개를 넘어 현리의 새로운 집결지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하달 받고 '도대체 어떻게 눈이 퍼붓는 날 눈이 많이 쌓 인 저 험준한 여우고개를 넘을 수 있겠는가?'고 작전의 시간을 연기해 줄 것을 건의하였다. 나는 역시 '작전을 변경 할 수도 연기할 수 없다. 오직 대대장의 책임 아래 대대장의 방법 으로 즉, 제설장비를 빌려서 여우고개의 눈을 말끔히 치우고 넘든지, 아니면 방활 구나 체인 을 달고 넘든지, 여하간에 지정된 시간까지 집결지에 도착하는 작전명령을 수행하라.'고 명 령했다. 결국 대대장은 자기 대대에 있는 3대의 도자전차와 여단의 부르도자를 요청하여 여우고개 의 눈을 치우면서 사고 없이 목적지에 지정된 시간까지 도착하였다. 아마도 이런 훈련을 통하여 대대장들은 '상관을 쏘아 죽이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훈련을 시켜라"는 내 말의 의미를 스스로 실감했을 것이다. 나는 여단장 임기가 끝나는 80년 1월 부대를 이임하기 직전까지 계획대로 전 대대를 시험 훈련함으로서 임기 중 2회의 부대훈련을 완료하여 나름대로 전투하면 반드시 이길 수 있는 기갑부대로 양성해 놓았다고 생각한다. 내 밑에서 이러한 훈련을 받은 대대장들은 24년이 흐른 오늘에 이르기까지 마치 실전에서 같이 싸웠던 전우와 같은 끈끈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2001년 9월, 22년 만에 내가 지휘했던 제1기갑여단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 때, 내가 여단장으로 있을 당시에 15전차 대대의 소대장으로 훈련에 참가했던 참모장 김 승진 대령이 나를 만났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그 혹독한 대대시험훈련이었다고 첫마디를 끄집어 냈다. 아마 대대장뿐만이 아니라 훈련받았던 전 장병이 지금까지도 그러한 훈련을 체험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4. 여단장 나와라! 여단장으로 부임한지 만1년이 되는 1979년 1월 어느 날 새벽 6시 반경, 제 105기계화보 병대대에서 한 병사가 보초근무 중 총과 실탄을 휴대하고 탈영을 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대대장은 새벽 6시부터 도주로를 차단하고 수색하는 병력을 배치하여 우리 부대의 작전지역 을 아직까지는 벗어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보고를 해 왔다. 어제 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 이 많이 쌓였고 아침에도 계속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대대장 엄 익순 중령에게 도망병이 보초교대를 한 시간을 확인하였더니 새벽 4시라고 했다. 다시 대대장에게 눈이 왔으니 발자국을 추적 수색하고 수색조는 반드시 2인1조로 하 고 잠복조는 분대단위로 운영하라고 지시하였다. 한편 총과 실탄을 가지고 탈영하였다면 분 명 서울방향으로 나갈 것이라고 추정되어 포위망을 만세교 선까지로 형성해서 병력을 배치 하였다. 그러나 오전까지 눈이 내려 발자국을 추적하는 수색은 실패하고 아무런 흔적을 찾 을 수 없었다. 오후부터 날이 개이기 시작하여 나는 헬리콥터를 타고 도주로와 은신처를 판단하기 위한 공중정찰을 실시하여 여단수색중대를 출동시켜 지역 내의 독립가옥과 동굴들을 수색하기 시 작하고 주요지점마다 1개 분대 씩 잠복토록 지시하였다. 이렇게 하루가 지나고 그 다음 날은 포위선을 축석검문소까지 형성하였다. 그러나 2일이 지나도 아무런 단서를 찾지를 못하고 시간만 흘러갔다. 문제는 탈영병이 총과 실탄을 휴대 하여 무슨 대형사고를 일으킬지 모르기 때문이다. 3일째가 되던 아침9시 나는 군단사령부에 들어가 군단장에게 중간보고를 하고 있었다. 약 20여분이 지났을 무렵 탈영병이 산정호수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산정호텔의 주차장에 세 워둔 버스 속에 있는 것을 우리의 수색조에 의해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탈영병은 2일간이나 산정호텔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산정카바레의 이불 방에 숨어 있다가 이 버스에 올라 인질로 삼은 것이다. 나는 현장지휘를 위해 군단장실을 나오는데 군단장은 나에게 위험한 일이 있어서는 안 되 니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지프차를 전속력으로 몰아 현장으로 달려가면서 무전으로 대 대장에게 즉각 산정호수로 들어가는 도로를 105기보대대의 APC(장갑차)를 출동시켜 2중으 로 차단하라고 지시했다. 탈영병 발견 보고를 받고 불과 15분 이내에 조치된 아슬아슬한 상 황이었다. 아마 몇 분만 늦었어도 탈영병은 운전사를 위협하여 우리 부대 지역을 벗어날 뻔 했다. 인질로 잡힌 버스는 서울방향으로 나오다가 도로가 장갑차로 차단된 것을 보고는 약 50m 거리에서 정지하였다. 내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육군본부까지 도망병의 발견 상황보 고가 완료되고 기자들이 몰려 취재를 하기 시작하였다. 긴장된 순간 침묵이 흐르는 듯 하더니 갑자기 버스 속에서 총소리가 연발로 나고 이어서 여자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탈영병이 흥분해서 총기를 난사한 것 같았다. '혹시 사람이 다 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했다. 잠시 후에 버스의 창문을 열고 탈영병이 "여단장 나오라"라고 반복하여 소리를 질러댔다. 나는 휴대용 확성기로 "내가 여단장이다. 너의 요구사항이 무엇이냐? 네 요구를 들어줄 터 이니 먼저 민간인부터 풀어라"라고 설득했다. 그리고 대대장, 중대장, 소대장이 번 갈아가면 서 "너는 더 이상 빠져나갈 수는 없다." "너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설득했다. 얼마 후 버스의 문이 열리더니 여자들이 10여명 내려오고 나이가 든 남자들이 5-6명이 뒤 따라 내려왔다. 우리는 풀려난 사람들에게서 인질로 잡인 최초의 상황부터 현재 차안에 6명 의 남자가 인질로 남아있고 1명의 여선생이 총상을 입고 사망한 상태임을 확인하였다. 이들은 서울 보성여고 선생님들이었는데 32명이 2박3일로 세미나를 마치고 귀경하기 위하 여 이날 아침 버스에 올라타는 중이었다. 공교롭게도 이중에는 나와 죽마고우인 이 인식 교 목도 포함되어 있었다. 버스의 맨 뒤 좌석에 군인 하나가 앉아 있어서 이상하기는 하였지만 서울로 나가기 위해 승낙을 받고 승차한 것으로 알고 승차를 계속하여 20여명 이상이 승차했을 무렵, 탈영병이 돌연 총을 공중으로 공포탄을 쏘며 버스 문을 닫게 하였다고 한다. 바로 이 순간이 우리부대 2인1조의 수색조에 의해 버스 안에 앉아 있는 탈영병이 발견된 순간이고, 놀란 탈영병은 겁을 주기 위해 총을 밑에서 위로 치켜들면서 공포탄을 쏜다는 것 이 버스좌석에 앉아 있는 여선생의 뒷머리에 1발이 관통하게 된 것이었다. 나는 다시 확성기로 "더 이상의 희생자가 나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차안에 있는 시신을 인계하라. 2명의 위생병과 소대장이 비무장으로 들것을 가지고 가겠다."고 하였다. 시신을 인수하는 척하면서 버스 안으로 진입해서 탈영병을 제압하는 작전을 시도하는 방법 도 고려했지만 또 다른 희생자가 나올 것이라 판단되어 포기하고 더 확실한 방법을 택하기 로 하였다. 시신을 인수하면서 자연스럽게 접근한 소대장 추 중위가 탈영병과 차창을 열고 근접대화를 통하여 탈영병의 신경을 분산시킨 사이에 군단 헌병대의 특수 수사요원 4명을 은밀히 버스 밑으로 들어가 잠복하게 하였다. 이렇게 대치한 채로 긴장된 시간이 약1시간 이상이 흘렀을 즈음 탈영병은 다시 여단장과 직접 담판을 짓겠다고 소대장에게 전달해왔다. 나는 여단장의 뜻을 소대장이 전달한다는 명목으로 소대장을 단독으로 다시 버스로 보내면 서, 소대장에게 여단장이 탈영병을 만나기 위해 버스로 접근하는 동안에 버스 밑에 잠복한 헌병 특수조가 버스 문을 부수고 버스 안으로 돌진할 수 있는 상황을 조성해 보라고 지시하 였다. 이렇게 계획한 방안으로 더 이상의 희생자를 내지 않으면서 탈영병을 체포해 보기로 시도 하고, 만일 내가 버스에 접근할 때까지 기회가 오지 않으면 탈영병과 면담을 하여 해결해 보는 방안을 강구하기로 하였다. 나는 내가 나서서 해결이 될 수만 있다면 하는 생각으로 버스로 가기로 했다. 그러나 여단 참모들은 잘못하면 여단장까지 인질이 될 수도 있고 흥분될 대로 된 탈영병이 어떤 짓을 할 지 모르기 때문에 안 된다고 이구동성으로 반대를 했다. 그러나 상황을 빨리 종결지어야 할 처지에 있는 나로서는 탈영병의 요구에 응하는 방법밖에 없어 보였다. 나는 '설마 저놈이 여단장인 나를 쏘겠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나는 일단 죽을 각오 까지 하고 혼자서 버스로 들어가서 탈영병과 대화를 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가능하면 버스 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가 계획한 방안으로 이 상황을 종결시켰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한편 내가 권총을 차고 들어가느냐 풀고 들고 가느냐 아니면 숨겨가지고 들어갈 것인가 하 는 문제를 놓고 잠시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탈영병이 나에게 무장 해제를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탄을 장진하고 잠금장치까지 풀고 권총을 차고 들어가기로 했다. 여차하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하여 권총을 사용하여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참모들은 다시 한번 여단장이 직접 버스로 접근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러나 내 입장 에서는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참모들의 반대를 뿌리치고 서서히 버스를 향해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나의 전속부 관인 박 윤성 중위는 한사코 나의 앞을 가로막으며 만류하는 것을 떼어놓는데 애를 먹었다. 수많은 병력이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숨소리 하나도 들리지 않아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 았다. 이 때 탈영병은 버스 안에 잡아 둔 6명의 인질을 앞좌석 한쪽으로 몰아 앉히고 자기는 그 들의 뒤에 앉아 오른 손으로 총을 잡아 인질들의 뒤통수를 겨냥하고 차창에 기대어 왼 팔꿈 치는 차창 밖으로 약간 내놓은 상태로 차밖에 근접해 서 있는 소대장의 끈질긴 설득에 말려 들고 있었다. 버스와 약 10m 거리를 남겨 놓은 지점에 도달했을 때 1발의 총소리가 나자 도로변의 배수 로에 배치된 사병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탈영병이 차안에서 발사한 총탄이 버스의 앞 유리 창을 뚫고 굴절되어 유탄이 불행하게도 이 병사의 가슴에 명중 즉사한 것이었다. 이 순간 소대장 추 중위가 탈영병의 왼팔을 잡아채고 있는 힘을 다하여 잡아당겼다. 거의 동시에 차안의 인질로 잡혀 있던 체육선생이 총열을 손으로 잡아 올려 세우며 버티는 동안 몇 발의 연발총성이 났고 그 순간 버스 밑에 잠복한 특수요원들이 버스의 문을 부수고 차안 으로 진입 탈영병을 체포했다. 상황은 순간적으로 종결되어 참으로 싱겁다고 느껴지기까지 할 정도였지만 그 과정은 너무 도 길고 긴 시간이었다. 그런데 탈영병이 발사한 1발의 총탄에 대한 미스터리는 현재까지도 나에게는 미스터리이 다. 조사과정에서 탈영병은 걸어오는 여단장을 조준한 것이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군 범죄수 사대의 조사로는 여단장을 조준한 것이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누구를 조준한 것이던 간에 그 과정에서 희생된 박 일병에 대한 아픈 마음을 나는 지금까지도 간직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탈영병의 이름 유 웅길 일병은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편모를 모 시고 살다가 군에 입대했는데 모친이 어느 중에게 가진 재산과 몸을 다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서 분개하여 모친에게 사기를 친 중에게 복수할 계획을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유 일병은 제2훈련소 하사관 교육대에서 장기하사관교육도중 고의로 탈락하여 전방부대로 전입한 후, 실탄과 총을 가지고 탈영하려고 치밀한 계획을 세웠는데 하필이면 우리여단 105 기계화 보병대대로 전입되었던 것이다. 원래 신병이 전입한지 1개월 이내에는 야간보초근무 를 세우지 않는 것이 우리부대의 규정이었다. 그러나 유 일병은 계획적으로 새벽 3시 반에 보초근무 교대병에게 자기가 대신 보초를 서 주겠다고 거짓말을 하고 총과 실탄을 가지고 탈영한 것이었다. 상황은 종결되었으나 그 날 오전부터 라디오 방송과 저녁 TV뉴스의 보도로 전국에 알려져 서 민간인의 사망사고의 뒤처리와 대형사고의 예방을 막지 못한 소속 지휘관들(소대장, 중대 장 및 대대장)의 중징계 및 여단장의 책임문제에 대한 처리 그리고 육군참모총장에게까지 보고해야하는 사고보고 준비 등은 참으로 부담이 되고 고통스러운 문제들이었다. 결국 나는 여단장 취임이후 불명예스럽게 참모총장에게 직접 사고보고를 하게 되었다. 나 는 탈영병 유 일병이 우리부대에 전입하여 신상파악도 완전히 되기 전인 5일 만에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계획적으로 탈영하여 사고를 일으킨 사건임을 부각시켰다. 그러므로 지휘책 임이 있다면 여단장에게 있는 것임으로 내가 문책을 받겠으니 내 부하들에 대한 문책은 면 책시켜 줄 것을 건의하였다. 이런 경우 통상적으로 지휘계통을 따라서 줄줄이 징계가 되는 것인 관례였지만 이번 사고 의 결과는 소대장과 교대보초병만 처벌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어 지금껏 육군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문책수준의 관례를 깨는 현상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대부분의 여단 장병들이 새 여단장 밑에서는 이유 없는 처벌은 받지 않는다는 확신과 여단장이 자기들의 울타리가 되어 준다는 여단장에 대한 신뢰가 형성되어 내가 여단 을 지휘하는데 오히려 전화위복의 결과를 가져왔다. 5. 교회와 법당 부임한 첫 번째 주일날 영내에 있는 여단교회에 나갔더니 약 50여명이 예배를 드리고 있 었다. 원래 이 교회건물은 미군들이 지어 사용했었기 때문에 교회 내부가 아름답게 치장되 어 있었고 비품들도 고급으로 비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교회 안에 당연히 있어야 할 긴 의자가 여섯 개밖에 없어서 사병들은 각기 깔개를 가지고 와서 바닥에 앉아 예배를 보는 것이었다. 나는 맨 앞의 의자에 앉아 예배를 보면서도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부 대에서야 계급에 따라 대우를 받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교회에서야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평등한 자녀로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닌가? 예배 후에 군목인 이 대위에게 교회 건물에 비해서 비품이 부실한 것 같다고 했더니 전임 여단장이 교회의 의자를 여섯 개만 남겨놓고 의무대를 비롯하여 각 중대본부로 나누어주고 카펫도 뜯어 다가 여단장 관사에 깔았다면서 전임여단장은 불교신자였다고 했다. 나는 군목 의 이야기에 기가 막혀서 할 말을 잃어 버렸다. 다음날 참모회의에서 나는 지휘관의 종교에 구애되거나 영향을 주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 며 어느 종교이든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군종참모에게 '군종참모는 비록 목사이지만 군종참모로서 여단 전 장병들의 신앙생활과 관계되는 각종 종 교행사의 지원과 신자들을 목양할 책임이 있다. 따라서 기독교, 천주교, 및 불교신자를 정확 히 파악하고 각기 종교행사를 지원하라'고 지시하였다. 이 지시에 따라 4주가 지나서부터 부 근에 있는 민간인 천주교 신부가 여단 교회에 들어와 천주교 신자들을 모아 미사를 집전하 기 시작하였다. 부족한 교회의 의자와 전임 여단장이 뜯어간 카펫은 영락교회 한 경직 목사님에게 청해서 원상태로 복구하였다. 또한 나의 모교회인 남대문교회 배 명준 목사님을 비롯한 많은 신도 님들의 부대방문을 통하여 자전거 50대를 기증받아 예하부대에 분배함으로서 영내가 너무 넓어서 걸어 다니기가 힘들었던 문제를 해결하는데 유용하게 사용하게 했다. 마침 이 시점은 정신전력 강화를 위한 전 장병 1인 1종교 갖기 운동을 전개하라는 육군본 부의 지시가 하달한 때여서 여단 군종참모의 활약으로 여단 내의 종교 활동은 종파에 관계 없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79년 3월 말 나는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이화여대 김 옥길 총장님을 초청하여 전 장병에 게 "하나님의 영광"이란 제목으로 특별강연을 듣게 하였으며, 내가 부임한지 1년이 좀 넘은 1979년 4월 21일 여단 연병장에서 한 경직 목사님의 주례로 498명의 여단 장병의 합동세례 식을 거행하였다. 1978년 4월 불교신자 대표인 김00 중사가 군종참모와 함께 찾아와서 전국의 불교 신도회 로부터 지원을 받아서 여단 내에 불교신자들을 위한 자그마한 불당을 건립하고져 하는데 허 락을 해달라고 건의해 왔다. 나는 법당 건축을 위해 지원할 공식예산이 전연 없기 때문에 여단에서는 약간의 비 예산항목만 지원하는 것으로 하여 법당 건립을 승인하였다. 4월 중순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장 배 송원 스님이 여단에 내방하여 여단 내 불교신자들 을 모아 수계식을 갖고 법당 신축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5월부터 마태사의 대목과 인간문화 재 이 인호 씨의 단청으로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인 1979년 4월25일 기갑호국사를 준공하 게 되었다. 기갑호국사를 건립함으로서 불교신자들의 신앙생활에 기여함은 물론 전 장병의 호국정신을 일깨우는데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단 안과 밖의 일부 기독교 신자들은 여단장이 기독교 신자이면서 어떻게 영내에 불당건립을 승인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며 비난과 비판의 소리도 적지 않았다 나는 만 2년간의 여단장 임기 중, 항상 싸움터에 서 있다는 각오로서 적 기갑부대와 싸우 면 반드시 이기겠다는 신념으로, 오로지 모든 역량을 전투태세완비와 실적적 훈련에 집중시 켰다. 이 기간은 내 군대생활 뿐아니라 전 생애를 통하여 온 정열을 다 쏟아부운 가장 보람되고 값진 그리고 자랑스러웠던 시절었다고 생각된다. 1980년 1월 16일 나는 제3사관학교 교수부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6. 권총을 빼앗긴 장군들 영천에 위치한 제3사관학교는 내가 22년 전인 1961년 1월부터, 미국 군사유학을 가기 위 하여 부관학교 군사영어 반에 입교하여 공부한 곳이었다. 2년제 제3사관학교의 모든 제도는 태능 육군사관학교와 거의 동일하면서 군사학 훈련에 겸 하여 전문대학의 이공과 교육을 시켜 장교로 양성했다. 생도의 수는 3000여명으로서 1년에 약 1300명을 소위로 임관시켜 배출했다. 학교는 교수부와 생도대 및 행정부로 편성되어, 학 교장으로 J 중장, 교수부장은 내가, 생도대장으로 C 준장, 행정부장으로 L 준장 등 장군 4 명이 보임되어 있었다. 내가 보임 된 교수부는 군사학처와 일반학처로 구분되어 일반학처의 구성은 이학과, 공학 과, 사회과학과 및 인문과학과로서 107명의 교수와 군사학 교관 78명으로 도합 185명의 인 원이 보직되어 있었다. 내가 재직한 기간에 17기와 18기가 졸업했고 19기와 20기가 입교하 였다. 나의 직무는 비교적 시간여유가 있어 지금까지 너무도 여유 없이 지날 수밖에 없었던 생활 의 속도와 리듬을 조절하는 좋은 기회여서 독서와 운동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었다. 나는 교수부장으로서 생도들의 군사학 교육훈련은 이론적인 면을 축소하고 실질적인 면으 로 수정보강 시켰다. 특별히 생도들에게 정신훈화 시간을 통하여 6.25 당시 내가 18주의 짧 은 교육을 받고 소위로 임관하여 소, 중대장으로서 전장에서 체험하고 느낀 사항을 소개해 줌으로서 교육훈련이 왜 실질적이어야 함을 강조하고, 미국군사 유학을 통하여 얻은 장교의 긍지와 넓은 세상을 바라보도록 강조했다. 또한 일반학 교육은 주로 이공학과와 영어 교육 에 중점을 두어 이공학 실습 장비를 갖추는데 온갖 노력을 경주하였으며, 아울러 경북대학 교와 긴밀한 교류관계를 맺고 일반학 교육범위를 확대해 나갔다.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은 80년 3월초 2주간에 거처, 육사교장 C 장군과 함께 일본, 자유중 국, 필리핀 및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4개국의 사관학교를 시찰할 기회가 주어졌다. 각 국의 사관학교를 시찰하면서 확인하고 느낀 것은 우리와 같이 미국 육군사관학교 제도 를 그대로 모방한 것이 아니고 각기 자기 나름대로 자국의 여건과 역사적 군사문화를 배경 으로 사관학교를 편성하고 교육의 중점을 두고 있는 점에서 감명을 받았다. 4개국 모두가 통합군 개념으로 육, 해, 공군 및 경찰까지 2년 간은 통합사관학교에서 교육받고 잔여 2년 간은 해당 군 사관학교에서 교육훈련을 받고 임관하도록 되어있었다. 우리나라도 조속히 이 제도를 검토해야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시찰을 끝마치고 귀국보고서 에 정책의 건의를 한 바가 있었지만 현재까지도 우리나라는 대형 국가인 미국의 제도를 답 습하고 있는 실정이다. 대만의 육군사령부를 방문했을 때 C 장군과 나에게 예정에도 없는 훈장수여를 하여 나는 자유중국의 운모훈장을 수여 받았다. 그 날 저녁 육군사령관 주최 만찬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진귀하고 맛있는 요리를 대접받은 것 같았다. 또 놀란 것은 나에게 개인적인 보좌관을 붙여주었는데 그의 이름은 나와 종씨인 한 위요(韓 衛耀)소령이었다. 이와 같은 극 진한 대접은 아마도 한국이 대만과 계속 공식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몇 안 되는 국가 중 한 나라였기 때문에 귀한 손님을 맞이하는 심정에서가 아닌가 싶었다. 대만군의 심리전 본부의 정신전력학교를 방문하여 그들의 본토회복을 위한 소망과 노력에 감탄과 동정을 금할 수 없어 우리도 남북통일을 위한 작업으로 이와 같은 계획과 연구의 노 력이 뒤따라야 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필리핀 통합군사령부를 방문하고 다음 날 필리핀 사관학교를 방문하기 위하여 마니라에서 약200km 떨어져 있는 필리핀의 휴양도시 바기오로 아침 일찍 요란하고 삼엄한 헌병들의 에 스코드를 받으며 출발했다. 왜 이렇게 경호를 하느냐고 물었더니 가끔 반정부 게릴라들이 출몰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방문하는 곳마다 사관생도의 사열을 받았으나 필리 핀 사관학교에서 받은 사열과 사관학교장이 주최한 우리를 위한 리셉숀과 만찬은 세련되고 우아한 멋이 있는 환영행사였다. 마지막 방문 국인 인도네시아에서도 우리는 후대를 받았다. 사관학교를 방문하였을 때 정 문 입구에서부터 사관생도들이 도열하여 우리의 방문을 환영해주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 군은 우리를 국제적 휴양지인 발리 섬에서 1박2일의 휴식과 관광을 할 수 있도록 군용기를 제공해 주는 선심까지 베풀었다. 나는 인도네시아 안내장교에게 나의 미 기갑학교 동기생 Wismojo 중위와 이란에서 같이 무관생활을 한 인도네시아 무관 해군중령 Bintoro를 만날 수 있겠는가를 물었다. 그 날 저녁 만찬장에 육군대령 Wismojo가 나타났다. 그 시간 이후 그는 내가 인도네시아를 떠날 때까지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한편 Bintoro는 우리가 자카르타로 돌아가 호텔에 들어가는데 부인 과 같이 나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Bintro부인은 내 아내와도 각별히 친했고 거의 3년간을 같이 지난 사이여서 정말 반가운 만남이었다. Wismojo 대령과 Bintoro 중령 부부는 이튿날 우리가 떠나는 비행장까지 토산물로 만든 선물을 가지고 나와 나를 환송해 주었다. 아마도 이것이 동양 사람들의 정의 표시인 듯하다. 1980년 9월초 제17기의 졸업 및 임관식에 전두환 대통령이 참석한다는 예상하지 못한 통 보를 받고 학교는 온통 난리가 났다. 일주일 전부터 청와대 경호실에서 나와 심지어 장군들 의 책상까지 뒤질 정도로 철저하게 보안조치를 강구하고, 보안대에서는 기간 장병의 신상을 일일이 파악하여 조치하였다. 한편 육군본부에서는 참모차장을 비롯하여 참모 장성들이 예 행연습을 지도하기 위하여 헬기로 내려오는 등 무척이나 요란스러웠다. 드디어 3일전 학교 가 보유한 모든 총포의 공이를 뽑아 회수해 갔고 심지어는 장군들의 개인 권총까지 회수해 갔다. 국가원수의 경호는 당연한 조치이겠지만, 방문하는 부대의 장군들을 무장해제까지 시킨다 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도대체 장군들까지 믿지를 못하면서 어떻게 군을 통수할 수 있 다는 말인가? 나는 참으로 한심스럽고 참담한 심정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러나 나의 개인적인 감상과는 전혀 상관없이 졸업식은 축제분위기 속에서 성대하게 잘 끝마쳤다. 학교에 근무하는 대부분의 기간요원들은 대통령이 육군 제3사관학교의 졸업식에 참석한 자체만으로도 제3사관학교에 대한 대통령의 지대한 관심이 표명된 것으로 간주하고 앞으로 제3사관학교는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상향조정될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우리만의 착각이었다. 졸업식이 끝나고 2주 후, 육군본부에서 다음 제21기부터는 생도모집을 중단하고, 해군과 공군의 제2사관학교를 전부 통합하여 년 간 약 400명의 학사장교로 양성하는 축소계획을 연구하여 보고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결론적으 로 대통령이 제3사관학교를 다녀간 후 육군의 초급장교의 소요에 따라 년 간 약 1,300명 씩 배출하던 제3사관학교의 모집인원이 1/3도 안되게 축소되게 되었다. 왜? 이와 같은 조치가 취해 졌을까? 1980년 국가의 혼란한 틈새를 이용해서 정권을 탈취한 육사출신 중 하나회가 주동이 되어 일으킨 12.12쿠테타의 신 군부세력들은 성우회(星友會)를 비롯한 군과 관련된 친목단체까지 해산시키고, 군 인사법을 개정하여 자신들에게 위협요소나 걸림돌이 되는 인적요소들을 제 거하는데 혈안이 되었다. 그로 인하여 6.25 당시 전투경험을 가진 비 육사출신 장군들 대부 분이 군에서 일직 퇴출 당해야 했다. 더욱이 나를 참담하게 만든 것은 이 와중에서도 자리를 보존하거나 얻어 가지기 위해서 까 마득한 옛 부하의 수하에서 아첨하며 영화를 누린 치사한 장성들을 보는 것이었다. 나는 이런 행각을 보면서 고려 시대의 정중부가 '무신의 란'을 일으킨 후 '붕당정치'를 했던 것이 생각났다. 불행하게도 내가 군에 있는 동안 군대를 자기파당의 패거리 집단으로 만드 는 역사적 과오가 또 다시 되풀이되는 것을 보고 있어야만 하는 나의 무능함을 한탄하지 않 을 수 없었다. 마음이 착잡한 이 때, 나의 두 아들이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3학 년에 재학 중이던 장남은 현역장군인 아버지의 덕을 보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의논 한마디 없이 육군을 피해 해병대로 자원 입대해 버렸다. 형이 졸병으로 군에 가서 심한 고생을 하 는 것을 본 막내는 연세대학교 경영학과를 다니면서 ROTC장교로 임관 공수특전단으로 지원 하여 근무하고 제대했다. 흔히 우리나라 특권층 인사들과 그 자제들이 온갖 비리수단을 다 동원하여 병역의무를 기 피하는 실태에 비추어 나의 자식들은 스스로 자기의 의무를 수행했다는 것이 나에게는 무척 이나 기특하게 생각되었다. 만 2년 간의 제3사관학교 교수부장의 보직에서 교수부 내에서 맺어진 부하들과의 인간관계 는 내 인생에 잊을 수 없는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특별히 진급을 앞두고 있는 중요한 시기에 타부대로 전출시키려고 했던 교무과장 장 세권 중령(준장)을 내가 군사학 처장으로 받아들여 대령 진급을 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어 후일 그가 장군으로까지 승진하게 되는 것을 보게되고, 또한 일반학처의 이 대윤 대령(박사), 한 복용 중위(박사) 등 많은 교수들이 성장하여 지금 전국의 각 대학에서 활약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내가 제3사관학교 교수부장을 지내면서 얻은 기쁨과 보람이라 하겠다. 7. 군문을 떠나면서 1982년 1월 16일부로 전라남도 광주에 위치한 제1군관구 부사령관으로 부임하게 되었지 만 진급할 수 있는 직위로 보직되지 못하고 관구의 부사령관으로 보직을 받은 것은 이미 개 정한 군 인사법상 준장계급의 계급정년 5년에 해당됨으로 8월말로 전역된다는 예고된 인사 였다. 제1군관구사령부는 전라남북도 지역을 위수(또는 계엄지구)지역으로 하여 제30 및 35예비 사단과 2개의 동원사단 그리고 지역 내 각 대학에 설치된 ROTC를 작전통제하며, 기타 지역 내의 모든 부대에 대한 군수지원의 임무를 수행하는 부대였다. 사령관 김 춘배 소장은 나와 같이 6.25 때문에 군에 들어온 종합학교출신으로서 지덕(智德) 을 겸비한 장군이었다. 5.18광주민주항쟁 직후 광주에 위치한 제1군관구사령부의 임무와 기능으로 보아 자연히 지 방행정기관 즉 전남북도의 도청 및 시청, 검찰, 경찰, 법원 및 기타 유관기관들과 밀접한 협 조관계는 필연적인 것이었음으로 거의 1주에 1-2회의 공식 또는 비공식모임을 갖게 되었고, 자주 접촉하는 과정에서 지역기관장들과 개인적으로도 친근하게 되어 유익한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한편 사관학교의 교수부장을 역임한 나는 당시 관구사령관의 지휘관심의 대상에서 벗어나 있는 ROTC교육에 관심을 표하지 않을 수 없어 전남북도에 산재해 있는 7개 ROTC의 교육 상태를 점검하고 발전시키는데 주력하였다. 이 부대에서 근무하는 기간은 짧았지만 존경하는 김 춘배 장군과 나를 따르며 내가 어려울 때 변함없이 나를 도와 준 박 영윤 중령, 나 보다 나이는 적지만 서로 존경하고 건강을 염 려해 주는 광주의 장 순철 사장 부부와의 인연을 맺은 것은 내 생애에서 소중한 소득이었 다. 광주는 나의 군대생활 중 세번에 거처 총7년 반을 살아온 가장 긴 기간, 힘들고 어렵게 생 활을 한 곳으로 고운 정 미운 정이 뒤섞인 특별한 인연이 서린 곳이다. 이러한 고장에서 나 의 군 복무 중 마지막 부대근무를 마치게 되는 것도 우연은 아닌 상 싶었다. 7월로 접어들면서 전연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오로지 군대밖에 모르는 내가 군복을 벗고 나가서 '이 나이에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하는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하였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 '내가 이 별을 달고 있는 날까지는 나가서 무엇을 할 것인 가는 절대로 생각하지 말고, 군복을 벗는 날까지 충실히 복무하고 나가자'라고 마음으로 다 짐했다. 드디어 1982년 8월 31일 나는 제1기갑여단 연병장에서 전역 식을 갖게 되었다. 전 역 사 존경하옵는 군단장님! 내빈 여러분! 그리고 필승의 신념에 불타고 있는 충성스럽고 용맹스 러운 제1기갑여단 전우 여러분! 오늘 본인은 32년간의 군 복무를 마치고 명예스러운 전역을 하는 영광스러운 자리에 섰습 니다. 먼저 저와 같은 대열에서 조국을 위해 싸우다가 산화한 전우의 영령들께 경건히 머리 숙여 명복을 빌며, 이 영광을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본인의 전역식을 제1기갑여단에서 갖게 됨을 더욱 의의 깊게 생각하는 것은 본인이 바로 당 여단 제5대 여단장으로서 싸우면 반드시 이기는 기갑부대로 육성하고자 제 군대생활 중 온 정열을 쏟아 부운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정들었던 군문을 떠나는 자리에 서고 보니, 지난날들의 숱한 감회가 되살아나 본인 의 심정은 헤아릴 수 없는 만감이 흐르고 있습니다. 6.25가 발발한 1950년 17세 홍안의 소년으로서 군에 입대, 18세에 소위 계급장을 달고 장 교로 임관 총알받이 소모품 소위라는 별명을 얻어 붙인 체 전투에 뛰어들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인간의 힘으로는 더 이상 견디기 힘든 극한상황 속에서 부상을 당하여 "이제 이 젊은 나이에 죽는 구나" 하는 생사의 기로에서 하나님을 원망했을 때, 부하들이 나의 생명 을 구해주어 오늘 이 자리에 서게 한 하나님의 은총과 전우애, 치열했던 김일성고지전투, 수 도고지전투 등에서 부하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통곡하던 일, 부하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였을 때 얻어지는 기쁨, 또한 1953년 6월 이후, 기갑병과로 전과하여 M4A3 고물 전차로 전차중 대장을 하면서 애먹던 일 그러면서도 항시 "내 생명 전차와 함께"라는 신념으로 중서부 전방 지역의 야지를 누비고 다니던 일, 한편 남달리 미국 군사유학의 기회와 월남참전의 기회 그 리고도 나의 인생의 목표였던 외교관을 군복을 입고서도 달성할 수 있었을 뿐만이 아니라 군인으로서 최고의 영예인 장군으로까지 승진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갑니다. 분명 제 군대생활은 희비애락이 뒤범벅이 된 제 인생의 전부였으며, 가장 귀중한 젊음을 조국과 민족을 위해 직접적으로 봉사할 수 있었던 제 인생의 보람찬 행복의 근원이기도 했 습니다. 비록 군인으로서 전쟁터에서 전사하는 명예와 세상에서 말하는 돈이나 권세는 얻지 못하였 으나, 나의 후손들에게 부끄러움과 후회함이 없이 "조국수호의 일원으로 활약하였노라"고 말 할 수 있는 자부심을 갖고 군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도 노병이 되었나봅니다. 젊으면서도 유능하며 믿음직스러운 여러분과 같은 후배들 이 양성되었으니 든든한 마음과 홀가분한 심정으로 국방의 일선에서 무거운 짐을 여러분에 게 위촉하고 물러날 가합니다. 군문을 떠나는 선배로서 후배전우 여러분에게 몇 말씀 남긴다면--- 첫째: 본인이 겪었던 것과 같은 처절한 민족적 비극인 제2의 6.25는 겪지 말아야 할 것이며 둘째: 그 옛날과 같은 민족적 가난은 겪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모두가 튼튼한 국방이 없이는 이룰 수 없는 것이며 튼튼한 국방은 곧 여러분들 의 두 어깨에 지워져 있습니다. 사랑하는 후배전우 여러분! 국방의 제일선에 있는 군대의 본질적 존재의 의의는 전투하여 승리하는데 있습니다. 더욱이 전투에 직접 투입되는 전투기동부대인 기갑부대는 이점에 있어서 그 성격이 뚜렷해 야 하고, 따라서 만사를 모두 전투에 그 기본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군대에서 가식이나 형식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군대에서 인공적인 가식이나 형식 그 리고 겉치레식의 부대단결은 전쟁이 일어나는 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립니다. 알맹이가 꽉 찬 군대 즉, 일단 싸우면 반드시 이기는 군대로 만들고 유지해 주시길 바랍니다. 대망의 80년대를 향하고 있는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의 영원한 영광을 위하여 본인이 못 다 한 일을 여러분들이 국방의 제일선에서 이루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군에 투신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부족한 사람을 키워주신 여러 선배님! 동료 그리고 후배 여러분! 그 동안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오며 살아왔을 뿐 보답해 드리지 못한 체 군 문을 떠나게 되니 죄송함을 금할 길 없으며, 심심한 감사의 뜻을 이 자리를 통하여 올리기 로 하겠습니다. 비록 오늘 군문을 떠난다 해도 제 생애의 전부였으며, 잔뼈가 굵은 군과 기갑병과 그리고 생사고락을 같이 한 전우 여러분을 잠시도 잊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앞으로 사회인의 일원으로 남은 여생을 다른 차원에서 국가에 봉사할 것을 다짐합니다. 오늘 이러한 영광스러운 전역식을 성대히 베풀어준 기갑장교, 특히 군단장님, 홍 장군과 제 1기갑여단 전우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멀리에서까지 이 자리를 빛내주시기 위해 왕림 해 주신 내빈께 감사드립니다. 끝으로 우리 국군 그리고 기갑병과의 무궁한 발전 있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이 있기까지 인내와 이해로서 내조해준 나의 사랑하는 아내와 가정의 품으로 돌아가겠 습니다.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1982년 8월 31일 육군준장 한 인 수 6부: 전원생활을 꿈꾸며 1. 제 2인생의 설계 군 생활을 끝낸 나에게 남은 것은 명예를 상징하는 훈장과 아직 은행에 할부금이 남아 있 는 살고 있는 아파트와 잔고가 200만원이 채 못 되는 것으로 기억되는 은행 통장뿐이었다. 그래도 32년간을 국가에 봉사한 덕으로 연금을 일시금으로 1년분 681만원과 1년 후부터 매 월 56만원 씩 받을 수 있는 것이 나의 유일한 재산이며 수입원이었다. 우리는 노모를 모시는 입장이었으나 다행하게도 두 딸은 이미 출가시켰고, 큰아들은 재학 중 군에 입대하고 작은아들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중이었다. 청춘을 바친 군 생활을 제1인생이라 한다면 군을 나온 이후, 제2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설계하기에 앞서 한 가지 원칙을 정했다. 그것은 내가 군에서 쌓은 명예를 지키기 위 하여 아무리 유익한 직위나 일이라도 남들이 볼 때 불명예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맡지 않겠 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아마도 내가 육군대학 교관시절에 명장들의 회고록을 읽으면서 얻은 교훈일 것이 다. 미국의 군대에서 예편한 장성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목장이나 농장에 묻혀 지내고 일본 군의 장성들이 시골의 초등학교교장으로 여생을 보내는 모습이 나에게는 무척 감동적이었 다. 나는 예편신고를 마치고 군 고위층에 민간인 신분으로 육군대학 교관으로 복무함으로서 나 의 경험을 활용할 수 있기를 바라는 뜻을 보였지만 군 수뇌부의 폐쇄된 사고방식은 나의 제 의가 받아들려 지지 않았다. 결국 나는 현역에 복무할 때 항상 부하들에게 "예편 후에는 후배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이나 연구기관에서 봉사하기를 바라지만 여의치 않으면 농촌에 들어가 땅을 파겠다." 라고 공언했 던 대로 설계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은 막연하게 농촌으로 들어간다는 생각만 했었지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자라나 농촌생활이라고는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로 서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할지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9월초 군복에서 사복으로 갈아입은 나는 그 동안 군 생활을 하면서 사랑 받았던 군의 선후 배들을 찾아다니며 인사를 드렸다. 평소 나를 많이 아껴주고 지도해준 박 노영 대장님을 찾 아가서 앞으로 농촌으로 들어가기로 했다고 했더니 대단히 반가와 하면서 자기도 예편 후에 는 그럴 계획이라고 했다. 그 자리에서 박 장군님이 "초원으로 가는 길"이라는 책을 주기에 몇일 동안 꼼꼼히 세 번을 읽어보았다. 그 책을 읽은 다음에 조금은 구체적으로 밑그림이 그려지는 것 같아서 아내에게 계획을 설명했더니 고맙게도 두 말 없이 동의해 주었다. "초원으로 가는 길"의 저자인 김 무남 교수는 뉴질랜드에서 축산학을 전공한 사람이었다. 그 후 우리부부는 직접 대관령에 있는 김 교수의 목장에 들어가서 어떻게 목장을 설계하고 경영하는가를 직접 배우면서 하나씩 계획을 세워나갔다. 앞으로 나도 New Zealand식 초지 를 조성하여 전기목책(電機牧柵)으로 둘러치고 순환방목을 하는 방식을 채택하기로 했다. 사 육우의 종류는 육우(肉牛)로 하고 사육두수 100두를 평균 기준수로 한다면 월수입을 약 80-100만원 정도로 예상할 수 있어서 계획대로라면 존경하던 상관이나 사랑하던 부하들이 찾아 왔을 때 소주잔이라도 나눌 수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이 되었다. 그러나 우선 목장을 할 땅을 구입하고 목장을 설치하는 시설 자금과 소를 살 자금이 필요 한데 막상 손에 가진 돈이라고는 1년분 연금수령 액밖에 없었고, 그 돈은 생활비밖에 안 되 어서 결국 아파트를 팔아 땅을 살 수 밖에 없었다. 어느 지역에 목장을 할 땅을 구할 것인가 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였지만 기본적으로 아파트 를 판 돈 3천만 원으로 육우 100두를 사육하기 위한 뉴질랜드의 순환방목 식 목장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약 6만평의 땅을 사야 하는 난제가 가로 놓여있었다. 물론 가급적이면 서울 근 방이었으면 좋겠지만 그 돈을 가지고 그만한 땅을 서울 근방에서 구입하는 것은 어림도 없 는 일이었다. 우리 부부는 전국을 수소문해서 전라남도 순천 근방인 승주군 주암면 행정리 에 비록 지세는 험하지만 땅 넓이가 넉넉한 산을 2천만 원을 주고 샀다. 그러니까 1982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전날이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땅을 가져보는 날인 셈이었다. 2. 초원으로 가는 길 우리 부부는 서울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목장으로 개간할 산 근처의 농촌 마을로 이사를 해야 했다. 그러나 막상 이사를 하려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왜냐하면 군대 생활을 하는 동안 이사라면 이골이 날 정도로 다녔지만 이번 경우는 상황이 전혀 다르기 때 문이었다. 군대에서는 이사를 다닐 때 생활은 불편해도 새로운 곳으로 가면 아는 사람도 있 고 당장 현지에 맞게 적응하면 되었지만 이번에는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곳에 가서 한번도 해보지 않던 일을 해야 했다. 지금까지 우리 집에서 모시던 어머니를 목장에 집을 지을 때까지 잠시나마 동생 학수 부부 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나 동생부부 모두가 시골로 내려가는 우리 입장을 잘 이 해해 주지 못하는 부분도 섭섭했지만 한편 셋방을 얻어 신접살림을 하는 형에게 대학을 다 니는 막내를 맡겨 놓고 시골로 떠나야 하는 우리들의 심정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드디어 군에서 예편한지 5개월 만인 1983년 1월 중순에 목장으로 개간하려고 산 땅이 있 는 등학산(登鶴山)으로부터 약 2km 떨어져 있는 창촌이라는 마을로 이사를 하였다. 서울의 아파트를 비워주어야 하기도 했지만 낙엽이 완전히 떨어져 있을 겨울철 산 전체를 잘 볼 수 있을 때 목장의 설계를 해야 하고 빨리 목장의 설계가 끝내야 초지 조성허가를 신청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한 겨울에 서둘러 이사를 하게 된 것이다. 이사를 하자마자 산을 목장으로 설계하기 위한 사전 정밀정찰을 위해서 매일같이 점심을 싸들고 아내와 같이 산을 오르내렸다. 그 날도 우리는 정찰을 하면서 하루 종일 산속을 돌 아다니다가 해가 질 무렵 하산하려는데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자 우리는 걸음을 재촉하여 자 동차를 세워놓은 곳에 도착하였다. 가득이나 산속에서는 해가 빨리 떨어지는 법인데 그날따 라 눈이 내려 이미 칠흑같이 어두워져 버렸다. 그런데 이것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배터리가 방전되어 시동이 걸리지 않는 것이다. 사람 이라고는 그림자도 찾아 볼 수 없는 산속이다 보니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유 일한 방법이 아내가 뒤에서 차를 밀어 보는 방법밖에 없었다. 내가 차를 밀고 아내가 시동 을 걸면 좋겠지만 아내는 운전을 못하니 그럴 수도 없고 결국 아내가 죽을힘을 다해 차를 밀어 보았다. 그러나 아내의 힘으로는 차가 꿈쩍도 하지 않고 오히려 차를 밀어 보려고 발 버둥을 치다가 진흙탕에 미끄러져 넘어지는 바람에 신발 한 짝만 잃어버렸다. 우리는 결국 차를 버려두고 진눈개비가 몰아치는 캄캄한 밤에 아내는 한 쪽 신발도 없이 2km가 넘는 집 에까지 걸어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한편 김 교수를 초청하여 자문을 받아 목장 설계를 시작하고, 제15전차대대장에게 제대하 는 사병 중에 목장을 개간할 때부터 같이 일할 목부(牧夫)로 일할 성실한 사람을 추천 해달 라고 부탁했더니 김 도영이라는 청년을 보내주어 함께 작업을 시작했다. 우선 산으로 진입할 수 있는 도로를 내서 산 중턱에 집터자리를 잡고 전기를 끌어 들여 전 기목책으로 12곳의 방목구간을 설정하고 샘터를 찾아 파이프를 연결해서 수도를 설치하고 베어내야 하는 잡목을 선정하는 등의 일을 1개월 여에 거쳐 완성한 다음에 초지 조성허가 신청서를 군청에 제출하였다. 허가가 나면 곧 초지를 조성하려고 열심히 준비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신청서를 제출한지 약 1개월이 지난 어느 날 전라남도 도청 축산과에서 편지가 날라 왔다. 당연히 초지 조성허 가서 이겠거니 하고 편지를 뜯어보았더니 초지조성이 허가될 수 없다는 공문서였다. 이유인즉 초지를 조성하겠다는 신청인이 너무 많아져 1982년 10월 31일 이전에 초지를 조 성할 토지를 소지한 자에 한하여만 초지 조성을 허가되도록 방침이 변경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단숨에 광주로 달려가 도청 축산과에 가서 내용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내 입장을 설 명했지만 공무원들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일 리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간 잘 알고 지나던 도지사를 만나 노후생활을 할 터전을 마련하기 위한 시도가 첫 번부터 행정적인 난관에 부 닥치게 된 사정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도지사가 농산국장과 축산과장을 불러 해결방안이 없겠느냐고 물었지만 그들은 도청의 권한 밖인 농수산부의 방침이니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 다. 결국 나는 서울로 올라가 농수산부 차관과 축산국장을 만났다.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정 부가 축산을 장려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보조지원 사항까지 내 세워 초지조성을 권장해 놓 고 이제 와서 못하게 하면 어떻게 합니까? 이것은 마치 나무에 올라가라고 해놓고 너무 많 이 올라갔다고 흔들어 떨어트리려는 것과 무엇이 다른 겁니까?" 나는 너무나 화가 나서 그 분위기에 적당한 말은 아니라고 생각됐지만 이런 이야기까지 쏟아냈다. "예비역장군이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30년 이상 군복무를 하고 국가 시책에 따라 스 스로 농촌에 들어가 땅을 파겠다고 하는데 조삼모사(朝三暮四)의 정책 때문에 피해를 보아야 되겠습니까? 자! 보시오. 내가 초지를 조성하기 위하여 땅을 매입한 것은 12월 24일 이지만 계약은 11월 10일에 맺었고, 더우기 초지 조성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매도한 서울의 아파트 계약은 이미 10월 15일입니다. 나는 이미 당신들이 정한 10월 31일 이전에 초지를 조성하 기 위해 살고 있는 집까지 매도한 것 아닙니까? 10월 31일에 당신들 마음이 변할 줄이야 하나님이 아니면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나는 하고 싶은 말을 다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차관과 국장은 어쩔 줄을 모르면서 현관까지 따라 나오면서 다시 한번 검토를 해 보겠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와 청와대에 탄원 서를 낼 준비를 하고 있는 중에 도청 축산과에서 농수산부로부터 내가 신청한 초지 조성허 가신청을 긍정적으로 검토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전화연락을 받고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그런데 1주일 후 이번에는 도청 산림과에서 전화가 왔다. 내가 매입하여 초지를 조성하겠 다고 신청한 산지는 산 밑에 조그마한 2급 저수지에 물을 저장하는 준 보안림으로서 초지 조성허가 대상의 토지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산 넘어 산이라 더니 이건 또 무슨 날벼락이 라는 말인가?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번 일은 지난번 사건처럼 당국 이 정책을 변경한 것도 아니고 내가 오랜 동안 군 생활만 하고 사회 경험이 없어 땅을 매입 하면서 기본적으로 확인하여야할 사항을 확인하지 못한 내 탓이다 보니 누구를 원망할 처지 도 아니었다. 그러나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는 일이기에 김 교수의 자문을 받아 가면서 도서관에 가서 초지와 수목의 수분저장함량에 관한 참고서적을 뒤져기며 내 나름대로 관계 공무원을 설득 시키기 위한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초지의 수분함량에 관한 자료제시와 기존 의 나무를 모두 벌목하고 밭을 만들 듯이 초지를 조성하는 것이 아니라 잡목들만 벌목하여 초지를 조성하는 방법으로서 오히려 육림의 간벌 효과와 초지가 수분을 저장하는 함량이 잡 목에 못지 않음을 입증하여 초지를 조성해도 저수량이 줄어들지 않을 것임을 공무원들에게 납득시키는데 성공했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산중간부터 밑으로 일부분을 보안림에서 해제 하는 허가도 얻어냈다. 당연히 신청만 하면 허가되리라 믿었던 초지 조성허가는 어려운 고 비를 두 번이나 넘기고서야 겨우 내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나는 초지 조성허가를 받으면서 단순 명료한 군대와는 달리 복잡하고 불필요한 행정절차에 메여 있고, 방침이나 법규가 잘못된 것을 인정하면서도 잘못된 것을 상급기관에 건의해서 시정할 생각은 않고 현행 법규와 방침이 이러하니 어쩔 수 없다는 공무원들의 자세에 대하 여 통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공무원들이 소신 없고 무책임하며 무사 안일주의에 빠진 것이 어디 그들만의 책임이겠는가 싶기도 했다. 드디어 금딱지 같은 초지 조성허가를 받고서 4월초부터 초지 조성을 위한 산지개간을 시작 하였다. 나를 찾아 온 사람들은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헌 군복에다 군화를 신고서 일명 딸딸 이라는 덤프트럭을 운전하는 시골 농군으로 변한 내 모습이나 하루에 15명 이상의 일꾼들의 참을 해 내기에 바쁜 시골 아낙네로 변한 아내의 모습을 보고서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 다. 그러나 정작 우리에게 힘들었던 것은 화장실이 재래식, 그것도 옥외에 있는 것이었고 매일 같이 샤워를 하다가 하루 종일 땀을 흘리며 일을 하고도 목욕은 1주일에 한번씩 광주시내에 나가야만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3. 시골과 시골 사람들 우리가 이사 오던 날 마을에는 구경거리가 생겼다. 온 마을 사람들이 화물트럭 2대에 싣고 온 우리의 이삿짐을 구경하러 몰려들었다. 우리가 이란에서 사용하다 가져온 대형 냉장고와 24인치 대형TV와 기타 현대식 가구 및 물품들은 당시 한국에서는 보기 드물었던 것이었고 승주군 지역에서는 승용차가 한 대도 없던 시절에 우리가 타고 내려온 Mark IV 자가용 승용 차 등은 구경거리가 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이삿짐을 구경하고 나서는 '어디 몇 개월이나 견디는가 보자'고 쑤군거리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마치 자기들의 삶터를 침입한 외계인처럼 경계와 질시의 눈초리로 우리를 바라보면서 심하게 텃세를 부려서 심지어는 우리에게는 물건값을 더 많이 받기도 했다. 그러나 앞으로 이곳 농촌에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는 가급적이면 주민들과 충 돌을 피하고 언행을 조심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미 아무 직위가 없는 그저 평범한 농민으로서 절대로 전관예우를 기대하지도 않았 고 진짜 농민이 되겠다고 마음을 다부지게 먹었었다. 그러나 그렇게 마음을 먹고는 있었지 만 정작 실천에 옮기기에는 내 자신이 수양이 부족하기도 했고 그들을 이해시키기가 쉽지 않았다. 어느 날 광주에 나갔던 기회에 김00 도지사를 만난 자리에서 시골 면단위 전화가설의 어려 움을 이야기 하면서 "예비역장군이 새마을 지도자보다도 서열이 낮더라."고 했더니 도지사가 배꼽을 잡고 웃었다. 하여간에 내가 도청을 방문하면 아는 사람도 많고 제대로 대접도 받지 만 군청으로 가면 가치가 절반으로 떨어지고 면사무소에 가면 또 다시 절반으로 떨어지는 셈이었다. 한편 마을 사람들 사이에는 자기들과 똑 같이 땀 흘리며 산지개간을 계속하는 나의 모습을 보고 "땅 투기를 하기 위해 온 사람 같지는 않은데 아마도 외지에 와서 목장을 하면서 행세 께나 하려고 뻥을 친 것일 게야. 설마 장군 출신이 저렇게 직접 땅을 팔 수야 있나? 아마 중령쯤 했겠지"하는 소문이 떠돌았다. 그 후 가끔 군복을 입은 영관 급 장교들이 위문방문차 찾아와서 나에게 장군님이라고 호칭하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듯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와 친하게 지나던 전라남도 노00 경찰국장이 순천경찰서장을 대동하고 나를 방문한 것을 목격하고 전해들은 마을사람들은 "가짜인줄 알았더니 가짜는 아닌가 벼!" 라는 소문이 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런 소문이 퍼지고 난지 약 6개월이 지나서 그러니까 우리가 시골로 내려 온지 거의 1년 이 다 되어갈 무렵 소문은 또 다시 다른 방향으로 돌기 시작했다. "진짜는 진짠데 계속해서 땅만 파는 것을 보아하니 아마도 현 정권에 밉보여 목이 달아난 것일 게야. 그렇지 않고서야 예비역 장군들은 다 한자리 씩 나누어준다는데 아무 자리도 얻 어 가지지 못하고 땅을 팔 리가 있나?" 좁은 시골은 참으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곳이었다. 이 모든 소문들이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지만 그러나 어찌하랴, 내 스스로 일일이 해명하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고 보니 답 답한 노릇이었다. 별 수 없이 나는 동네 사람들과 가까운 교류 없이 묵묵히 일만 할 뿐이었 다. 이 무렵 정부의 행정구역 조정계획에 따라 순천 시내에 있던 승주군청의 청사가 쌍암이라 는 새로운 지역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수 기관들인 법원등기소, 우체국, 농협, 축협, 임협지소 등이 아직 쌍암에 설치되지 못하였다. 당시는 지방 자치제가 실시되기 전이라서 이와 같은 기관들의 지소를 신설 설치하는 권한 이 각 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중앙에서 관장하고 있었다. 시골의 기관 하나를 옮기는 것도 서울의 중앙 해당부처로부터 인가를 받아야하기 때문에 중앙에 있는 기관들에 영향을 끼칠 힘이 없는 군수는 무척 애를 먹으면서 이 문제해결에 고심하고 있는 중이었다. 신 군수는 내가 안보강의를 위해 한 달에 1-2회 서울에 올라가는 것을 알고 이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협조해 줄 것을 요청하여왔다. 군수의 부탁이 없었더라도 나는 앞으로 이 지역 에서 살아갈 주민의 한 사람으로서 당연히 힘닿는데 까지 적극적으로 협조를 하는 것이 옳 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나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발 벗고 나섰고, 우체국과 농협의 설치인 가를 받기 위해서 체신부 신 차관과 농협중앙회 한 부회장을 만나 문제를 하나 식 해결해 나갔다. 군청에서는 공식회의 석상에서 승주군청에 대한 나의 도움을 칭송하고 군수를 비롯한 모든 직원들이 고마움을 표하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우리 마을주민들도 나를 보는 눈이 달라지 기 시작했다. 이렇게 새로운 소문이 퍼져서 나중에는 승주군 내에서는 '목장 하는 한 장군' 하면 나를 한번도 만나보지 않은 사람도 소문으로 나의 이름은 거의 다 알 정도가 되었지만 이렇게 되는데 까지 2년 이상이 걸린 셈이었다. 그 동안 전원생활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시작하였던 농촌생활은 열악한 생활여건과 힘겨운 육체노동보다도 시골사람들의 의심과 경계 그리고 질시의 눈초리에 시달려야 하는 것이 더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종합적으로 결산을 해본다면 군사정권 시절이었기 때문에 장성출신으로 도움을 받 은 것 보다 시골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한 일이 더 많아서 그것을 극복하기가 무척 힘이 들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4. 땅을 일구며 우리 산의 밑자락 경계선은 2차선(현재 4차선) 광주-순천 간의 호남고속도로에 접해져 있 고 산의 아랫부분 약3만평은 어느 정도 경사가 완만했지만 중간 부분부터 높이 586m의 정 상까지는 지세가 험했다. 이 산은 골짜기마다 돌이 많았고 개간을 하기 전에는 편백나무가 약 5 만주 밤나무가 2 천주 가량 그리고 무수한 소나무가 심어져 있었고 잡목이 무성하게 퍼져 있었다. 이러한 여건에 있는 산지를 개간하여 초지를 만드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차량 이 진입할 수 있는 도로부터 만드는 일이 급선무였기 때문에 인부를 사서 사람의 힘으로 일 단 시작을 하기는 했지만 도저히 능률이 오르지 않아서 애를 먹고 있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내가 순천지역에 와서 산지를 개간한다는 소문을 듣고 옛 부하 이 승우 대위가 찾아왔 는데 그는 예편 후 광주에서 중기사업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내 사정을 알고서 연료와 기사 의 숙식만 제공하면 자기 장비로 작업을 해주겠다고 했다. 고맙게도 이승우의 도움으로 포 크레인이 들어와 파헤치자 1 주일만에 약 300m 가량의 도로를 개설할 수 있었다. 한편 잡목들을 전기톱과 예초기로 베어내고, 베어낸 잡목들을 한군데로 모아 불태우고, 땅 에 박힌 큰 돌들을 파낸 후에, 설계한대로 각 방목(放牧)구역에 철선으로 전기목책을 설치 하고 아울러 각 구역마다 소가 물을 먹을 수 있는 수도시설과 소를 한곳으로 몰아넣고 싣고 내리며, 또한 한 마리 씩 가두어 치료할 수 있는 시설들을 설치하는 작업을 전체 계획량의 약30%가량 완료했다. 그러나 거의 6개월이 걸려서 매일 10여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작업을 했어도 아직도 목장의 모습이 좀처럼 드러나지 않았다. 드디어 그 해 가을인 9월에 비료를 뿌리고 소가 뜯어먹을 일곱 가지 목초씨앗을 섞어 뿌리는 작업을 완료하였다. 매일같이 전투와 같은 작업을 하다보니 얼굴은 숯 덩이와 같이 검어지고 검정 색의 군화는 나무뿌리에 긁혀 흰색으로 변했고 손톱은 깎기도 전에 닳아 없어졌다. 나의 부하였던 몇몇이 우리 부부가 시골로 내려가서 고생을 많이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전방에서 우리를 찾아왔다가 자기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엄청나게 변해있는 우리의 몰골을 보고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그들이 흘리는 눈물의 의미를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어렵긴 해도 우리들의 제2인생에 대한 도전이고 푸른 초원에서 전원생활을 꿈꾸는 부푼 기대 때문에 힘 들어도 희망을 갖고 보람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들은 우리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 문에 단순히 지난 날 권위를 가지고 자기들을 지휘하던 지휘관이 초라한 시골 농군의 모습 으로 변한 것만 안쓰럽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언젠가 세월이 흘러 나를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오겠지 하는 생각이 들어 구태여 그들을 이해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하루는 웬 Jeep차가 목장으로 들어오기에 군청에서 누가 왔나 했더니 박 영윤 중령이 목장 에는 Jeep차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서울서 중고 Jeep차 1대를 구입해 가지고 타고 내려 왔다는 것이다. 그는 그 후로도 때때로 들려 필요하다 싶은 작업공구를 사다주는 등 여러 가지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한편 나를 아끼고 이 길로 들어서도록 인도해준 박 노영 대장 내외분이 서울대학교 수의과 대학 황우석 박사와 같이 우리를 방문하여 100만원의 격려금을 주시고 가신 것도 감격스러 웠고 크게 힘이 되었다. 5. 수선목장 83년 가을 나는 목장의 이름을 나의 이름 인수(麟壽)의 끝 자인 목숨 수(壽)와 아내의 이 름 봉선(鳳仙)의 끝 자인 신선 선(仙)을 따서 수선목장(壽仙牧場)이라고 지었다. 간판을 만들 기 위하여 광주에 나가서 붓글씨를 잘 쓰는 분에게서 글씨를 받아오고, 순천시내에 있는 제 재소에서 자연목으로 판자를 제재하여 만들었다. 목장의 진입로 입구와 고속도로 접경지역 에 마치 서부영화 'OK 목장의 결투'에 나오는 목장 입구에 세운 아치형 문과 같이 큰 나무 를 높이 세우고 가로로 걸친 나무의 중간에 간판을 매어 달아 놓고 보니 제법 그럴 듯 해 보였다. 이듬해 봄에 나는 해발 350m지점이 되는 산언덕에 조립식으로 주택 30평을 지었다. 서울 의 아파트와 같이 입식부엌을 겸한 큰 응접실 마루와 욕조와 샤워 시설이 된 화장실과 응접 실 한쪽 벽에는 벽난로(Fire Place)가 설치된 방 3개짜리 집을 내가 직접 설계했다. 우리 집 마당에서 내려다보이는 넓은 들판과 마을, 그 가운데로 죽 뻗은 고속도로, 산 바로 밑에 보이는 저수지의 풍경은 마치 한 폭의 풍경화 같았다. 더욱이 아침녘에 구름이 끼어 밑이 안보일 때는 구름 위로 삐죽 삐죽 솟아 올은 산봉우리들이 마치 운해(雲海)상에 떠 있 는 섬들 같아서 어떤 때 내가 구름 위에 떠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되기도 할 정도였다. 한편 자동차를 타고 고속도로로 지나가다 보면 한국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높은 산 중턱 에 빨간 지붕의 독립가옥을 보고 '누가 저기에 집을 지었을까?'하는 의문을 가질 만한 화젯 거리가 되기도 했다. 집이 완성되어 그 동안 쌓아 두었던 가구들을 배치하고 보니 서울의 아파트보다도 훨씬 좋았다. 하루 일을 끝마치고 약간 쌀쌀한 저녁 때 벽난로에 소나무 장작을 지펴놓고 커피를 한 잔 하면서 은은한 소나무의 향기를 맡으면 참으로 마음이 평안했다. 농장 생활은 힘이 들어도 집안에서나마 우리들의 생활환경이 제 모습으로 돌아오니 아내도 만족 해 했다. 우리 집이 1주일만에 세워지다보니 어느 날 돌연히 세워진 우리 집을 올려 다 보게 된 마 을사람들은 '아니? 어떻게 집을 서울서 옮겨 다 놓았나?' 라고 쑤군거리더니 집 구경을 하려 고 한 사람 두 사람 몰려 올라오기 시작하였다. 아내는 하도 말이 많은 시골이라 인심을 잃지 않아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오는 사람마다 친절하게 맞이하여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대접했더니 소문이 나서 한 달 동안 매일같이 한두 팀씩 올라와서 나중에는 오히려 성가실 지경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실제로 그들이 호텔 구경을 하고 하는 소리인지는 몰라도 어떤 사람들은 "야! 호텔보다 더 좋다"라고 해서 우리 부부는 마주 보고 몰래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 노인네는 수세식 좌변기를 보고 '저것은 무엇에 쓰는 것이냐?'고 묻자 목부가 '그것은 우리 장군님께서 앉아서 책을 읽는 곳입니다.'라고 농담을 해서 나중에 나는 목부에게 노인에게 농담을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집을 짓고 어머니를 서울서 모셔왔고 진숙이가 두 딸 정윤이와 자윤이를 데리고 와 있었으 며 정민이도 목장에 있을 때였다. 아랫마을에 5일마다 서는 시골장날에 장을 보러 온 가족 을 딸딸이에 태우고 내가 운전하여 내려가는 도중에 고리가 풀려 덤프가 들려 사람이 밑으 로 쏠려 쏟아버릴 뻔한 순간 바로잡아 사고를 면하는 일이 있었다. 또한 어느 천둥치는 날 목부가 화장실에 앉아 용변을 보다가 화장실 안의 세탁기에 연결한 아스선으로 벼락이 떨어지면서 벼락 치는 소리에 놀라 속옷도 걷어올리지 못하고 뛰어 나오 는 소동은 농촌이 아니면 보도 듣도 못하는 사건들일 것이다. 드디어 목장을 개간하기 시작한지 1년4개월 만인 4월 하순 도청 축산과로부터 미국에서 도 입한 헤어포드라는 육우 30두와 샤롤레라는 육우 2두를 할당받아 입식 하였다. 소를 전기목 책으로 둘러 친 방목구역에 넣었더니 낯선 곳에 도착한 탓인지 불안해하면서 어디론가 나갈 수 있는 틈새를 찾는 것 같았다. 몇몇 소들은 조심스럽게 전기목책 선으로 가서 조심스럽게 코를 전선에 대 보고는 짜릿하게 오는 전기에 놀라 뒤로 물러서곤 하였다. 소들은 체념한 듯 더 이상 전선을 넘을 생각을 안하고 그 구역에서만 풀을 뜯어먹고 지나는데 대략 그 효 력이 보름 정도는 가는 것 같았다. 해가 져서 어두워 졌을 때는 소들은 구역 내에서 가장 높은 한 장소로 모여 무리를 지어 앉아서 잠을 자는 것으로 보였다. 특이한 것은 그 중 한 마리의 소는 반듯이 일어나 서서 두리번거리는 것으로 보아 마치 군대에서 불침번 보초를 서는 것과 같아 보였다. 약 2주가 지났을 무렵 소 한 마리가 구역 내의 으슥한 골자기로 가더니 일어났다 앉았다 불안해하며 몹시 괴로워하였다. 나는 얼른 수의사를 불러와야겠다는 생각으로 집으로 뛰어 올라갔다. 아내는 혹시 새끼를 낳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고 하길 레 아내와 같이 그 장소 로 다시 돌아가 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이미 보를 쓴 새끼의 일부분이 나와 있었다. 어미 소는 다시 앉아 한숨을 쉬더니 다시 일어나 힘을 주어 새끼를 땅바닥에 쏟아냈다. 어미 소 가 자기의 혀로 보를 찢더니 새끼를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면서 양수에 젖은 새끼의 몸을 말끔히 닦아주어 새끼가 스스로 일어나 젖을 빨아먹게 하였다. 이렇게 나는 손도 대지 않은 체 한달 사이에 16마리의 소가 새끼를 낳았고 그 중 한 마리 만 사산하고 모두 다 자연 분만한 상태에서 새끼를 거느리고 다니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 웠다. 이론으로 배운 바는 있지만 우리는 소가 자연분만 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실제로 동 물의 생태를 아주 가까운 곳에서 관찰하니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도 있어서 현대인도 동물에 게서 이 세상을 사는 순리를 배워야할 점이 많다고 생각되었다. 소에 대하여 조금씩 알아 가면서 목장에 본격적으로 재미를 붙이려는 시점에 목장을 운영 하는 자금의 부족으로 재정적인 난관에 부닥치게 되었다. 아직 초지 조성은 계획된 넓이의 1/3에 불과해서 목초지는 보유한 소의 마리 수에 비하여 턱없이 부족하고 앞으로 개발해야할 초지 조성지역은 지형이 더욱 험하여 힘들고 예산도 더 많이 소요될 형편이었다. 유일한 개발 장비인 딸딸이 덤프트럭은 자주 고장이 나고 개발 및 운영자금은 바닥이 나는 등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이 가로놓여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제 2단계 목초지 조성을 계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 가지 궁리 끝에 부족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이란에서 귀국하여 대전에서 병원을 개업하여 성공한 주기선 박사를 찾아갔다. 주 박사 부부는 내 사정을 듣더니 4천만원을 선 득 내 주면서 언제든지 갚을 수 있을 때 갚으라고 했다. 평생 처음으로 내가 쓰기 위하여 남에게 돈을 빌려본 일이었기에 더욱 주 박사부부가 고맙게 느껴졌다. 역시 제2단계 개간 작업에서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목도(牧道)였는데 목도를 개설하는 데는 중장비가 필수적이고 중장비를 들여오려면 돈이 많이 들어 고심했다. 우연하게도 군청 산림과에서 임도(林道)개발 보조금이란 예산이 도청 산림과에 있음을 알게 되어 임도를 목도 와 같이 사용하면 일거양득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우리 산에 계획 조림된 약 5만주의 편 백나무의 관리를 위한 2km의 임도개설 보조금을 신청했다. 이 도로를 개설하는 과정에서 산지개발의 전문가인 김서정 노인의 헌신적인 도움과 삼립공 업사 황의병 사장의 장비지원의 도움으로 임도 2Km를 건설할 예산으로 목장 내에 약 4km 의 도로를 산의 8부까지 올라갈 수 있도록 개설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막혔던 개간 자 금의 숨통이 트이고 개간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조성한 목초지의 풀로서는 소먹이기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였다. 소 를 굶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보니, 아직 개간하지 않은 야생초가 있는 험한 지역으로 소를 풀어 방목을 하는 모험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나는 소가 험한 지역을 이동하면서 혹시 라도 다치는 사고가 일어나지 않을까 몹시도 마음을 졸였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소들은 유유히 산을 옆으로 타고 이동하다가 부득이 수직으로 이동해야 할 경우는 앞무릎을 꿇고 뛰어 오르면서 586m 고지 정상의 능선까지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 는데 다행히도 한 마리도 사고가 없었다. 집에서 한우 한두 마리씩만 키워 보던 마을 사람들은 내가 목장을 개간할 때부터 "저 험한 산을 개간해서 목장을 만들어? 거기서 소를 키우겠다고? 소를 한번도 키워보지 않은 사람이 하는 짓이지" 라며 말들이 많았다. 그런데 산 정상의 능선을 따라 이동하는 소 떼를 신기하 게 바라보다가 초가을 목초지가 자라 목초구역으로 내려올 때까지 한 마리의 사고도 없는 것을 보고서야 '야 ! 소를 저렇게도 키울 수 있구나!'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한다. 늦깎이 농군인 내가 결국 그들에게 소를 사육하는 방법에 대한 고정관념을 타파해 준 셈이 되었다. 마을사람들로부터도 농군으로 인정받은 우리 부부는 우리의 손으로 개간한 목장에서 한가 로이 풀을 뜯는 소를 보면서 아직 미완성이기는 했지만 우리가 계획했던 제2인생의 목표를 거의 완성한 것처럼 기뻐하고 흐뭇해했다. 그러나 이것은 얼마 안 있어 닥쳐올 소파동이라는 큰 시련을 전혀 예측하지 못한 잠시 스 쳐지나가는 행복이었을 뿐이다. 이 무렵 군에 있던 친지들에게서 내가 청와대에서는 알아주는 유명인사가 되었으나 예비역 장군들에게는 원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도대체 무슨 영문인가 했더니 S 대장이 예편신고를 하러 청와대에 들어갔을 때, 전두환 대통령이 S장군에게 "한인수 장군 이 예편하자마자 시골에 내려가 산지를 개간하여 목장을 개설하였다는데 S장군은 그렇게 할 뜻은 없으십니까? 예편한 장군들이 전부 청와대만 바라보고 있으니....."라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설마 '그럴 리가 있겠나? 누가 만들어낸 이야기이겠지.' 하고 있었는데 얼마 후 S장군 이 실제로 우리 목장을 찾아왔다. S장군은 산지개간 절차와 목장개설에 관한 여러 가지 사 항들을 나에게 물어보고 돌아가서 몇 개월 후 자기의 고향에서 국유림을 장기 임대하여 목 초지를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6. 소 파동으로 실업자가 된 부자(父子) 그 해 가을 약 2만평의 초지를 2단계로 개간하고 도입 육우 27두를 추가로 도입해서 소가 74두가 되어 우리의 꿈을 2/3는 이루었다고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우리의 최종 목표까지 다 다를 수 있을까 하고 고지의 정상을 탈환하듯이 모든 힘을 목장에 쏟아 부었다. 한편 우리부부가 너무 고생을 한다고 서울에 있던 큰아들 정민이가 나를 돕기 위하여 직장 도 그만두고 84년 봄 광주로 이사를 왔다. 며느리는 서울의 약국을 처분하고 광주시내에 약 국을 개업하고 정민은 산으로 올라와서 목장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부자가 힘을 모았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갑작스럽게 소 값이 폭락하기 시작하더니 종전의 2/3값으로 떨어 졌고 마침내 1/2값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바로 1984년 가을부터 시작된 소위 소파동이라는 것인데 원인은 당시 전두환의 친 동생인 전 경환이 새마을운동중앙회 회장을 하면서 농수산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농촌의 새마을회원들에게 무조건 도입 육우 2두식을 나누어주는 선심을 베풀기 위하여 어마어마한 수의 도입육우를 수입함으로 시작된 사건이었다. 원래 도입육우들은 한우와는 달리 넓은 목초지에서 자유로이 방목되는 거의 야생에 가까운 소들이었다. 이런 소들을 한우와 같이 집에 가두어 키우려니 소들이 병나서 죽고 주인을 떠 받아 사람이 다치는 등 다루기가 힘들었다. 더욱이 방목할 목초지가 없으니 비싼 곡물사료 를 먹일 수밖에 없고 사료를 사다가 먹이니 수지타산이 안 맞아서 농민들은 도입육우를 앞 다투어 시장에 내다 팔기 시작했다. 급기야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 깨져버리고 소 값이 폭락 하는 사태가 발생하고 만 것이다. 목장주의 입장에서 가장 힘든 일은 소들의 먹이인 푸른 풀이 없는 겨울철을 넘기는 것이 다. 부득이 겨울에는 짚을 암모니아로 부드럽게 삭혀 건초 대신 먹이면서 값비싼 곡물사료 를 구입하여 먹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아도 겨울나기가 어려운데 1984년도 겨울은 나에 게 너무나 큰 고통과 시련을 안겨다 주었다. 소는 생물이라 먹이지 않으면 죽으니 먹이지 않을 수 없고, 먹이자니 먹일수록 손해가 나서 운영자금이 부족한 우리도 다른 농부들처럼 손해를 보고라도 소를 팔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그 해 늦가을에 40두의 소를 정상가격보다 1/3의 손해를 보고 팔고, 그래도 '행여 나' 하는 미련이 남아서 나머지 34두만은 보유하고 월동을 해보기로 하였다. 그러나 4개월 이 지난 1985년 초봄에는 소 값이 더 떨어져 절반가격에도 못 미쳤고, 그 동안 월동하면서 먹인 사료 값을 합친다면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 셈이었다. 그러니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 어서 눈물을 머금고 나머지 소들을 처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배 고픈 것보다 소 배고픈 것에 더 신경을 써 가면서 자식 같이 애지중지하면서 키우던 소를 헐값에 팔아 치워 트럭에 실어 보내는 마음은 너무나 원통해서 결국 아내는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내 인생의 꿈이 산산조각으로 부셔버렸으니 억장이 무너져 내리고 분통이 터졌다. 농촌 사 정을 쥐뿔도 모르는 놈이 권력을 가지고 제멋대로 놀아난 탓에 거의 2년 동안 손톱이 닳도 록 일을 한 것이 물거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어디 우리뿐이랴? 얼마나 많은 농민이 손해를 보고 분통이 터졌겠는가? 생각하면 할수록 기가 막힌 일이었다. 부자(父子)가 돌연 실업자가 되어버려 큰아이는 가족이 있는 광주로 내려보냈는데 얼마 안 있어 다행히도 송정리에 있는 자동차 배터리 제조공장에 무역담당으로 취업이 되어 한시름 놓았다. 그러나 농장에 남아 있는 나는 힘들게 개간한 목초지에 소가 없어서 풀이 자랄 데로 자라 황폐해지는 텅 빈 목장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그야말로 속이 상해 미칠 지경이었다. 목장을 시작할 때 목장이 완성되면 소를 잡아서 각 부위별로 냉동고에 저장해 놓고 우리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맛보이며 소주잔이라도 나누어야겠다고 마음먹었었으나 목장이 거덜이 나버렸으니 그 꿈도 사라져 버리는 듯싶었다. 나는 기왕에 망하는 것 마음먹었던 일을 저질 러 버렸다. 약 350kg 나가는 소 한 마리를 잡아서 우리집안 식구들과 박 노영 대장님 내외 를 비롯한 여러 친지들을 여러 팀으로 나누어 차례로 우리 목장에 초청하여 쇠고기 잔치를 벌려 버렸다. 완전히 '홧김에 서방질' 한 꼴이었지만 마음먹었던 일 가운데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실행에 옮긴 셈이다. 7. 소 대신 염소 어느 날 아내가 "혹시 흑염소를 들여오면 어떻겠어요?"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염소 를 사들이면 자금도 적게 들고 사료 값이 거의 안 들어 사육하기가 쉽고, 자금회전도 빠르 고 아울러 염소가 풀을 뜯어먹으면 힘들여 조성한 목초지도 관리가 될 것 같았다. 염소를 키우는 것이 우리가 처한 입장에서 가장 적절한 대책이라고 생각되어 우리는 더 이 상의 개간 작업과 투자를 중단하고 소를 팔아 남은 자금으로 흑염소를 사 모으기 위해서 전 라북도 지역의 시골장의 구석까지 뒤져 103두를 입식 하였다. 처음으로 장에서 염소 30여 두를 사 모아서 트럭에 싣고 목부와 나는 Jeep차로 트럭 뒤를 따라 가는데 그만 Jeep차가 고장이 났다. 염소를 실은 트럭을 기다리게 할 수가 없어서 Jeep차를 수리해서 갈 터이니 트럭 운전사에게 먼저 가라고 했다. 차를 수리해서 목장에 도 착해 보니 난리가 벌어졌다. 사 가지고 온 염소는 간데없고 아내가 땅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참을 기다려도 내가 오지 않자 망할 녀석이 염소들을 차에서 내려놓고서 아내에게 이 큰 수놈만 잡고 있으면 다른 염소들은 절대로 도망가지 않으니 큰놈만 잘 잡고 계십시오."라고 하고는 가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운전사 말과는 달리 아내가 큰놈을 잡고 있는 동안 다른 염소들이 배가 고팠는지 풀을 뜯어먹기 위하여 사방으로 제멋대로 흩어져 버린 것이다. 아내는 큰일났다 싶어 혼자 서 그놈들을 잡아 모으느라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애가 타게 쫓아다녔지만, 혼자 힘으로 도저히 염소들을 모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염소를 쫓아다니느라고 지칠 데로 지친 데다가 "한 마리에 5만원씩 주고 사 들인 염소를 다 잃어버렸구나." 싶어서 아내는 드디어 울음이 터진 것이다. 사실 통곡 할 일까지는 아니라도 흩어진 염소들을 잡아들이는 것이 큰일이기는 했다. 그 날 밤 우리 부부와 목부는 전등을 들고 늦게까지 흩어진 염소를 잡으러 온 산을 헤 메고 돌 아다녀야 했다. 얼마나 밤새 고생을 했는지 이튿날 우리 부부는 말할 것도 없고 젊은 목부 조차도 온몸이 쑤셔서 일어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물론 우리는 염소들을 소와 같이 목초지와 야초 지를 이용하여 방목하는 방법을 채택하였 다. 그러나 염소들은 몸체가 적다보니 소의 크기에 맞추어 설치된 목책선 사이로 빠져나가 전기목책이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염소가 도망을 가지 못하게 하고 언제든지 필요한 때에 불러모으는 방법이 없을까' 하고 궁리를 하다가 중학교 생물시간에 배운 '파불의 조건반사 작용'이 생각이 나서, 집 가까운 곳에 염소 막을 짓고 염소 막 속에서 염소들이 좋아하는 사 료를 줄 때는 종을 쳐보았다. 이렇게 종을 치고 사료를 주는 일을 3일간 반복한 다음에 산 에 풀어 하루 종일 방목하다가 저녁에 종을 쳤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산에 흩어져 풀을 뜯고 있던 염소들이 '댕! 댕! 댕!' 하는 종소리를 듣고 염소들은 야초보다 맛이 있는 곡물사 료를 주는 것을 알고 산에서 내려와 막사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종소리를 듣고 온 산에 흩어져 있던 100여 마리가 여기저기서 몰려 내려와 도로에 이르러 서 일렬종대로 합치는 모양이 장관이었다. 실제로 이런 방법이 아니고는 그 넓은 산에 흩어 져 있는 염소를 관리할 수도 없고 필요할 때 잡을 수도 없었다. 매일 저녁에 막사로 불러 모은 염소를 점검하여 다친 놈이나 병든 놈 임신하여 곧 새끼를 낳을 놈들을 확인하면서 관 리를 하였다. 가끔 젖을 주지 않아 새끼가 죽어버리는 무정한 어미가 있어서 우리가 우유를 먹이는 등 애를 많이 써 보았지만 보람을 못 찾을 때는 몹시도 속이 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늦가을이 되자 염소의 수가 점차 줄어들기 시작하는 일이 벌어졌다. 늦가 을이 되어 점차 야초가 뻣뻣해지자 염소가 더 좋은 풀을 찾아 우리 산을 넘어 멀리 가서 저 녁종 소리를 듣지 못하여 돌아오지를 못했기 때문이었다. 길을 잃어버린 염소는 돌아다니다 남의 동네 사람에게 잡혀 먹히기도 했다. 나중에 이웃 동네 사람들이 '한 장군내 염소로 몸 보신 잘했다'는 소문이 들렸지만 잡아먹은 사람을 찾아서 염소 값을 받아 낼 수도 없었다. 나는 서둘러 염소들이 우리 산 밖으로 빠져나갈 수 없도록 우리 산의 경계에 따라 전기목책 선에 붙여서 1.5m높이로 뺑 둘러서 철망을 쳤다. 돈이 많이 들어갔지만 그렇게 하고 나서야 우리 염소로 이웃 동네 사람 몸보신을 시키는 것을 막을 수가 있었다. 봄철이 되자 염소들이 새끼를 낳기 시작하였는데 산에서 낳아 이삼일간 데리고 있다가 내 려오는데, 새끼들이 어미염소를 졸졸 따라 다니는 모습은 정말 귀여웠다. 어미염소들은 두 마리를 낳는 놈들이 대부분이었고 세 마리까지 낳는 수도 있어서 새끼를 낳기 시작하자 약 한 달 사이에 염소의 수가 거의 배로 불어나서 200 마리가 되었다. 염소가 늘어나자 겨울철에는 15만평의 풀도 부족해서 나중에는 염소들이 우리 산에 계획 조림되어 있던 편벽나무 껍질까지 베껴서 먹기 시작했다. 원래 염소는 바위틈의 풀까지 뜯 어먹고 사는 동물이라 겨울에는 약간의 영양가 있는 사료를 보급해 주면 별 문제가 아니었 다. 특별히 우리 산에는 한약재로 쓰이는 삼지구엽초(三枝九葉草)라는 약초가 많이 자랐기 때문 에 자연방목으로 약초를 먹고 자란 우리 목장의 염소가 좋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하여 사방 에서 염소를 사러왔다. 5만원에 사다가 약6개월 동안을 키워서 15만원에서 20만원을 받으면 괜찮은 편이었다. 우 리는 소 파동으로 입은 손해를 전부 회복하지는 못하였으나 다소 보충을 할 수 있었고 염소 를 키우면서 재미를 느껴 소 파동으로 겪었던 진통에서 조금은 헤어날 수가 있었다. 한편 내 처지가 소 파동으로 비통한 상황에 이르게 되자 전라남도 축산과에서는 이미 조 성한 목초지를 이용하여 우유를 생산하는 사업으로 전환할 것을 권유하면서 국립 종축장에 서 할당받은 우량종의 유우(乳牛) 송아지 2두를 배당해 주었다. 나는 안산에 있는 국립 종축장(種畜場)으로 가서 직접 인수해왔는데 송아지는 낳은 지 두 달도 채 안된 놈들로 참으로 귀여웠다. 집 앞에 조그마한 2마리용 우사(牛舍)를 짓고 우리 부부는 그놈들을 우리의 희망의 상징으로 여기고 아내가 직접 우유를 먹여 키웠다. 우량종 이 되어서인지 6개월을 키웠더니 200kg 이상이 나가는 중소가 되었다. 이놈들은 우리가 외출하였다가 돌아오면 Jeep차 소리를 듣고는 길 쪽으로 달려와서 아내가 차에서 내려 목책 안으로 들어가 쓰다듬어주면 마치 개가 주인을 반기듯 혀로 아내를 핥아 서 옷을 버려놓곤 하였다. 아마도 자기들에게 우유를 먹여 주는 아내를 어미로 기억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놈들이 얼마 후 파이로 라는 병에 걸려 주저앉아서 신음하게 되였다. 이 병은 진 드기가 옮기는 병균으로 인해 소의 피가 묽어져 죽게 되는 병이다.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살려야 되겠다는 일념으로 수의사를 불러 응급조치를 하는 동시에 소 도축장에 직접 가서 소의 피를 받아 수혈시키는 한편 비행기로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황우석 박사를 내려오게 하는 등 최선을 다 해 보았으나 결국 애쓴 보람도 없이 두 마리 다 잃고 말았다. 나는 그놈들을 우리 산에 묻으면서 우리의 희망을 묻어버리는 것 같아 참담한 기분이었다. 비록 소 2 마리를 잃은 것이었지만 아마 이 때가 목장을 하면서 정신적으로는 가장 큰 충격 을 받았던 때가 아니었나 싶다. 이렇게 4년간 목장을 운영하면서 시련을 겪다보니 목장을 계속해야할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되고 혹시 우리가 제2인생의 길을 잘못 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가져 보게 되었다. 그러나 역시 이 일은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고 원하던 푸른 초원을 내 손으로 만들 어 전원생활을 하면서 정신적 및 육체적 건강을 지킬 수 있었다는 것으로 잘못된 선택이 아 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8. 국정감사에서의 입씨름 1986년 2월의 어느 날 뜻밖에 주이란 한국대사관에서 공보관으로 나와 함께 근무했던 김 00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10년이 넘도록 피차에 소식이 끊겼던 차라 너무 반가워서 서로 가족들의 안부를 확인하는 등 한참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갑자기 김00이 "한 형 그 동안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이제 서울로 올라오셔야 되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그게 무슨 소리요?" "사실은 제가 총무처 차관으로 봉직하고 있습니다." "아! 그래요? 축하합니다. 그거 아주 잘 됐군요." "한 형도 아시다시피 총무처에서 예비역 장군들의 취업 문제를 담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래서 제가 이렇게 한 형을 찾게 된 것입니다. 한 형에게는 특별히 몇 개의 국영기업체 이사 자리 중 선택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조속히 상경하여 의논하시지요"라고 하 는 것이었다. 그제야 나는 그가 갑자기 전화를 하게 된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나는 그에게 "비록 소 파동을 만나 소를 다 팔아 지금은 소 없는 목장이기는 하지만 내 손 톱이 깎기도 전에 닳아 없어질 정도로 고생해서 일구어 놓은 내 땅에 대한 미련 때문에도 이곳을 떠날 수가 없으며, 또한 서울에 있는 아파트를 팔아 내 발로 시골에 내려온 처지이 다 보니 서울에 집도 없어 올라 갈 수 없습니다" 라고 했다. 사실 나의 온 정성과 땀을 흘려 개발된 목장에 대한 애착은 무엇과도 밖을 수 없는 귀중한 것이었다. 김 차관은 나의 이야기를 듣고 납득하는 듯하여 그 날의 통화를 끝맺었다. 그런데 3일 후 박 OO장관에게서 전화가 왔다. 박 장관은 나와 같이 6군단예하 사단 작전참모를 하던 절친 한 사이었다. 그는 목장을 일정기간 임대해 주고 서울로 올아 와 취업을 하면 안 되겠느냐? 고 했다. 나는 특별히 배려해주는 것은 고맙지만 지금은 서울로 올라갈 생각이 없으니, 내 몫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도 괜찮다고 했다. 2주가 지났을 무렵 또다시 김 차관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의 생각과 뜻은 잘 알겠으나, 계속 취업제의를 거절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다. 그러니 지 금 목장을 떠날 수 없다면 목장을 관리하면서 일을 할 수 있는 가까운 순천직업훈련원 원장 으로 취임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이것은 박 장관의 제의이니 박 장관의 체면을 보아서라도 받아드려 주는 것이 좋겠다. 라는 것이었다. 나는 훈련원장이 교육 직 이라는데 관심이 쏠려 아내와 상의 한 후에 답을 해주기로 하고 일단 통화를 끝냈다. 나는 직업훈련원이란 곳이 어떤 교육기관인지 전연 아는 바도 없었고 대부분이 예비역 장 군들이 원장으로 있다고 하는 것조차도 몰랐었다. 아내와 상의를 하고 보니 교육기관의 장으로 있으면서 목장을 관리할 수 있다면 굳이 거부 할 필요가 없고 또한 직업훈련원이란 곳이 어려운 가정환경으로 더 이상 상급학교에 진학하 지 못한 청소년들을 모집하여 기술을 가르쳐 산업일꾼으로 양성해 내는 교육기관이라니 보 람도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사실은 때 마침 소 없이 염소만을 키우다 보니 더 이상 산지를 개발할 필요가 없어 목장에 서 내가 할 일이 별로 없기도 했다. 1986년 3월 14일 아침 목장은 목부에게 맡겨놓고 우리 부부는 필요한 물건만 챙겨 찦차 의 트레일러에 싣고 순천직업훈련원으로 출발하였다. 이날의 출발은 군대의 공직생활을 마친지 4년 만에 다시 공직생활을 시작하는 출발이었다. 원장의 이 취임식에는 의외로 전라남도 부지사와 순천시장과 기관장들이 내빈으로 참석한 것을 보니 그 당시 훈련원은 순천 시에서는 인정되는 하나의 기관이었던 것 같다. 직업훈련원은 1965년도에 박정희 대통령이 서독을 방문했다가 독일의 기술교육제도에 감명 을 받고 도입해 들인 제도로서 우리나라의 공업입국을 위하여 필요한 산업인력인 기능인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 처음에 독일 정부의 후원을 받아 부산에 한독직업훈련원을 세운 것 을 비롯해서 각 도에 1,2개식을 설립한 것이었다. 그러한 연유로 창설 당시 원장은 대부분 예비역 장군들로 임명되었고 교직원을 위해 건립한 아파트는 순천시의 제1호 아파트일 정도 였다. 박 대통령이 지대한 관심을 갖는 분야이고 보니 당시 지방행정기관장들도 직업훈련원에 대 한 관심을 접어 둘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분위기였을 것이다. 순천훈련원은 전라남도 지역에서 더 이상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직업전선에 나서야 하는 약 300명의 청소년들을 선발하여 용접공과, 배관공과, 기계공작공과 및 기계조립공과 로 나누어 1년 과정으로 국가기술자격 2급 기능사로 양성하고 있었다. 훈련원생들의 대부분이 가난하거나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지나온 청소년들이었다. 나는 훈 련원의 원장으로서 그들을 잘 돌보아 주고 훈련을 잘 시켜 우수한 기능인으로 양성해 낼뿐 만이 아니라 그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국가에 봉사하는 길이라 고 생각하였다. 원장으로 부임하여 약 1개월이 지난 어느 날 나는 불시에 전 훈련원생을 강당에 집합시켰 다. 예정에 없던 갑작스런 소집에 원생들은 무슨 일인가해서 불안한 표정이었다. 훈련생들에 게 백지 한 장식을 나누어주고 그 동안 느꼈거나 당했던 애로사항이나 앞으로 시정되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사항들과 아울러 앞으로 이루어졌으면 하는 희망사항 등등을 적어 내도 록 했다. 훈련원생들이 적어 내놓은 것들을 종합하고 보니 군대의 내무반에서 일어나는 문제점보다 도 더 심각한 문제들이 기숙사 생활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훈련원생들은 중학교를 막 졸업한 나이로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한 연령 심지어는 군복무를 끝마친 층으로 격차가 심했기 때문에 나이가 많고 힘 있는 훈련생이 나이 어린 훈련생들을 상대로 구타, 억압, 금품갈취, 공포분위기 조성, 심부름시키기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취침시 간에 나이 어린 훈련생을 끼고 자는 아동 성 학대에 해당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었던 것 이다. 나는 3일 후 다시 전 훈련원생과 전 교직원을 한자리에 집합시켰다. 이번에는 훈련생들이 지난번에 자기들이 써낸 것에 대하여 어떤 결과가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 비상한 관심을 가 지는 듯 했다. 나는 소원수리에서 나온 훈련원 내의 심각한 문제점을 종합하고 분석해서 설 명한 다음에 앞으로 나이 많은 사람이 어린 사람을 상대로 벌이는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비인간적인 행위는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나서 시설보수를 비 롯한 제도 및 규정의 변경 등 120여 가지나 되는 훈련생들의 요구사항을 하나씩 들어서 가 능한 것은 빠른 시일 내에 실행에 옮기겠다고 약속하고, 불가능한 것은 왜 불가능한 것인가 를 설명해주었다. 당장에 그 다음 날부터 빠른 속도로 할 수 있는 것들은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고 기숙사 생 활에서 문제를 계속 일으키는 고질적인 훈련원생 10여명을 퇴학처분 시켰다. 이렇게 하고 나니 훈련원의 분위기가 새롭게 되고 훈련생들이 원장을 신뢰를 하는 듯한 분위기를 느낄 수가 있었다. 2개월이 지날 무렵부터 나는 교육훈련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쏟기 시작하여 교사의 자질향 상과 윤리 그리고 학습의 동기 및 과정 등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교육내용과 훈련방법 등은 교사에게 일임하고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 나는 훈련원의 모든 역량을 좋은 훈련여건을 조성하는데 주력하는 한편 훈련생들과 교사들 의 복지를 위한 시설의 개 보수 및 확충에 노력하였다. 교사 아파트의 난방시설을 공탄에서 심야전기 온돌로 개조하고 부족한 급수문제를 해결하고 비록 16년 전에는 교사들의 자가용 차가 한 대도 없었지만 앞날을 내다보고 주차장까지 확보해 두었다. 훈련원생의 학비는 전액이 국비로 충당되지만 식비는 국비로 일인당 3천5백 원을 지원하고 나머지는 본인이 부담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개인부담인 식비 월 2만 5천원 마저도 부 담하기 어려운 훈련생들이 약 5%가 되었다. 이 극빈 훈련생의 식비는 훈련원장의 책임 하에 지역의 유관기업체로부터 장학금을 지원 받는 방법으로 해결하고 있었다. 그러나 처음 시작 과는 달리 장학금을 기분 좋게 시기에 맞추어 정기적으로 제 때에 지원하는 기업체는 별로 없어서 매월 장학금을 걷으러 다니는 경리계 직원의 애로사항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나는 간부회의에서 도저히 훈련원의 체면이 안서는 구걸식 장학금 거출을 중단하고 앞으로 장학금의 참뜻을 이해하여 자진해서 지원하는 기업체 두 곳과 훈련원의 주거래은행인 기업 은행지점 외에는 모금을 하지 않기로 했다. 그 대신 부족한 17만 5천원은 나를 포함한 우리 교직원이 지원하기로 합의를 했다. 공단 본부로부터 우리 훈련원이 국회의 노동 분과위원회에서 실시하는 국정감사의 대상으 로 선정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모두들 크게 걱정을 했다. 우리 훈련원으로서는 국정감사라는 것을 받아 본 적도 없다보니 훈련원 간부들은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할지를 몰라 당황해서 우 왕좌왕하는 형편이었다. 나도 국정감사라는 것을 받아 본적은 없지만 군에 있을 때 크고 많은 검열과 감사를 받아 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훈련원 정도의 조그마한 기관에 대하여 국회 차원의 감사를 한다는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감사를 받는다기보다 오히려 훈련원의 어 려운 상황을 국회의원들에게 사실대로 보여주어 여러 가지 애로사항들을 타결하는 좋은 기 회로 이용해야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나는 훈련원 주간정기회의에서 국정감사를 받을 준비를 하는 지침을 아주 간단하게 다음과 같이 하달하였다. "국정감사요원들에게 제출할 훈련원의 현황보고서는 최신의 자료로 감사 3일 전까지 작성 하고 감사장은 마이크만 추가로 준비해서 현재의 회의장을 사용하자. 기숙사 및 식당을 돌 아볼 것을 예상해서 청소를 하되 별도의 특별 청소 등의 소란은 피우지 말고 훈련원의 평상 시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자. 그리고 이 기회에 훈련원의 애로사항을 제시하여 훈련원 운영 의 고충을 알리고, 어려운 중에서도 우리들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음을 인지시키는 방 향으로 준비해 주기 바란다." 공단본부에서는 훈련원이 국감 준비를 잘 하고 있는지 미덥지가 않아서인지 훈련이사와 기 획과장을 하루 전에 훈련원으로 내려보냈다. 그들은 회의장 비품이 초라하니 교환하거나 임시로 시에서라도 빌려다 쓰는 것이 어떠냐? 국회의원들이 훈련생들에게 질문을 할 것에 대비해서 훈련생들에게 답변교육을 시켰는가? 국회의원들의 식사를 별도로 밖에다 준비하였는가? 등등으로 시시콜콜하게 간섭을 하려했 다. 그러나 그런 의견들은 근본적으로 나의 생각과 다른 것들이라 나는 내 방침대로 처리하 였다. 드디어 1988년 10월 12일 아침 9시30분부터 국정감사가 시작되었다. 내가 먼저 훈련원 현 황을 보고하고 이어서 질의응답에 들어갔는데 국감의 주안점이 훈련생들의 식비관리와 훈련 생의 대우 문제에 있는 것 같았다. 이 의원(민정): "훈련생 식비는 어떻게 처리되고 있습니까?" 한인수 원장: "한달 식비는 2만8천5백 원으로서 훈련생이 부담이 월 2만5천원이고 정부보 조금액이 3천5백 원으로 한 끼니 식대는 3백16원입니다." 이 의원(평민): "3,250cal 열량 기준으로 급식한다고 하였는데 그 액수로 어떻게 기준 열량 을 유지 할 수 있습니까?" 원장 : "무척 어렵습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여 현재는 기준열량을 유지 급식하고 있습니다. 의원님들께서 내년도 식비보조금 인상을 조치해 주실 것을 믿습 니 다." 이 의원(민정): "훈련장비의 질적 개선을 건의한 적이 있습니까?" 원장 : "건의는 수시로 하고 있으나, 요구 량의 20%정도만 해결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갑자기 이 의원(평민)이 원장 개인 신상에 대한 질문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이 의원(평민): "원장께서 언제 부임했습니까?" 원장 : "86년 3월 14일 부임함으로서 1년7개월이 되었습니다." 이 의원(평민): "원장부임 전 경력을 말씀해 주십시오." 원장: "6.25 당시 전시 사관학교인 육군종합학교 30기로 임관해서 장군으로 승진 후 기갑여단장, 사관학교 교수부장, 역임하고 군복무 32년만인 82년에 예 편했습니다." 이 의원(평민) "원장으로 임명된 과정을 밝혀주십시오" 원장 : "저는 예편하자마자 순천근처 내려와서 산지를 개발 목장을 만들어 운영하 여 왔으나 3년 만에 소 파동으로 실업자가 되었는데 어느 날 총무처에서 순천직업훈련원장을 맡아 달라고 권유하여 부임하였습니다." 이 의원(민정): "어떻게 그런 식으로 임용될 수가 있습니까? 그것이 사실인가요?" 원장 : "네. 사실입니다. 저는 원래 공직에 재 임용되는데 뜻이 없었습니다." 이 의원(평민) "말도 안 된다. 86년 당시 군 출신 임용계획과 관련이 있는 것인가요?" 원장 : "그것은 저로서 알 수 없는 사항입니다." 이 의원(평민): "원장은 스스로 기갑여단장 경험이 훈련원장 직무수행에 어떻게 도움이 된 다고 생각하십니까?" 원장 : "저는 군에서 오랜 기간을 교육 직에서 근무했습니다. 즉 기갑학교와 육군대 학 교관, 사관학교 교수부장을 역임했습니다. 또한 기갑여단장은 5천명 이 상의 병력과 1천대가 넘는 전투차량과 장비, 1조원에 가까운 자산을 관리 하는 관리자입니다. 훈련원은 기갑여단에 비한다면 1/20도 안 되는 소규모 의 교육훈련 기관입니다. 외람 되지만 저의 견해로서는 충분히 도움이 된 다 고 생각합니다." 이 대목에서 뒤에서 취재하던 기자들이 "킥! 킥!"거리고 웃는 소동이 벌어졌다. 야당의 이 의원(평민)은 이번 기회에 당시 대부분의 직업훈련원장들이 군 출신들로 임명되는 점을 들춰 내 보려고 벼르고 나를 상대로 입씨름을 벌였는데 유감스럽게도 기자들의 눈에 상대를 잘못 만난 것 같아 보인 것이다. 내가 이 의원의 질문을 맛 받아쳐서 분위기가 어색하게 되자 노동 분과위원장인 장 의원이 얼른 말을 돌려 "훈련생들의 영양 및 건강상태가 잘 유지되도록 차질 없이 예산을 집행해 주시오. 다음으로 기숙사와 식당 훈련교실을 보기로 하십시다. 그러면 국정감사 질의응답은 이상으로 끝을 맺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의사 봉을 처 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안내의 말씀으로 "이제 점심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훈련원 시설을 돌아보신 후에 훈련 생들과 같이 식사를 해 주시면 훈련생들의 사기앙양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라고 했다. 국회의원들은 훈련원 시설을 돌아 본 다음에 훈련생 식당으로 안내되었다. 나는 훈련생들 에게 국회의원들을 소개하면서 "국회의원님들께서 여러분의 식비보조금이 부족한 것을 확인 하시고 내년도에 식비 지원금을 인상하도록 예산을 조치 해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해버렸다. 나는 내친 김에 거기에다 한 가지를 더 덧붙였다. "오늘 국회의원님들께서 여러분들의 식사 를 축내시게 되셨으니 아마도 밥값을 지불하고 가시리라고 믿습니다." 하였더니 이번에는 훈 련원생들이 식탁을 두드리며 박수를 쳐댔다. 내가 갑자기 전혀 예정에 없던 밥값 이야기를 꺼내자 위원장인 장 의원은 당황해서 식사를 하는 동안에 비서를 시켜 급히 봉투를 마련하여 식사가 끝난 다음에 훈련생들 앞에서 50 만 원을 전달하였다. 그날 국회의원들은 보리가 섞인 훈련생의 밥 한 끼를 먹고 50만원을 냈으니 가장 비싸고 맛없는 식사를 했을 것이다. 다음 날 전라남도 지방신문인 광주일보와 무등일보의 1면과 3면의 국감중계 난에는 "우리 는 잘하고 있습니다." 라는 기사 제목 밑에 훈련원의 국정감사 현장사진과 함께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렸다. "12일 노동위 순천직업훈련원 감사에서 이 의원(평민)의 맹공격에도 자신 있는 답변을 하고 있는 한인수 원장과는 달리 뒤에 있는 훈련원 간부직원들의 표정은 느긋하지만 은 않다." 한편 공단 본부에서도 염려하고 있었던 군 출신 원장임명 문제에 대하여 적절하게 대처하 고 훈련생 식비 보조금의 인상의 필요성 등을 명쾌하게 제기하여 예상외로 효과를 얻었다고 생각한 공단본부에서는 크게 고마워했다. 그리고 한편 우리 훈련원의 국감준비가 미덥지 않 아 파견했던 간부 두 사람의 입은 다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듬해 훈련생들의 식비보조금이 추가예산조치로 1인당 5000원 씩 인상된 것은 당연한 국 감의 소득이었다. 9. 광주와의 인연 어느 날 공단본부에서 나를 광주훈련원장으로 전보발령을 내야겠다는 연락이 왔다. 그러 나 나는 목장 때문에 순천 훈련원을 맡은 것이기 때문에 순천훈련원에서 임기를 마치기를 원한다고 했다. 본부에서는 광주훈련원이 1급기능사를 양성하는 2년제 전문훈련원으로서 일반훈련원인 순 천훈련원에 비하면 한 단계 격이 높고 규모도 2배정도 큰 기관이기 때문에 당연히 내가 영 전으로 생각하고 동의할 것으로 생각했다가 내가 고사하자 처음에 의아하게 생각했다. 결국 나는 어려운 상황에서 같이 사명감을 갖고 일을 해 보자고 하는 본부 이사장의 간곡 한 설득을 받아들여 1988년 11월 26일 광주직업훈련원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광주직업훈련원(현재 광주 기능대학)은 전라남도뿐만이 아니라 전라북도와 일부 경상남도 지역의 고등학교 졸업자 이상을 선발하여 전기, 전자, 금형, 금속, 열처리, 기계, 용접공과에 서 1급기능사를 양성하는 기관이었다. 순천훈련원과는 달리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해야 하는 제도가 아니고 훈련생들의 연령 격차가 심하지 않아 기숙사의 문제점은 없었으나 훈련생들 의 자율의식과 책임감이 결여된 것이 문제였다. 공과의 교과내용을 검토해보니 산업체의 기술이 빠른 속도로 변화되고 발전하는데 비해 너 무나도 뒤떨어져 있었다. 그런 사실을 교사들과 간부들이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상 급기관에서 지시가 내려지지 않은 이상 지금까지의 관행을 답습할 뿐이었다. 나는 교사들에게 산업체에 뒤떨어지지 않기 위한 연구와 발전이 없다면 머지않아 훈련원이 설자리가 없어질지도 모른다고 강조하고 산업체에서 필요로 하는 발전된 기술을 가르칠 수 있도록 교과내용을 개선하는 작업을 개시했다. 즉, 전자공과는 Micro Process, 전기공과는 PLC분야, 기계공과와 금형공과는 CAD/CAM,, 열처리공과는 재래식 열처리에서 진공열처리 및 고주파열처리, 금속공과는 단순 용해로부터 분석 그리고 용접공과는 Robot 용접과 비파 괴 실험법 등 신 기술과목을 교육시킬 계획을 세웠다. 나는 공단 훈련이사와 이사장에게 전문과정의 교과내용의 향상대책을 보고하고 예산의 집 행을 건의했다. 그 결과 첫 해에 Robot용접기 1대를 구입할 수 있는 예산을 배정 받았고 그 이듬해에는 당시 금액으로 1억원이 넘는 진공열처리로를 위한 예산을 배정 받았다. 진공열 처리로의 사용법을 배우기 위해서 훈련부장과 열처리공과장을 제조공장이 있는 미국으로 보 내서 실습을 시켰다. 특별히 1989년도 말부터는 당시 최첨단 기능분야라고 할 수 있는 CAD/CAM 공과로의 변 경을 위한 교사교육과 시설 및 장비의 도입 업무에 나의 온 정열을 다 쏟아 부었다. 장비구 입에만도 17억 원의 예산이 투입되었다. 80년대 말은 도처에서 노동조합이 결성되어 사용자와 노조의 갈등이 대두되기 시작하는 시 기였다. 이런 분위기는 훈련기관도 예외가 아니어서 내가 광주훈련원에 전보되고 얼마 안 있어 직업훈련관리공단에도 노동조합이 결성되고 훈련원에도 지부가 설치되었다. 나는 근본적으로 교사들이 노조원이 된다는 것에 동의할 수가 없었으나 공단본부가 승인하 여 지부가 훈련원에 설치된 것이니 어쩔 방법이 없었다. 나는 노조원들에게 합법적인 노조 활동과 권리는 인정하겠지만 그 대신 교사들이 지켜야 할 의무조항을 먼저 지켜줄 것을 주 문했다. 특별히 노조활동이 교육훈련의 진행에 어떠한 지장도 주어서도 안 된다고 강조했기 때문에 우리 훈련원의 노조는 비교적 유연했다. 어느 날 공단 노조위원장이 노조지부가 설치된 각 훈련원을 방문한다는 공문이 날라 왔다. 어떤 훈련원에서는 노조위원장의 방문에 대비하여 청소를 하고 원장이 몸소 현관에 나가서 맞이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나는 노조위원장의 방문을 받아 훈련원에서의 노조활동 은 피교육자인 훈련생이 있음으로 공단본부와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 후 1년여 동안 노조의 활동이 극렬해지면서 그 때마다 나와 훈련원 노조지부장은 물론 공단본부 황 노조위원장과 심한 마찰이 일어났지만, 1년 반이 지나 황 노조위원장이 교체되 어 평교사로 복귀한 그는 내가 있는 광주훈련원을 희망하였고 나는 그를 받아 들였다. 한편 1990년도 과정부터 전기, 전자 및 CAD/CAM공과에 여학생을 처음으로 받아들이기 시 작하였다. 여학생의 숫자가 몇 명되지는 않았지만 일단 남자들만 생활하던 공간에 여자가 들어온다는 것은 기숙사를 비롯한 시설변경 및 제도의 수정 등 신경을 써야 하는 일이 꽤나 많았다. 무엇보다 학과 후 시간에 훈련생들을 관리 지도할 유능한 사감이 필요로 하였다. 나는 현재의 사감이 적당치 않다고 판단해서 적임자를 수소문해서 알아본 다음 유능하다고 알려진 사감을 지명해서 공단본부에 사감의 교체를 요청하였다. 그런데 공단본부 인사과장 이 정 반대로 가장 무능하고 말썽이 많은 사감을 우리 훈련원으로 발령을 냈다. 나로서는 고의적으로 나를 골탕 먹이려는 짓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은 비교적 공정한 군대의 행정과 비교해서 우유부단하며 비합리적이고 상급기관으 로서 권한만 행사하려 하고 예하 기관을 지원하는데 인색한 공단본부의 행태에 대하여 평소 에 내가 가지고 있던 불만에 도화선을 붙인 꼴이 되었다. 나는 사표를 써서 호주머니에 넣고 즉시 비행기로 상경하여 이사장에게 그간의 경과와 증 거가 될 서면공문을 제시하고 사표를 제출하면서 이런 행태의 공조직(公組職)이라면 더 이상 머물러 일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했다. 이사장은 나의 뜻을 잘 이해하겠으나 교사들의 인사결재는 기획이사 전결사항이므로 확인 하여 조치하겠으니 사표는 철회하고 돌아가 결과를 기다리라고 했다. 이튿날 이사장으로부터 내가 요청한 사감을 발령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인사실무자는 각 훈련원에서 하도 많은 개인적인 인사 청탁을 해오기 때문에 깊이 생각하지 않고 인사명령을 냈었다는 말도 되지 않는 변명을 했다. 상명하복 관계가 가장 엄격한 군대에서도 있을 수 없는 무조건적인 복종만을 강요하는 잘 못된 관행에 대하여 그 때까지 아무도 시정을 위한 요구를 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사감 인사에 대하여 일단 내 뜻이 관철되자 공단본부 실무자들 사이에서는 잘못된 관행에 대한 반성은커녕 오히려 나를 손을 봐 주어야겠다는 여론이 조성되었다. 나는 당장이라도 이 조직에서 떠나고 싶은 생각이 마음속에서 일어났지만 6년 임기에 1년 6개월 정도 남아 있는 시점이라 잘못해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퇴출당했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 임기는 채우기로 마음먹었다. 임기 6년이 마감되기 2개월 전인 1992년 1월말 경 노조분쟁으로 창원기능대학의 기능이 정지된 상태에 이르자 이 이사장은 창원기능대학의 정상회복을 위하여 임기 2년을 연장하여 창원기능대학 장으로 내가 근무해 줄 것을 권유하였다. 이사장이 파격적으로 공단의 인사규 정을 고쳐가면서까지 특별하게 나를 인정하고 배려하는 것은 고마웠지만 나의 마음은 이 조 직에서 이미 떠나 있었기 때문에 그의 제안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1992년 3월 13일 순천훈련원장 2년 8개월과 광주훈련원 3년 4개월을 합해서 만 6년간의 원장 임기를 끝으로 모든 공직을 끝마쳤다. 이 기간에 나에게 맡겨졌던 직무는 직업훈련원의 상급기관인 산업인력관리공단이라는 불합 리하고 비능률적인 운영 때문에 그리 명예롭거나 즐거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는 청소년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고 기술을 가르쳐 성실 하고 우수한 기능사로 양성하여 배출하고자 노력한 교육자로서의 보람은 지금까지도 간직하 고 있다. 제7부: 황혼을 맞이하여 1. 황혼 어느 날, 나는 아주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에게 당뇨병이 발생하여 관리를 잘 해 야 한다는 사실과 잇몸 관리를 잘 못하여 대부분의 이들을 뽑아내고 부득이 틀니를 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들은 내 몸도 어느 듯 퇴화되어 황혼기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하는 것이었다. 나 역시 남은여생을 무의미하게 지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노년의 생활을 의미 있게 사는 것일 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마음 을 비우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결국 나는 나름대로 노년의 생활을 위한 기본생활 방법을 다음과 같이 구상해 보게 되었다. 첫째로 건강하게 살자, 살아 있는 동안은 스스로 건강관리를 잘하여 자식들에게나 남에게 폐가 되지 않게 하자. 둘째로 즐겁게 살자, 여건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한, 즐 기면서 살아가는 삶을 살아 보자. 셋째로 보람되게 살자, 남과 나를 위하여 보람된 일을 찾아 실행하는 삶을 살아보자. 나는 정년퇴임 후 전라남도 순천시에 마련한 아파트로 이사를 하였다. 내가 노년에 살 곳 을 정하는데 있어 자식들과 일가친척 그리고 친지들이 있는 서울이 아닌 먼 남쪽 순천으로 정하였다. 그 이유는 내가 목장으로 개간한 땅이 순천근처에 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겠 으나, 그것보다 더 큰 이유는 건강관리를 위한 운동을 하기 용이한 곳과, 좋은 친구 황의병 (黃義柄) 사장과 같이 살고 싶어서였다. 황 사장은 내가 목장을 개간하기 위하여 이곳 순천지역으로 내려온 1983년 초부터 사귀게 된 친구인데 순천시내에 있는 삼립공업사라는 자동차 정비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중 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어린 시절 고향인 전라남도 장흥에서 단 신으로 순천으로 나와 자수성가한 인물이다. 그는 나와 취미도 다르고 생활습성이 틀리며, 무척이나 완고하였고 자수성가한 사람답게 고집이 왕고집이었다. 그와 나는 누가 보아도 물과 기름 같이 보여 도저히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이 보였다. 하지만 우리는 이상하게도 서로 잘 어울렸다. 그리고 노후의 건강관리와 즐 거움을 찾기 위해 나는 그에게 골프를 권유하여 같이 즐길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였다. 나는 목장도 남에게 대여해 주고 골프와 등산 그리고 간간히 테니스로 열심히 건강관리를 하였다. 그러나 테니스란 운동은 하도 격렬한 운동이어서 나도 그렇지만 아내는 너무나 힘 에 부쳐 늙어서 같이할 수 있는 운동으로 골프를 늦게나마 아내에게 가르쳐 같이 라운딩 하 게 되었다. 이렇게 약 10여 개월을 건강관리를 위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2. Ao Tea Roa (길고 흰 구름의 나라) 1993년3월경 막내인 상학이가 다니고 있던 직장인 KTB를 통하여 뉴질랜 ABC(Associate Business Consultant)LTD 회사로부터 요청을 받아 이민을 갈 것인가 하는 문제로 우리와 의논하기 위해 순천으로 내려왔다. 이 무렵 뉴질랜드 정부가 한국인들의 기술이민과 투자이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때였기 때 문에 뉴질랜드의 ABC 회사는 투자이민자들을 상대로 한, 사업상담 업무를 담당할 전문요원 이 필요하였던 것이었다. 나는 손자 지용의 장래를 보아서라도 뉴질랜드 이민을 떠날 것을 동의라기보다 권장하였다. 오클랜드에 자리 잡은 막내는 살기가 좋은 나라로 판단되니 우리에게 한번 다녀가라는 연 락을 보내왔다. 그래서 우리부부는 막내가 이민을 간 나라에 대한 호기심과 이민생활의 안 착상태도 확인할 겸 뉴질랜드로의 여행을 다녀오기로 하였다. 1993년9월15일 말레시야 항공기로 김포공항을 출발 쿠아라룸풀에서 환승하여 약 20여 시 간 이상 걸려 뉴질랜드의 오클랜드에 도착하였다. 그 때만 해도 우리나라 국적기인 KAL이나 Asiana항공의 뉴질랜드 취항이 없었을 뿐만이 아니라 김포공항에서 뉴질랜드 행 직항 항공기는 하나도 없었다. 원주민 마오리의 말로 Ao Tea Roa(길고 흰 구름의 나라) 뉴질랜드라는 땅이 발견되기는 약 1000년 전 남태평양 폴리네시아에 살고 있던 마오리족에 의해 발견되었고, 그 후 1642 년 네덜란드 인 Abel Tasman이 유럽 인으로는 처음으로 이 섬에 도착하여 그 경치가 너무 나 아름다워서 모국의 Zealand주의 이름을 따서 새로운 질랜드라는 뜻으로 New Zealand라 고 이름을 붙였던 것이 지금의 국명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뉴질랜드는 2개의 큰 섬인 북섬과 남섬으로 한반도의 크기보다 약간 크며, 기후는 해양성 기후로 계절의 차이가 심하지가 않고 적도 남쪽에 위치하여 우리나라의 계절과는 정반대이 다. 인구는 총350만 중 원주민인 마오리족이 약10%에 이르고, 인구 분포는 오클랜드에 약 100만 명이, 수도 웨링톤에 30만 명, 제2의 도시 크라이스처치에 35만 명 그리고 나머지 각 지역으로 분포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부부는 도착한 다음날부터 1주일동안 오클랜드 시내와 인근지역을 두루 관광하였다. 제일 먼저 One tree hill과 Mt Eden으로 올라갔다. 오클랜드 시가지와 바다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고, 또한 오클랜드 주변에 몇 군데 남은 사화산의 흔적을 보기 위해서였다. 정상에 서 본 오클랜드의 풍경은 참으로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다음으로 우리는 박물관을 비롯하여 가장 번화한 거리의 중심인 Queen Elizabeth 광장으로 부터 뻗어 있는 Queen St로 들어섰다. 많은 사람들이 바쁜 걸음으로 움직이고 있으면서도 눈이 마주치면 먼저 미소를 띠우며 "하이"하고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그 다정함이 참으 로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바다에 여유롭게 떠다니는 요트들을 보면서 맑은 공기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막내가 출근하지 않는 토요일과 일요일을 이용하여, 온 가족이 함께 북섬에서 가장 잘 알 려 진 관광지인 Rotorua로 관광여행을 떠났다. 오클랜드 시내에서 외곽으로 얼마 안 나오자 광활하게 펼쳐진 초원, 그런가 하면 산지를 개간한 푸른 초원들이 한눈에 가득 들어왔다. 온 국토가 푸르른 초원으로 덮여져 있는 듯이 보였다. 저 멀리 소 떼와 양떼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것이 나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아름답게 보이는 풍광이었다. 그것은 나에게 각별한 의미가 담긴 그림(희망)이었기 때문인지 도 모르겠다. 비록 내가 한국에서 시도했던 푸른 초원은 어린애 소꿉장난 정도의 작은 것이 었지만! 쉼 없이 계속된 관광여행으로 피곤하여 나는 하루 온종일 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이튿날부 터는 한국에서 굶주렸던 골프를 치러 나섰다. 이곳 퍼부릭 골프장의 입장료는 뉴질랜드 돈으로 $7밖에 하지 않았으니, 그 당시 환율 430:1로 환산했을 때 한화로 약3000원 정도로 너무나 싸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한국에서 골프를 한번 치려면 비싼 입장료도 문제이지만 어렵게 예약을 해야 하고 같이 플 레이 할 멤버들도 조가 짜여져야 하는 등 하나의 행사가 치러져야 하는데 이곳에서는 혼자 이든 둘이던 도착하는 순서대로 칠 수 있으니 정말 골프의 천국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날 Takapuna골프장에서 나 혼자서 치다가 앞 팀의 두 사람과 같이 치게 되었다. Mr, Brown과 Mr, Bredry 두 사람은 나이가 나보다 몇 살 더 많은 것 같았다. 어느 나라에서 왔 느냐는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자기들도 6.25한국전에 참전하였다는 이야기가 나와 나도 참전 하였고 32년 간 군에 복무하다 퇴역하였다고 했더니, 그럼 무슨 계급으로 퇴역하였는가? 라 고 되물어 장군으로 퇴역하였다고 사실대로 답하자 두 사람은 골프를 치다가 경례를 붙이고 다시 악수를 하면서 만나게 되어 영광이란다. 골프가 끝나자 자기들의 재향군인회 크럽에 가서 한잔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뉴질랜드 사람을 사귀게 된 첫 번째 경우인데 참으로 사람들이 순박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럭저럭 뉴질랜드에서 지난 지 3주가 되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래도 북섬의 주요 관 광지를 대충은 돌아본 것 같았다. 지금까지 내가 보고 느끼며 받은 뉴질랜드에 대한 인상은 조용한 나라, 아름다운 나라, 초원의 나라이면서도 선진국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우리부부는 뉴질랜드가 우리나라와 가까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아쉬워했다. 이번에 귀국을 하면 다시 오기는 힘들 거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그 당시는 왜 그리도 먼 나라로 인 식했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부부는 기왕에 여기까지 왔으니 일정을 연기해서라도 남섬 까지 둘러보고 귀국하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우리부부가 선택한 남섬 관광은 남섬의 크라이쳐치를 출발지로 기차와 버스를 이용한 5박6 일 간의 관광여행이었다. 이 여행 중 우리는 크라이쳐치에 도착하여 시내관광을 하는 중에 여권을 분실하여 걱정을 하는 가운데 편치 않은 마음으로 여행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관광버스 운전사인 Mr, Jack 의 도움으로 크라이쳐치 경찰서에서 여권을 되찾은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베푼 헌신적인 도 움과 친절에 무척이나 탄복하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순수하고 선하게만 보이는 뉴질 랜드 사람들에 대한 깊은 인상을 마음속에 담아두게 되었다. 3. 살고 싶은 뉴질랜드 남북 섬을 다 관광한 우리부부는 뉴질랜드라는 나라에 매료되어 버렸다. 물론 아름다운 자연조건을 지닌 것은 물론 생활여건이 좋은 나라라는 점에서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너무 나 좋아 이곳이 이 지구상에 남은 하나의 지상낙원이라고 생각되었다. 우리는 뉴질랜드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무엇보다도 우리들의 노후생활 의 최우선 목표인 건강관리를 위한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즐겁고 편안한 마음으로 취미 생활(골프와 낚시)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살려면 살 수 있는 여건과 조건이 맞아 떨어져야하는데 그것을 먼저 확인 해야만 했다. 처음에 우리는 이민이라도 올까 생각을 했으나 우리에게 이민조건도 맞기가 어렵거니와 죽으면 국립묘지에 안장될 우리이다 보니 이민을 꼭 고집할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이민성을 찾아가서 뉴질랜드에 오래 머물 수 있는 VISA를 알아보았다. 우리에게 적 용될 수 있는 VISA는 관광VISA 3개월을 받고 입국한 후 추가로 9개월을 연장하여 1년까지 뉴질랜드에 머무는 방법이 있었다. 그러나 이 역시 뉴질랜드에서 머문 기간만큼의 기간이 지나야 재입국이 가능하다는 제한사항이 붙어 있었다. 다음으로 생활비의 조달문제였다. 그 당시 나의 연금액수는 월 190만원 정도였다. 이곳 뉴 질랜드에서 거주할 경우 주택비가 추가로 소요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쌀값, 육류, 과일 등이 한국에 비해 1/3 값이고 휘발유 가격은 1/2값이니 식 생활비나 차량유지비 등은 저렴하였고 골프비용은 회원으로 가입하면 년 간 250일을 친다고 계산하였을 때 매1회 당 한화 1천원 꼴이 안 치일정도였다. 월 생활비의 소요는 NZ $2,000정도 한화로 약 90-120만원 정도면 충분하다고 판단되었다. 이렇게 볼 때 한국에서 드는 생활비보다도 1/3이상이 적게 든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우리는 일단 귀국하여 1년 간 뉴질랜드에 가서 생활할 준비를 진행했다. 아파트도 1년 간 전세를 놓고 자동차 구입비와 생활비 일부를 준비하여 막내와 연말연시를 같이 지나기 위해 서둘러서 2개월 후인 그 해 12월30일 뉴질랜드에 재입국하였다. 약20여 일간 막내의 가족과 같이 지나다가 우리가 생활할 집을 Auckland시내에서 약40km 떨어진 Whangaparoa라는 해안 가 별장지대에 월세 집을 얻어 이사를 하였다. 이 집은 2층집으로서 위층에 침실과 거실 및 주방이 있고 아래층에 침실과 큰 오락실 그리 고 넓은 정원이 있는 구조였다. 아담한 거실에서는 넓은 바다가 훤하게 보이는 전망이 아주 좋을 뿐만 아니라 걸어서 2분이면 해변에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물론 몸만 들어가 살 수 있는 가구와 포크 나이프를 비롯한 취사도구까지 다 갖추어 진 별장이었다. 그런데 상수도가 없어 집집마다 물탱크가 설치되어 지붕에 떨어지는 빗물을 받아 물탱크에 저장하 여 사용하고 있었으며 그 수량이 부족하면 물차가 돈을 받고 보충해 주는 것이 특이했다. 월세는 그 당시 한화로 약55만원 지불한 것으로 기억된다. 집에서 5-7분만 걸으면 갯바위 낚시터에 닿을 수 있고, 골프장과 슈퍼마켓은 차로 10분 거 리 내에 있었으며, 골프장에서 10분 더 가면 온천장이 있었다. 집 앞의 낚시터에서 낚시가 아주 잘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물때를 맞추어 나가면 심심치 않게 반찬거리는 잡을 수 있 었다. 거의 매일 새벽에 낚시, 오후에는 골프를 하고 온천욕을 할 수 있는 건강관리에 아주 좋은 여건이었다. 한편 우리부부는 회원으로 가입한 Peninsula Golf Club에서 한국전에 참전하였다는 Mr, Wick Hall 부부를 사귀게 되어 서로 왕래하면서 친밀하게 지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우리 가 귀국할 때 자기의 집에서 그 근처에 사는 한국전참전용사 부부 십여 명을 불러 파티도 열어주었다. 어느 날, 우리가 오클랜드 시내 막내네 집에 머물었을 때, 나가던 교회에서 남 목사를 비롯 하여 여러 교인들이 이곳 우리 집에 심방을 왔다. 그들은 우리 집 거실에서 내다보이는 전 망에 매혹되고 우리들이 사는 방법을 보고는 이렇게 사는 방법도 있다며 탄복하는 것이었 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뉴질랜드에 이민을 오면, 생계문제로 오클랜드 시내에서 거주하 게 된다. 설사 생계문제가 어렵지 않게 돈을 많이 가지고 온 투자이민 자들도 이곳에 도착 하면 한국에서 못해본 관리하기도 벅찬 큰집을 사고 Benz나 BMW 등 고급승용차를 구입하 는 것이 통상적인 예이다 보니 뉴질랜드의 아름다운 자연을 벗 삼아 생활할 수 있는 기회나 여건을 누릴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나와 알게 된 김 씨는 한국에서 대기업의 부장으로 있다가 뉴질랜드에 투자이민을 온 사람 이었다. 그는 가끔 내가 낚시를 해 온 싱싱한 생선회와 매운탕을 즐기면서 자기의 심정을 나에게 털어놓곤 했다. "뉴질랜드에서는 마땅히 할 만한 사업도 없고 가져온 돈을 곶감 빼먹 듯이 빼먹고 있으니 밤에 자다가도 가끔 벌떡벌떡 일어나게 된다."라고 했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듣고 보니 같은 뉴질랜드에서의 생활도 필요한 최소한의 돈으로 마음 먹기와 방법에 따라서는 나름대로 멋진 생활을 할 수 있음을 우리는 다시 확인하게 되었고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이 생활이 바로 우리가 바라던 건강하고 즐겁게 사는 노후생활이 라 여겨졌다. 우리 집에서 30-40분 거리 내에는 좋은 낚시터가 많았다. 어느 날, 물때가 좋은 새벽에 약 40분이 걸리는 낚시터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좁은 해협으로 배가 가운데로만 다니는 것으로 보아 분명 깊은 골이 파져 있을 수로로 판단되는 곳이었다. 물이 들기 시작하여 낚시를 수 로로 판단되는 곳에 던졌다. 약 10분이 되었을 가? 낚시는 크게 휘어지고 약 10분 이상 투 쟁하여 올려보니 60cm정도의 트러배리 였다. 이 정도면 징그러울 정도로 큰놈이다. 얼마 후 또다시 70cm가 넘는 놈을 낚아 올렸다. 이렇게 약 4시간 만에 60cm가 넘는 트러배리 6마 리와 참돔 2마리 합이 8마리를 잡았다. 가지고 간 큰 부대만 한 비닐부대에 넣고 한꺼번에 둘러메려고 했더니 너무나 무거워 멜 수가 없었다. 차가 있는데 까지는 약 300m정도의 거 리여서 나는 4마리씩을 부대에 담아 둘러메고 날라 중간지점에 쏟아놓고 다시 가서 날라 오 는 방법으로 운반했다. 나는 집에 들어가기 전에 내가 다니는 낚시가게부터 들러 잡은 고기를 보여 주었다. 가게 주인이 놀래며 제일 큰놈을 골라 자로 재 보았더니 73cm나 된다며 놀라는 것이었다. 그리 고 사진을 찍어두었다. 집에 들어간 나는 아내와 잡은 고기들을 처리하는 방안을 의논했다. 참돈 1마리와 트러배리 1마리씩 2마리는 우리가 갖고 남 목사 댁도 2마리 그리고 4마리는 박 장로, 이 집사, 구씨와 최씨에게 각각 1마리씩 나누어주기로 했다. 나는 싱싱한 회를 먹 으라고 얼음에 채워 40km나 떨어져 있는 시내로 나가 집집마다 돌며 나누어주고 나니 얼 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우리가 이곳에서 1년 간 생활하는 동안 여러 친지들이 다녀갔다. 먼저 이 강역 사장 내외분 또한 옛 나의 부하였던 장 세권 장군 부부를 초청하여 우리 집에서 10여 일간 같이 지나면 서 내 차로 북섬의 Bay of Island를 포함하여 북단의 Cape Reinga까지 그리고 Rotorua와 Taupo 등 두루 관광하며 즐겼다. 이 이외 큰딸 효숙, 김 진만 목사 그리고 정 재범 중령 내외가 다녀갔다. 어느덧 이곳에서 이렇듯 낙원의 생활을 한지도 1년이 다 되어왔다. 그간 우리들의 생활은 활기차고 즐거웠다. 그러나 우리는 VISA관계로 부득이 뉴질랜드를 출국해야만 했다. 우리는 1년 후 다시 뉴질랜드에 와서 살기로 마음먹고 대부분의 짐과 자동차를 오클랜드에 살고 있는 박 장로 댁에 임시로 보관시켜 두고 귀국 항공기에 올랐다. 4. 집시 같은 생활 1년간 뉴질랜드에서 살아보고 귀국한 우리의 국내생활은 전보다 더 힘들게 느껴졌다. 우 선 나의 지병인 당뇨와 아내의 고혈압이 악화되었다.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고 생활비도 뉴 질랜드 보다 많이 지출되었다. 우리는 노후생활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곳은 역시 뉴질랜 드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여건을 최대로 활용하여 뉴질 랜드에서의 생활을 다시 계획하였다. 1996년1월2일 우리는 다시 뉴질랜드로 떠날 때, 둘째 딸 진숙네 아이들인 외손녀손자 정윤 (중2), 자윤(중1), 재혁(초4) 3남매를 1개월간의 겨울방학을 이용하여 뉴질랜드의 남북 섬을 내 자동차로 여행을 시킨다는 목적으로 함께 데리고 갔다. 드디어 즐거움에 들뜬 아이들과 무사히 상학이네 가족이 살고 있는 남섬의 크라이스처치에 도착하였다. 우리부부는 아이들 셋을 태우고 남섬 관광을 위한 자동차여행을 떠났다. 자동차 여행을 떠 날 때는 여행 중 먹을 밑반찬과 쌀, 전기밥솥과 아이스박스에 찬 음료수 그리고 상비약을 준비하고 다녔다. 숙박은 음식을 해 먹을 수 있도록 시설된 모텔을 예약하여 이용했고, 아침 식사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우유, 겨란, 햄, 베이콘과 빵으로 간단하게 하고, 점심은 햄버거 나 켄터키치킨 등 Fast food로 때우며, 저녁 한 끼는 전기밥솥으로 밥을 지어 쇠고기 스태 이크나 쇠고기 전골을 만들어 먹었다. 어느 날, 퀸스타운으로 들어가는 국도연변에 있는 Bungy Jump의 원조인 A, J, Hackett 장 소에 다다랐을 때 차를 멈춰 세웠다. 아이들은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이는 강 밑으로 발목에 강력한 고무 로프를 묶고 다이빙하는 스릴이 넘치는 번지잠프를 처음 구경하면서 입을 벌렸 다. 12살 먹은 재혁이가 자기도 한번 해 보겠다는 것이다. 나는 위험하기는 해도 용기가 가 상하고, 담력을 키울 수 있는 경험이 될 것 같아서 접수처로 가서 신청했다. 그랬더니 나이 가 몇 살이냐고 물어 12살이라고 답하자 16살부터 가능하니 4년 후에 오라고 한다. 아쉽지 만 도리가 없어 돌아서려는데 갑자기 내가 한번 해 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 다시 접수처로 갔다. 내 나이를 물어 63세라고 했더니 55세까지란다. 나는 자신이 늙었다는 것을 또다시 망각했었던 것 같아 씁쓸한 아쉬움을 안고 돌아서야 했다. 다음날 아이들에게 Jet Boat를 태워주기 위해 Kawarau 강으로 갔다. 주변의 풍경도 근사 하여 정취를 만끽할 수 있었고, 강가의 바위 사이를 미끄러지듯 빠져나가고 수면으로 튀어 나가기 직전에 급회전하는 Jet Boat의 날쌘 속도와 스릴을 맛보는 아이들은 연상 소리를 질 러댔다. 이튼날 남섬관광의 하이라이트인 Milford Sound관광을 끝으로 남섬관광을 마치고 크라이처 치 막내의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들은 3일간의 휴식을 마친 9월20일 아침 크라이스처치를 출발하여 북섬으로 가는 페리 의 발착지인 Picton로 가서 자동차를 배에 싣고 Cook 해협을 건너 북섬의 Wellington으로 갔다. 그리고 Taupo-Rotorua-Auckland-Bay of Island를 관통하면서 북섬의 최북단인 Cape Rainga까지 북상하였다. 1월27일 세계에서 제일 긴 Beach로 이름난 90miles beach가 시작되는 Kaitaia라는 도시에 오후 늦게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할 어처구니없는 대형 사고를 저질렀다. 나는 90miles beach 에서 자동차가 달리는 관광 홍보물을 본 기억이 나서 비치에 나가 신나게 한번 달려보고 싶 었다. 그러나 아내는 피곤하다며 모텔에서 쉬겠다기에 아이들만 태우고 비치로 나갔다. 바닷물에 젖어있는 모래 위를 북쪽방향으로 한참 멋지게 달렸다. 아이들은 차의 천장창까 지 열어 저치고 고개를 내밀고서 환호성을 지러댔다. 한 10km쯤 달렸을 때 되돌아가야겠다 고 생각하고 차의 속도를 줄이고 우회전을 하는데 물기가 없는 모래에 차바퀴가 닿으면서 차가 더 이상 나가지 못하고 서 버리고 말았다. 아이들이 다 내려 차를 뒤에서 밀며 빠져나 가 보려고 가속페달을 힘차게 밟아보았으나, 밟으면 밟을수록 차는 점점 더 모래 속으로 빠지는 것이었다. 바닷물이 한참 들물이라 얼마 안 있어 차가 물에 잠기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 급해지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차도 사람도 안 보인다. 나는 차가 모래에 박혀 움직일 수 없 으니, 긴급 도움을 바란다는 글을 영어로 써서 아이들에게 쥐어주면서 남쪽방향으로 뛰어가 다가 사람을 만나면 주라고 했다. 나는 맥 놓고 모래에 주저앉아 버렸다.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잠시 후 꼼짝없이 차는 바닷 물에 잠길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어 차안에 있는 물건들을 밖으로 끄집어내기 시작하는데, 북쪽에서 오도바이 한대가 신나게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나는 두 팔을 높이 들고 흔들면서 오도바이를 정지시키고 도움을 청했다. 오도바이주인은 알았다면서 쏜살같이 도시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가고 아이들은 도중에서 돌아왔다. 얼마 안 되어 오도바이는 삽과 물통을 가져와 빠진 바퀴 쪽의 모래를 파내고 바닷물을 붇고 뒤에서 차를 밀고하여 마침내 차를 뽑아내는데 성공하였다. 나는 십년감수한 것 같았다. 한편 도와 준 Mr, Clean에게 저녁식사라도 같이 하자고 간청하였으나 극구 사양하여 나는 아직도 그의 이름만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2월1일 오클랜드 공항에 도착하여 아이들 셋을 한국 행 비행기에 태워주고 돌아서는 우리 는 너무나 허전함을 느꼈다. 그러나 한 달간의 뉴질랜드 남북섬 자동차여행 장장 3505km를 무사히 마치게 된 것을 감사하며 이번 여행이 장차 아이들의 가슴속에 즐거운 추억으로 장 식되기를 바랬다. 우리부부는 막내가 있는 크라이스처치로 되돌아갔다. 이곳에서의 생활 중 골프여건은 북섬 의 오클랜드보다 더 좋은 편이었으나 낚시는 물이 차서인지 잘 안되었다. 3월초쯤이 되자 이곳의 기온은 많이 내려가 추위를 많이 타는 아내는 지나기가 어렵다고 했다. 또 한편 이미 10년 이상을 우리 단둘이서만 살아왔던 습관 때문인지, 아들네가족하고 같이 생활하는 것도 사실상 불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리부부는 북섬을 관광하던 중, 너무나 아름다워 보이는 해안 가 마을(별장지대)을 지나면 서 이런 곳에서 한번 살아보았으면 좋겠다던 Manganui 지역의 Coopers Beach를 생각해냈 다. 그런데 우연하게도 교민잡지에 바로 그 지역에 바다가 내다보이는 별장이 비어 있으니 살고 싶은 사람은 연락을 하라는 광고가 나 있었다. 우리는 눈이 번쩍 뜨여 다시 확인한 후, 그곳으로 가기로 결심하였다. 몇 일 후, 짐을 차에 싣고 남섬에서 북섬의 북단까지 1,350km를 2일 만에 도착하여 별장 의 주인을 만났다. 주인은 독일인 의사와 결혼한 황 씨 성을 가진 한국인 부인이었는데 별 장이 있는 곳에서 약 30km 떨어져 있는 Kaitaia라는 도시의 병원에서 근무하여 그곳에 살고 있었으며, 알고 보니 빈집과 가재도구 등을 관리하는 측면에서 집세를 안 받고 빌려주겠다 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 날로 열쇠를 얻어 입주하였는데 바다가 훤하게 내다보이는 괜찮은 별장이었다. 이곳의 기온은 남섬의 크라이스처치보다 7-8도c정도 따듯했고, 아름다운 마을은 그리 크지 는 않았지만 있어야할 것은 거의 다 갖추어져 있어 생활하기에 불편함이 별로 없었다. 동양인은 우리부부 뿐이어서 인지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가 친절했다. 더욱이 예상외로 낚 시가 참으로 잘 되는 지역이었고, 골프장은 약 15분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우리의 생활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거의 일정하고 단순했다. 즉 나는 새벽부터 아침 9시 까지 낚시를 하였는데 매일같이 40-50cm짜리 참돔 두세 마리 그리고 존도리(고급어종)를 두세 마리 잡아 왔다. 아내는 참돔의 회를 뜨고 매운탕을 끓이거나 존도리의 포를 떠서 튀 김으로 식탁을 마련하여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오후 2시경부터 골프를 하는 일과였지만 그 렇게 마음이 편안하고 즐거울 수가 없었다. 여기에서 내가 즐겼던 낚시 이야기를 빼 놓을 수는 없다. 낚시터는 망가누이 만에 있는 어 항의 선착장으로 집에서 자동차로 3분 거리였다. 망가누이 만에는 들 물의 경우 Kingfish를 비롯하여 중형 참돔 그리고 존도리와 같은 비교적 고급어종들이 들어오는 천혜의 낚시터였 다. 미끼로는 살아 움직이는 정어리 새끼들과 가와이(Australia Salmon)를 잡아 사용했다. 어종들이 크기 때문에 낚시 대를 끈으로 묶어놓지 않은 실수로 나는 2대의 낚시 대를 통째 로 고기에게 희사하고 말았다. 나는 Kingfish를 잡아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여러 번 걸어는 보았으나 낚시 줄이 끝까지 다 풀어지도록 끌거나가 내 스스로 줄을 끊을 수밖에 없거나 감아올리다가 줄이 끊어지거나 도 중에 빠져나가는 등 낚아 올려 보지를 못했다. 나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던 어느 날 아침, 나의 낚시 줄이 풀려 나가기 시작 했다. 낚시 줄이 풀려나가는 것으로 보아 Kingfish가 분명했다. 나는 낚시 대를 잡아 세우고 Fish on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릴을 감아 올려 보았다. 감기는듯하더니 다시 차고 나간다. 줄이 끊어지지 않을 정도로 릴을 조정하여 힘들게 끌고 나가도록 풀어주다가 다시 감아올리 기 시작하자 이놈이 자 우로 왔다 갔다 하며 요동을 친다. 이미 같이 낚시하던 7-8명의 낚 시꾼들은 나의 Fish on 하는 소리를 듣고 낚시꾼의 예의를 지켜, 전원이 낚시 대를 걷고 내 가 낚아 올리는 것을 도와주거나 구경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20분 이상을 당겼다 풀었다 했 더니 양팔의 힘이 거의 다 빠져 더 이상 감아올리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매일아침 이곳에 서 만나는 Jhon에게 도움을 청하여 내 낚시 대를 감아올리도록 했다. 약 30분이 지났을 무 렵 힘이 빠진 Kingfish는 끌려오기 시작했다. Jhon은 나에게 낚시 대를 되돌려 주면서 마지 막 낚아 올리는 맛을 보라는 것이다. 낚시 대를 건네받는 순간 다시 차고 나간다. 나는 얼마 간 풀어주다가 감기시작 하였더니 순순히 끌려왔다. 결국 이렇게 40여분동안의 투쟁 끝에 선창가로 끌어당길 수가 있었다. Jhon이 긴 쇠꼬챙이를 준비하고 있다가 Kingfish를 찍어 올렸다. 나의 낚시 소원을 이룩한 1996년3월5일 아침8시50분, 길이:1.19m, 무게: 10.5kg인 Yellow tail Kingfish를 낚아 올린 그 감격을 나는 영원히 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물때가 저녁 무렵인 날은 아내와 같이 낚시를 하는데 고기가 입질을 할 때, 걸어 채는 감 각은 오히려 나보다 좋았다. 어느 날, 아내 혼자서 존도리를 11마리인가를 낚아 올린 적 이 있었다. 다행이 우리부부는 취미가 같았다 아니 맞추었다는 말이 더 맞을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아는 친구들에게 노후생활을 위해 부부간의 취미를 일치시키는 노력을 하라고 권유한다. 이렇게 생활하다 보니 어느덧 6월 달에 들어섰다. 기온은 많이 차가와 지고 비가 자주 내 리기 시자하면서 낚시도 뜸해졌다. 한편 한국에 비어두고 온 집도 궁금해 졌다. 우리는 낚시 가 잘 되는 좋은 계절 6개월을 뉴질랜드에 와서 지나고, 나머지 기간을 한국에서 지나면 VISA문제도 해결되고 이상적일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내년 초에 다시 뉴질랜드로 오기 로 하고 귀국하기로 하였다. 귀국한 우리의 생활은 역시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만족스러운 생활이 못 되었다. 특히 매일 같이 운동을 못하여 나의 건강이 다시 악화되었다. 식생활을 조절하지 못하는 나의 건 강이 염려되었다. 우리는 뉴질랜드에 재입국이 가능한 시기를 고대하다가 6개월이 되자마자 다시 뉴질랜드로 출발하여 1997년1월1일 네 번째로 뉴질랜드의 오클랜드 공항에 도착하였다. 또 다시 지난번에 살던 아름다우면서 낚시가 잘되는 마을, 망가누이 지역 Coopers Beach 로 가서 지나기 위하여 짐을 맡겨놓은 김 명식 씨가 거주하는 Whangarei의 집을 찾아 들어 갔다. 이튿날 우리는 그곳으로 가서 지방신문에 "60세가 넘은 부부가 4-5개월간 휴양할 목 적으로 거주하고 져하며, 담배나 술을 안 하고, 애완동물도 안 키움, 가구가 갖추어진 바다 가 내다보이는 전망이 좋은 집을 구함'"이라고 광고를 냈다. 그러나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 한 문제가 생겼다. 뉴질랜드는 12월20일부터 익년 1월15 일까지는 Holyday 기간이라 별장이나 모텔, 심지어 개인 집까지 만원이란 사실을 깜박했던 것이다. 결국 우리는 이 휴가기간이 끝난 1월19일에야 별장을 얻어 이사를 할 수 있었고, 그동안 왕가레이의 김 씨 댁에서 하숙생활로 지났다. 이렇게 우리의 생활은 완전히 집시와 같은 생활이었지만 삶에서 욕심을 버리는 것을 최우 선으로 생각하는 나에게는 그 자유로움이 무척이나 좋았다. 이사한 다음날, 낚시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낚시가게에 들렸더니 구면인 주인은 나를 아주 반갑게 맞이하면서 이곳에 Mr, Ho라는 동양사람 한 가정이 이사를 왔는데 알고 있느냐는 것 이다. 한국 사람이냐? 전화번호는? 하고 물었더니 모르겠다고 한다. 성이 호 씨라는 것으로 보아 중국인이 아닌가 싶으면서도 몹시 궁금증이 더해갔다. 2일 후, 호 현기 씨 댁에서 전화 가 걸려왔다. 한국 사람이라는 것이다. 몹시 반가워 그날 저녁 당장 우리 집에 초청하여 내 가 잡은 생선으로 회와 매운탕으로 가족파티를 열었다. 나는 호 씨에게 어떻게 이 외진 곳으로 살러오게 되였는지를 물었다. 스스럼없이 나온 답 은 이곳이 너무 아름다워 한번 살아보고 싶어서 왔다는 것이었다. 옳거니, 우리와 꼭 같은 생각을 하는 낭만적인 사람이 또 있었구나 하고 감탄하였다. 지금까지 이 지역에 동양 사람 은 우리뿐이었는데 호 씨 가족이 온 후 우리는 자주 왕래하면서 낚시와 골프도 같이 하고 즐겁게 지내게 되었다. 낚시는 1월 달이라 그리 잘 되지 않았지만 순박한 시골사람들과 골프를 즐길 수 있었다. 나는 1997년 1월 31일 이곳의 Whangaroa Golf Club 11번 홀에서 Hole in One을 내 생애 처음으로 하였다. 너무나 기뻤다. 나는 전 회원의 축하에 보답하는 뜻으로 약 $100정도 Club Bar에서 술을 내고 전 회원들이 싸인한 나무로 조각한 트러피를 받았다. 우리가 이곳에 있는 동안 조용한 곳을 좋아하는 장 순철 사장 내외가 우리와 같이 지내기 위해 2월 10일 뉴질랜드에 도착하여 우리 집에 묵으면서 관광과 휴양으로 즐겁게 지났다. 그 때만 해도 장사장의 건강이 염려되어 남섬 관광을 포기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또한 장 사장이 떠나고 3일 후부터 거짓말처럼 참돔을 비롯하여 존도리 등 고급어종이 잘 잡히기 시 작하였다. 4월이 되자 낚시는 더 잘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5월초 미국으로 가서 만나기로 약속한 많 은 친지와 친척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도 4월말에는 일단 귀국을 해야 할 입장이었다. 가장 아쉬운 점은 한참 낚시가 너무 잘 되는 철에 이곳을 떠나야 하는 점이었다. 5월1일 우리부부는 계획대로 미국 여행길에 올랐다. 1961년부터 1년간의 군사유학을 마치 고 1962년에 귀국한 이래 미국에 갈 기회가 많았지만, 미국에서의 입맛이 쓴 인종차별의 경 험 때문에 실로 34년만의 미국 방문여행인 셈이었다. 이번 미국 여행목적은 세 가지 뜻을 지니고 있었다. 그 하나는 오랫동안 만나보지 못한 LA 에 살고 계시는 고모님과 고종 4촌 여동생들과 그리고 LA의 새한교회 목사로 시무하고 있는 동생네 학수부부, NY에 살고 있는 동생 성수부부, 조카 진영이와 창우 등을 만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란에서 절친하게 지나던 탁 대신 목사를 비롯한 한 상준, 김 혜성, 정 순경, 김 봉섭, 김 세일 씨 등 여러 친지들을 방문하기 위함이고, 세 번째는 34년 전 내가 공부하던 Fort Knox 미 기갑학교를 다시 방문해 보고 싶었고 또한 아내에게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특별히 이번 여행과정에서 그 동안 소식이 끊겼던 이란에서 호주와 남미로 이주한 교민들 의 소식 중 호주로 간 유 화자 선생과, 윤 상현 집사, 그리고 브라질로 간 한 규전 씨 등의 소식은 너무나 반가웠다. 우리는 우선 전화로 통화하고 시간여유가 있는 우리가 가급적 빠 른 시일 내에 한번 방문하겠다고 약속하였다. 5. 호주의 시드니에서 미국 여행에서 귀국한 우리는 2개월 후 다시 뉴질랜드로 가는 길에 호주의 시드니를 경유 하면서 이란에서 같이 지내던 옛 벗들을 만나보기 위하여 5일간 시드니에서 머물기로 하고 7월27일 아침 시드니 공항에 도착하였다. 공항에는 25년 만에 만나는 유 화자 선생 내외와 윤 상현 집사 내외를 비롯한 많은 그리운 얼굴들은 물론 전연 예상하지 못한 나의 전속부관이었던 박 윤성 중위도 만날 수 있었다. 도착한 날이 마침 주일날이어서 호텔에 짐을 풀고 이란에서 같이 예배를 보던 친지들이 다 니고 있는 교회로 안내되어 예배를 보고 저녁 만찬석상에서 오랜만에 지난 세월의 많은 이 야기들을 나누면서 회포를 풀 수가 있었다. 우리부부가 그동안 뉴질랜드에서 생활한 이야기 와 이번에 외손녀인 정윤이를 공부시키려고 뉴질랜드로 데리고 간다는 말을 들은 친지들은 한결 같이 나의 발목을 잡는 게 아닌가. 자기들과 같이 호주에서 살자는 것이다. 학교도 뉴질랜드보다는 호주가 나을 것이고 특히 호주에는 Retirement VISA(은퇴비자)라는 것이 있으니 뉴질랜드 보다 편리할 것이라는 것이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그 제안도 나 쁘지 않고 손녀의 학교와 우리부부의 VISA문제도 편리할 것 같아 그러면 그렇게 하자고 하 여 뉴질랜드로 가는 것을 중단하고 시드니에서 살기로 결정해 버렸다. 몇일 후부터 거주할 주택과 손녀가 입학할 학교 등 새로운 생활여건을 갖추는 일에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고 그 과정에서 윤 상현 집사와 박 윤성 집사의 헌신 적인 도움은 지금까지도 정말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은퇴비자를 취득하고 난 후에, 뉴질랜드에 가서 우리가 살던 Coopers Beach에 보관 했던 골프채와 낚시 대등 짐을 챙겨 옴으로서 뉴질랜드에서의 집시 같은 생활을 마감하게 되었다. 우리가 호주의 시드니에서 살기 시작한지 벌서 5년 반의 세월이 흘렀다. 이곳에서의 건강 관리와 취미생활 중 낚시가 뉴질랜드에서만큼 잘 안 되는 것이 아쉽지만 골프는 뉴질랜드와 다름없어 우리들의 건강관리에 크게 도움이 되어 주고 있다. 30여 년 전, 이란에서 같이 지나던 옛 친지들과 이곳에서 같이 어울려 사는 맛도 큰 즐거 움이며, 나의 친한 벗 황 의병 사장 내외를 이곳으로 초청하여 함께 남태평양의 여러 섬을 순항하는 Norwegian Capricorn호 유람선으로 크루즈 여행을 한 것이나, 또한 박 노영 대사 님 내외분 그리고 장 순철 사장 내외의 방문으로 이곳에서 같이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 었던 것도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길 수 있게 한 즐거움이다. 뉴질랜드에서와는 달리 호주에서의 생활은 건강하고 즐겁게 살자는 것은 물론이지만, 나름 대로 보람된 삶을 찾아서 실행해보자는 삶에 관심을 더 기울이기로 하였다. 그것들은 손녀 들의 유학 뒷바라지, 신실한 신앙생활, 6.25한국전 및 월남 참전전우회에 대한 봉사, 그리고 지나온 내 삶을 글로 남기는 일들이었다. 특별히 신실한 신앙생활을 추구하면서 겪게 되는 신앙적인 번뇌는 내 신앙의 질을 변화시 켜가고 있는 것 같다. 지금까지 기독교 신앙은 내 삶에 있어 가장 귀중한 지표였다. 그러나 모태신앙인 나는 사실상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기독교를 믿기 시작하여 이 나이가 다 되도 록 성찰이나 각성도 없는 인습적인 신앙생활을 해 왔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그러나 나 는 얼마 전부터 나의 신앙생활을 성찰해보고 번뇌하는 과정에서 "예수를 잘못 믿는 것은 안 믿는 것 보다 훨씬 더 문제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 깨달음은 내 신앙생활을 바 르게 할 수 있는 귀중한 보람이라 생각된다. 세월이 유수와 같다더니 이렇게 빠를 줄은 정말 몰랐다. 그러나 되돌아보는 70성상은 그리 짧은 세월만도 아니었다. 이 글을 엮으면서 지나온 나의 부족하고 못난 모습을 새삼 발견하게 되었다. 굽이굽이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나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 님께 감사할 따름이며 우리의 생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느님이란 것을 확신하게 된다. 그 동안 나는 36년간의 공직생활에서 불의(不義)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상대에게 관 용을 베풀지 못한 것을 아쉽게 생각하며. 내 생각과 내 처신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남에게 상처를 준 것이 적지 않은 것 같다. 이 글을 통해서 용서를 빌고 싶다. 우리부부는 1년 후, 결혼50주년인 금혼을 맞게 된다. 2남2녀의 자녀에서 친, 외 손녀손자 를 10명이나 얻었고, 적지 않은 세월 동안 어려움도 있었지만 지금까지 건강하게 함께 살아 왔다. 항상 내 곁에서 동반자가 되어준 아내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그러나 이 글을 쓰는 동안 나는 큰딸 효숙이를 잃어 자식을 앞세운 비통함과 슬픔을 겪 게 되었다. 가슴을 후려 파는 아픔을 참기가 힘들다. 나의 간절한 소원은 나의 후손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올바르게 그리고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며 살아가기를 원하는 것이다. 앞으로 우리부부의 삶이 얼마나 더 허락될는지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 감사하며 보다 겸허하고 진실한 삶의 자세로 살아가려 한다. 끝. 저자 약력 성 명 : 한 인 수 출생지 : 중국 단동 생년월일 : 1933, 5, 2(양) 학력 만주 신경 영락국민학교 서울 동성고등학교 조선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육군대학 정규과정 67기 경력 1951, 7, 21 : 육군소위 임관 1951 - 53 : 6.25한국전 참전 (소총소대장 및 중대장) 1955 - 56 : 전차중대장 1961 - 62 : 미국 기갑학교 고등군사반 수료 1964 - 66 : 전차대대장 1966 - 67 : 육군대학 수료 1967 - 68 : 군수참모 (보병8사단) 1968 - 70 : 육군대학 교관 1970 - 71 : 작전참모 및 참모장 (제2기갑여단) 1971 - 73 : 월남전 참전 (주 월남한국군사령부 비서실장) 1973 - 74 : 국외전략정보과장 (육군본부) 1974 - 77 : 국방무관 (주 이란 한국대사관) 1978 - 80 : 기갑여단장 (제1기갑여단) 1980 - 82 : 교수부장 (제3사관학교) 1982 - 82 : 부사령관 (제1군관구 사령부) 1982, 8, 31 : 퇴역 (육군준장) 1983 - 86 : 목장 경영 1986 - 92 : 직업훈련원장 (한국 인력관리공단) 상훈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보국 천수장 보국포장 미국 동성무공훈장 월남 은성무공훈장 자유중국 은모훈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