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목마당

우리가 살아오는 동안 가끔 이런 질문을 받았을 것이다.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내 경우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런 물음에 어릴 때 젊을 때, 나이 들어서 차츰 변하는 것이었음을 가끔 깨닫곤 한다.

청소년 시절에는 영웅호걸이었고 철 들어서는 진솔한 애국지사였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은 다름 아닌 내 할아버지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변해 있었다.

십여년전 한 겨울철에 근무하던 직장에서 동절기 중견간부 연수교육계획에 따라 경기도 광주 인근의 아늑한 교장에 도착하자 바로 강의 시작시 노트를 나누어주면서 강사는 "각자 자기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며 그 이유가 무엇인지 서술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한동안 나를 돌아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쓰기 시작했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은 바로 다름 아닌 내 할아버지라고.

그러니까 6·25 남침 이틀 후 대전에서 공직에 계시던 숙부님 두 분은 직장과 함께 남으로 떠나시고 숙모님 두 분과 사촌들이 짐과 함께 차로 고향집에 당도하였고 조부님께서는 중요한 것들을 대청마루 밑 지하실에 옮겨 놓도록 하시고 화재를 대비해 마루 위에 멍석들 깔고 흙을 덮으라 하시어 당시 일꾼 두 사람과 집안에 일할 수 있는 남자 모두가 동원돼 일하는데 갑자기 경찰이 찾아와 큰 일꾼을 불러 데려 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니 집안에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는데 큰 낭패였다.

당시 면장으로 계시던 아버지가 퇴근해 오시자 할아버지께서 큰 일꾼이 꼭 좀 돌아와야 되겠다고 말씀하셨고 어떻게 된 영문인지 그는 돌아와 잠깐 비추고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 아버지는 남으로 가셨고 할아버지와 남은 많은 가족들은 등과 머리에 양식과 옷보따리를 지고 이고 소에는 쌀을 실어 한 이십여리 떨어진 산간벽지를 향해 비를 맞으며 험난한 피난길에 나서 오후 늦게 목적지에 당도했다.

골짜기에 다락논이 이어지는 윗쪽 산기슭에 다섯 가구의 조그마한 동네. 한 잎담배 건조실에 피난짐을 풀었다. 고단한 몸을 쉬고 아침을 맞으니 당장 땔나무가 있어야겠기에 다정한 작은 일꾼과 함께 산에 올라갔다. 때마침 미공군기가 고향쪽을 향해 폭격을 시작하더니 거의 저녁 녘에야 조용해졌고 그 다음날 아침 벌써 이 골짜기에도 해방이 되어 인공치하에 있게 되었다는 포고문이 미루나무 줄기에나 붙어 있어 이를 보는 순가 크게 실망했지만 반듯이 수복되리라는 희망을 가졌다.

며칠 지나니 쌀도 떨러져 하는 수 없이 양식을 가지러 소를 몰아 고향집을 찾으니 사랑채 화단과 샘가 그리고 장독대 언저리에 진분홍 목백일홍이 흐드러지게 피어 주인을 반기나 느껴지려는 것도 잠시, 집 안팎에 널려 있는 북괴군이 먹다 놓은 그 많은 음식물과 그 썩은 냄새, 그릇들에 새까맣게 달라붙은 파리떼들 나는 참담함을 씹으며 청소부터 해야했고 저녁 때 뜻밖에 총을 멘 한 방문객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는 다름 아닌 우리집 큰 일꾼이었고 지금은 이 동네 치안대장이었다. 그는 할아버지 계신 방으로 들어가 인사한 후 곧 떠났고 그리고 우리는 피난처로 오가며 조용히 지냈다. 당시 나보다 두 살, 네 살 위의 삼촌 두 분은 의용군에 끌려갈 위험 때문에 산에 피신해 있었고, 식량 운반책임은 내가 맡고 있었다. 천애고아로 우리 집에 데려와 나와 정이 깊이 들었던 작은 일꾼은 치안대장의 꾐에 넘어가 장차 도지사 자리를 보장받았다며 내가 만류함에도 뿌리치고 북괴군 의용군으로 흔쾌히 떠났고 그리고 그의 소식도 끊겼다.

산들바람이 부는 가을의 초입 소를 몰아 양식을 가지러 집으로 가는데 갑자기 항공기가 머리 위에 나타나 고향쪽을 향해 맹렬한 폭격을 시작하므로 숲속에 숨어있는데 어두워서야 폭격이 끝나 급히 소를 몰아 길에 나서니 인민군이 한길 가득히 나와는 대 방향으로 후퇴하는 것이 보였다. 나는 어둠 속에서 마음속으로 기뻐하면서 남하하신 아버지를 곧 만나 뵙는다는 희망에 설레었다.

힘들게 집에 당도하여 문안드리려 할아버지 계신 방에 드니 깜깜한 방에 할아버지 앞에 바로 치안대장이 앉아 있지 않은가. 인사를 드리자 할아버지께서는 그에게 하시던 말씀을 계속하셨다. "지금부터 한 십년 동안 이곳을 떠나 네 처가나 먼 친척집 어디에 가서 숨어 살다 세상이 잠잠해지거든 다시 와 살던지 해라." 하곤 말씀을 마치자 그는 하직인사와 함께 홀연히 어두움 속에 사라졌다. 그리고 우리 식구들 모두 그를 잊었다.

십수년 전 몹시도 추웠던 겨울, 할아버지께서는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고향에 내려가서 내가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던 할아버지의 죽음 슬퍼했다. 그리고 뜻밖에 잊혀졌던 옛날의 큰 일꾼의 조문을 받게 되었다. 환갑을 넘긴 초로의 나이에 들어있던 그가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것을 보는 순간 지나간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그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어른을 잃었어. 내 생명의 은인일 뿐만 아니라 평소 동네 어려운 사람들에게 덕을 베푸시는데 주저함이 없으셨지. 위급한 어린이가 있어 데려오면 집에 있는 한약재를 서슴없이 약을 지어주셨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밥을 나누게 하시는 등 참으로 남에게 선선하셨지." 라고 혼자 말하는 것이었다.

나도 당시의 일들이 떠올랐다. 그 추웠던 1·4후퇴 당시 우리집은 경부선 철로변으로 피난민 행렬이 꼬리를 물고 내려오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끼니때가 되면 찾아들었고 할아버지께서는 모두 받아들이셨다. 그리고 선선히 먹이고 재워 주셨다. 그 뿐이셨다.

할아버지 장례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나의 아버지께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 바로 할아버지라고 아뢰니 아버지께서는 당신 할아버지 즉 내 증조할아버지를 존경하신다며 이야기를 꺼내셨다.

어떤 나그네가 장질부사에 걸려 동네에 찾아드니 집집마다 문전박대를 하더란다. 그러다 우리집에 이르던 그를 증조부께서 불쌍히 여기시어 헛간방에 거두시어 그에게 손수 밥과 약을 날라주시며 간호하셨고 옷과 그릇들을 쇠죽가마에 직접 삶아 소곧하시는 등 정성을 기울이신 결과 완쾌되어 그를 떠나보내셨다.

그후 그를 가족들은 잊었고 증조할아버지도 세상을 뜨셨다. 그리고 얼마 후 한 젊은이가 북어 몇 쾌를 메고 나타나서 자기가 이집 할아버지 덕에 살아나서 그 은혜를 못 잊어 할아버지를 찾아왔노라고 하기에 "이제 어쩌나 그 어른은 삼년전에 돌아가셨는데"하니 땅바닥에 주저앉아 대성통곡하더라는 말씀이셨다. 나는 감동했고 이런 조상님들을 모신 것에 감사드렸다.

조부께서는 평소 전래 가훈이 忍之爲德이고 中庸에서 가르치는 智·仁·勇을 추구해야 할 德目으로 삼아야 하며 積德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道理 즉 富爲라는 것을 어려서부터 나에게 가르쳐 주셨다. 그래서 오늘 밤 나는 할아버지가 그렇게 존경스러울 수가 없다.

핵가족시대라는 요즈음 접촉이 소원한 손자들에게 무엇이 가장 소중한 것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先代처럼 본을 보여야 할텐데.

깊이 성찰하고 힘써 실행할 내 인생의 과제로 삼는다. 끝.