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목마당

여보게, 남들은 벌써 우리를 할아버지라고 부른다네. 그밖에도 할배, 영감, 노인, 古老라고도 하는데 어쩐지 썩 내키지 않는 이름일세 그려.

나이 먹은 사람을 두고도 얼마든지 고상한 이름이 있지 않던가? 神仙, 仙客, 仙人은 좀 지나치고, 仙郞 정도면 어떻겠나? 花郞이 나이를 먹었으니 仙郞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

그러나 저러나 아무리 이름을 좋게 붙여본들 결국 알맹이는 변하지 않는 法, 할배고 영감이고 仙郞이고 간에 산(生) 날보다 살 날이 많지 않은 게 우리 처지, 종점이 멀지 않은 승객이 바로 우리가 아닌가.

그런데 "끝이 좋으면 모든 게 좋아진다"라고 한건 셰익스피어였던가?

주위를 돌아보니 너나 나나 社長, 會長 다 내놓고, 계급장도 다 떨어진 백수 신세라, 40여년 전 아무개 生徒 시절로 돌아온 기분일세 그려.

그 동안 잘 나가는 사람에, 잘 못 나가는 사람, 그저 그런 사람에, 별의별 일도 많았지만 막차로 終點 가까이 오고 보니 모든 게 덧없는 것, 역시 셰익스피어 말대로 끝만은 좋아야 하지 않겠나.

花郞이 아무나 되는 게 아니듯이 仙郞도 아무나 되는 게 아닌 것. 花郞이 世俗五戒를 버젓이 지켰듯이 우리도 그 흉내 한 번 내봄세. 그래야 仙郞대접도 받을 것이요, 무엇보다 끝이 좋아지는 게 아니겠나.

그러면 무엇으로 銘戒를 삼을 건가?

其一을 [知足]으로 하면 어떻겠나? 知足이라, 곧 足한 것을 안다. 과거가 어쨌건 욕심을 더는 부리지 않고 지금의 형편과 처지에 滿足한다. 현재의 自己形便, 子息 농사, 健康 등 모든 것에 만족한다. 만족 못하겠다면 어쩌겠냐고? [足]모르면 [慾]이 기승을 부리는 法. 지금 당장 옛날 같이 불고기 5人分에 우래옥 냉면 곱빼기로 못 먹을 것도 없지. 그러나 한 번 먹어보자고. 탈나지. 탈나고 말고.

내가 아는 財界大先輩 한 분 古稀를 넘어서 손녀뻘 되는 아리따운 신부를 맞아들여 주위의 부러움을 한 몸에 모았겠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訃告가 날아오지 않겠나. 참으로 有能하고 좋은 일도 많이 한 분이었는데, 그만 그 욕심 이기지 못하여 가실 길을 재촉하였던 것. 그래서 西洋 격언에도 "노인을 정중하게 죽게 하려면 젊은 아내를 보게 하라"는 충고도 있더라만.

銘戒其二는 [知止]가 좋겠지. 知止, 멈추는 것을 안다, 나아갈 때와 멈출 때를 안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제 웬만한건 멈추어도 될 때가 아니겠나. 그러니 뛰던 걸음도 늦추고, 숨차면 그 자리에 앉아서 담배라도 꺼내 물고서는, 먼 산에 걸린 구름이라도 한 번 바라보세.

그래서 진작에 老子는 "知足이면 不辱이요, 知止면 不殆"라1) 하였던 게 아니겠나.

銘戒其三은 [安分]이면 어떨꼬. 安分이라, 분수를 안다, 편안한 마음으로 분수를 지킨다. 옛날 선비들이 즐겨하던 安貧樂道와 통하는 말인데, 쉬운 일은 아니로다. 그러나 孔子의 이 말씀은 한 번 吟味해 볼만하지 않는가. "거친 밥에 물 마시고 팔 베고 누워도, 즐거움은 또한 그 가운데 있으니."2) 孔子의 다른 가르침은 몰라도 이거야 공자 흉내 못 낼 것도 없지 않는가? 밥 먹고 물 마시고 팔 베고 누우라는 것인데, 安貧樂道가 따로 있나. 공자 말씀대로 하면 되는 걸세.

銘戒其四는 어찌할꼬. [不猛]이면 어떨까? 不猛이라, 사납지 않다. 본래는 [論語]에서 孔子를 두고 한 말이지. "봄날처럼 溫和하였지만 서릿발처럼 峻嚴하였고, 威嚴이 있으되 사납지 아니 하였다(威而不猛)"3)에서의 不猛이다. 다시 말해 공자는 溫에 치우치지도 않았지만 　(준엄할 여)에도 기울지 않았다. 큰 바위와도 같은 威嚴과 權威가 넘치면서도 사납지가 않았다 ― 그야말로 中庸之道로다.

우리는 원래 完全主義者, 絶對主義者로 교육을 받지 않았던가. 결판을 내는 것, 끝장을 보는 것, 그래서 칸네나 탄넨베르크의 殲滅戰 같은 것을 平生의 꿈으로 살아온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얼마 전에 美國에서 證券에 실패한 사람이 증권담당자를 쏴 죽이고는 自殺하였다는데, 이런 게 소위 결판을 내는 것이라네. 나이 들면 마음도 절반, 욕망도 절반, 그저 萬事를 절반으로 하란 말이 있더라. '결판을 낸다. 끝장을 본다'는 이제 우리와는 관계가 없는 걸세. 그래서 록펠러는 "싸울 게 아니라 去來"를 하랬고, 고대 로마의 세네카도 "紛爭은 결판을 낼게 아니라 自制하는 게 유리"하다고 했던 것일 게다. 나이 들면 지나침도 모자람도 그저 비켜가세. 그야말로 過猶不及이요4), 中庸之爲德이라.5) 中庸이 最高의 德이지.

中庸이 최고의 덕인 줄은 누가 모르랴만, 그 놈의 實踐은 孔子도 어렵다고 하였는데,6) 어찌 감히 중용을 들먹이는가. 하기야 중용은 입에 올리는 것 조차도 無嚴한 일이지. 그러나 중용을 이루려면 어렵긴 해도 이거는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나.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다."7) 종점이 가까웠는데 사람을 미워한들 어떻게 할 것이며, 더구나 하늘을 원망해봐야 덕 될 게 무엇이겠나. 중용은 정말 어려우니 "不怨天不尤人"부터 해보세.

銘戒其五는 耳順으로 함세. 耳順이라, 귀가 순종한다 ― 이것은 공자가 70 평생을 회고하면서 한 그 유명한 말, "吾十有五而志干學하고, 三十而立하고, 四十而不惑하고, 五十而知天命하고, 六十而耳順하고, 七十而從心所欲不踰矩"8)에서 따온 것이지만, 귀가 순종한다, 즉 남의 말을 잘 듣고, 남의 주의, 주장을 잘 받아들이면 되는 것인즉 못해낼 것 없지 않겠나.

黃熹 정승 식으로 너도 옳고, 자네도 옳고, 임자도 옳다는 식으로 무조건 옳다고만 하면 되는 것이요, 또 듣기만 하면 되는데 누군들 못하겠나. 知天命은 어려울 듯 싶지만 耳順은 될 성도 싶으이. 안 그런가?

대저(大抵) 사람의 실수는 손, 발, 입에서 시작하는 法, 耳順이면 손발의 기력도 시원찮으니 크게 그르칠 일없으렷다. 그러나 항상 입이 문제인데, 그놈의 입은 기력과 별 상관없으니 조심할 진저. 그래서 진작에 莊子 가로되 言者風波요, 禍從口生이라 하였던 게 아니겠나. 口禍는 耳順으로 다스릴 수 밖에. 그러니 늙으면 그저 어깨 힘 빼고, 으시대지 말고, 아는 체 말고, 과거 武勇談 늘어놓지 말고, 그저 耳順일세. 그래서 孔子도 耳順을 고집하였겠다.

해놓고 보니 모두가 힘빼라는 소리만 했네 그려. 그러나 여보게, 그렇게 소침해질 것 없네. [禮記]에 보면 古來로 老人에 대한 禮遇를 50才로부터 90才까지 다르게 하도록 정해 놓았는데,9) 그게 무얼 뜻하겠나. 60代라면 老人치고는 아직도 小壯 축에 들어간다는 뜻이 아니겠나.

일본에서도 60代를 Diamond Age, 70代를 Golden Age, 80代를 Silver Age라고 한다니, 우리는 아직도 Golden Age와 Silver Age가 남았다는 말이 아닌가?

미국 사람들은 대개 60代에 은퇴를 한다는데, 그 사람들은 은퇴를 숫제 Happy Retirement라고 한다던가? 직장을 떠나는 우리 동양 사람들은 解放感보다 갈 곳을 잃었다는 喪失感을 더 느끼나 본대, 이것만은 西洋 흉내를 내는 게 백번 옳은 일일세. 왜냐구? 40년 이상을 조직과 돈 눈치 보기 바빴던 우리가 언제 '내 人生'을 살 수 있었던가? 정말 내가 쓴 '시나리오'대로 내 인생을 살아본 사람 우리 중에 과연 몇이나 되겠나?

생각해보면 지금부터가 내 인생이요, 그 무엇에나 눈치보고 꿀릴 필요가 없는 정말 떳떳한 내 인생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지금부터가 아닌가?

여보게, 지는 해가 벌써 西山에 걸려 있네. "志士는 해(年)를 아끼고, 賢人은 날(日)을 가끼고, 仙人은 時를 아낀다"고10) 하였으니, 우리에게도 寸陰이 重千金이렸다. 늘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고11) 생각하고 열심히 살아보세.

하루해가 저물었으되

노을이 오히려 아름답고,

한 해가 장차 저물려 하는데

귤 향기가 더욱 꽃다웁고나.

그러므로 인생의 만년은,

군자가 마땅히 그 정신을

다시 백배로 할 때로다.

(菜根潭)12)

오호라, 떠들다 보니 내 입이 멈출줄 몰랐구나. 知止不殆라 해놓고도 이 지경이니 못말리는 게 慾心이요, 分數로다. '仙郞五戒'라니, 얻다대고 그런 염치 없는 소리를 해대는가? 老人이면 老人이지 仙郞은 또 무슨 妄發인고. 安分不辱하려면 마땅히 '老人五箴'으로 냉큼 고치렸다.

각주

1) 知足不辱知止不殆可以長久([道德經] 44).

2) 飯疏食飮水曲肱而枕之樂亦在其中矣([論語] 述而15).

3) 溫而　威而不猛恭而安([論語], 述而 37).

4) 過猶不及([論語] 先進15).

5) 中庸之爲德其至矣乎民鮮久矣(雍也 27).

6) 人皆曰予知擇乎中庸而不能期月守也([中庸] 7章).

7) 不怨天不尤人([論語] 憲問 37). 尤: 더욱 우.

8) [論語] 爲政4.

9) 50세에 이르면 壯者와 그 양식을 달리하고, 60세 이상의 자는 미리 고기를 준비 하여 드리며,70세 이상의 자에게는 이선(貳膳; 常食이외의 맛있는 음식)이 있다. 80세 이상의 자에게는 常食에 모두 珍味를 드리고, 90세 이상의 자는 음식에 있어 그 침실을 떠나지 않으며 선음(膳飮)이 그 노는 데에 따라 준비되어야 한다(五十異진 六十宿肉七十貳膳八十常珍九十飮食不離寢膳飮從於遊可也六十歲制七十時制八十月制九十日脩唯絞　衾冒死而后制([禮記], 王制篇).

10) 志士惜年, 賢人惜日, 聖人惜時 (魏源의 [默　], 學篇).

11) 로마 皇帝 아우텔로우스

12) 日旣暮而猶姻霞洵爛歲將晩而更橙橘芳馨故未路晩年君子更宜精神百倍 (菜根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